조홍섭 2018. 06.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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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처럼 단단한 알 위장 거쳐도 일부 생존
기생말벌 대항해 알껍질 견고해졌을 가능성
» 대벌레를 잡아먹는 직박구리. 이 대벌레의 뱃속에 알이 있다면 배설물과 함께 먼 곳에 이동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하쿠렌 카토 제공
대벌레는 나뭇가지나 잎과 구분하기 힘든 모습과 색깔을 갖춘 굼뜬 곤충이다. 이 곤충이 수십㎞ 떨어진 나무가 많은 신천지에 새끼를 퍼뜨리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자신을 먼저 새의 먹잇감으로 희생한다면,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의 먹이가 돼 자손을 퍼뜨리는 번식전략은 사실 매우 흔하다. 많은 나무가 맛좋은 열매를 새에 제공하고 배설물과 함께 먼 곳에 떨어진 씨앗이 싹을 틔운다. 놀랍게도 대벌레의 알은 형태와 색깔이 나무 열매의 씨앗과 닮았다. 껍질은 매우 단단한데, 외피는 옥살산칼슘으로 씌어 있어 강산에만 녹는다. 다시 말해 새의 위장을 거쳐야 싹을 잘 틔우는 얼개를 갖췄다.
물론 미수정 상태인 곤충의 알과 이미 수정을 마친 열매는 다르다. 곤충 암컷은 짝짓기로 확보한 정자를 따로 보관했다가 산란 직전에 수정시킨다. 뱃속에 든 알은 미수정 상태이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암컷의 알만으로 수정 없이 번식하는 처녀생식을 하는 곤충이 있다. 일부 대벌레도 이렇게 번식한다.
» 직박구리에 먹혀 새끼를 확산시키는 대벌레의 번식전략을 묘사한 그림. 고베대 제공
겐지 세츠구 일본 고베대 생물학자 등 일본 연구자들은 대벌레를 직박구리가 주로 잡아먹는다는 데 착안해, 나무 열매처럼 대벌레의 알도 소화기관을 거쳐 깨어날 수 있는지 실험했다. 직박구리는 대벌레를 먹은 지 3시간 뒤 배설했다. 연구자들은 3종의 대벌레 알 가운데 5%, 8.3%, 8.9%가 소화기관을 거치면서 외형이 손상되지 않은 채 배설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나 부화에 성공한 알은 없었다. 연구자들은 “자연 상태에서도 대벌레 알은 부화율이 매우 낮다”라고 밝혔다.
또 다른 실험에서 직박구리에 먹힌 한 종의 대벌레 알은 배설물에서 20%가 온전했고, 이 가운데 2개는 성공적으로 부화했다. 알을 가진 대벌레 암컷이 직박구리에 먹혀 혼자서는 상상도 못 할 먼 거리에 새끼를 퍼뜨릴 가능성이 입증됐다. 직박구리는 시속 40∼60㎞로 비행하기 때문에 배설 때까지 수십㎞를 이동한다. 게다가 대벌레의 산란기는 직박구리의 이동 시기와 일치한다.
» 씨앗과 비슷한 형태인 대벌레 알(왼쪽)과 새 배설물을 통해 이동한 뒤 부화한 새끼. 겐지 세츠구 외 (2018) ‘생태학’ 제공.
그러나 연구자들은 “대벌레 알이 견고해진 것은 새끼의 확산이 아니라 기생말벌에 대항하기 위해서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대벌레 알의 주요 사망원인은 알 속에 기생말벌이 자신의 알을 낳는 것이다. 기생에 대응하기 위한 적응이 새끼 확산이라는 부수효과를 거두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이 흔히 일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알이 잘 성숙한 상태에서 암컷이 잡아먹혀야 하고 또 알이 용케 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미 주변에서 새끼가 바글바글 태어나는 것보다 먼 곳으로 퍼져나가는 진화적 이득은 아주 크다. 실제로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에서도 달팽이가 직박구리에 먹혀 먼 곳의 섬으로 퍼져나간다는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관련 기사: 살아남기 위해 새에게 먹히는 달팽이 번식전략).
» 직박구리의 배설물에 섞여 장거리 이동한 일본 오가사와라 제도의 달팽이. 7∼8마리에 하나는 살아남았다. 와다 신이치로 외 (2011), ‘생물지리학회지’ 제공.
연구자들은 “새를 통한 장거리 확산이 진화적 이득을 얻는지는 처녀생식을 하는 개체가 더 멀리 퍼지는지를 유전자 분석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며 “이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라고 밝혔다. 이 연구는 과학저널 ‘생태학’ 최근호에 실렸다.
■ 기사가 인용한 논문 원문 정보:
Kenji Suesugu et al, Potential role of bird predation in the dispersal of otherwise flightless stick insects, Ecology, Volume 99 Issue 6, June 2018, pp 1504-1506, https://doi.org/10.1002/ecy.2230
조홍섭 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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