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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5일 토요일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모욕받는 천안함 생존자들

 등록 :2021-06-06 09:06수정 :2021-06-06 09:11


[토요판] 기획
천안함 생존장병의 트라우마

천안함 사건 뒤 11년 지났지만
생존장병 여전히 패잔병 취급
제대로 된 지원이나 관심 없고
사건만 볼 뿐 생존자 주목 안해

천안함재단과 46용사 유족회, 생존자전우회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저희처럼 버림받습니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승섭 제공
천안함재단과 46용사 유족회, 생존자전우회가 지난달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앞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지 마세요. 저희처럼 버림받습니다”라는 손팻말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승섭 제공
▶ 2010년 3월26일 해군 천안함 장병 46명이 숨지고 58명이 살아남았다. 진보와 보수 진영은 이 사건을 두고 첨예한 정치 공방을 이어갔다. 하지만 정작 그 배에 타고 있던 이들의 고통을 살피는 이는 드물었다. 한 생존장병은 지난 11년을 “보수는 이용했고, 진보는 외면했다”라고 표현했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다른 양상의 진영 대결이 이어졌다. 그렇게 고통에 대한 공감은 취사선택됐다. 두 사건 생존자를 모두 연구한 김승섭 고려대 교수는 이들의 고통은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진영에 따라 고통의 크기를 다르게 재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우리 사회가 그들의 손을 먼저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레시오 아베난티 박사는 2010년 <현대 생물학>(Current Biology)에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합니다. 연구팀은 흑인과 백인 각각 18명씩으로 이루어진 36명의 실험 참가자들에게 낯선 사람의 손등을 날카로운 바늘로 찌르는 동영상과 부드러운 면봉으로 자극하는 동영상을 보여줍니다. 동영상을 보는 동안 실험 참가자들의 뇌에 전자기 자극을 가하고 손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측정합니다. 낯선 이의 고통에 얼마나 공감을 하는지 알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이 연구가 흥미로운 이유는 동영상에 등장하는 손의 피부색이 3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실험은 백인, 흑인, 그리고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보랏빛 피부색을 가진 사람의 손을 대상으로 이뤄졌습니다. 연구 참가자의 인종에 따라 나눠 본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흑인 참가자는 동영상에 등장하는 흑인의 고통에는 공감했지만, 백인과 보라색 피부를 가진 사람의 고통에는 그처럼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백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영상 속 백인의 통증은 자신의 것처럼 느꼈지만, 흑인과 보라색 피부를 가진 이가 겪는 고통은 그만큼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았던 것이지요.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인종의 고통만을 선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보라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

2018년 <한겨레>와 함께 ‘천안함 생존장병 실태조사’를 하며 이 실험이 종종 떠올랐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은 제가 연구를 하며 만났던 한국 사회의 다양한 사회적 약자 집단 중에서도 비교 대상을 쉽게 찾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연구 결과가 알려진 뒤 많은 사람들이 제게 어떻게 그 참혹한 현실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저는 그저 “우리 모두가 무관심했다”고 답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 다른 대답이 떠올랐습니다. 혹시 많은 이들이 천안함 생존장병을 다른 ‘인종’으로 생각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타인의 상처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그 사람에게 마음을 내주었을 때만 시작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요. 진보 진영은 2018년 이전까지 한 번도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이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천안함 사건의 정치적 의미에만 주목했지 정작 그 배를 탔던 이들의 고통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습니다. 매년 3월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와 사진을 찍어 갔지만, 그 이후에는 어떤 연락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존장병들은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그 슬픔을 함께하려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지난 11년을 버텨왔습니다.베트남전에 참여했다가 트라우마를 겪은 군인들을 조사한 연구들은 피해자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주변 사람들의 사회적 지지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일관되게 지적합니다. 하지만, 생존장병들은 지지받지 못했습니다. 군대에서 그들은 ‘패잔병’으로 취급받았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신음하는 군인들의 고통은 눈에 띄는 상처가 없다는 이유로 꾀병으로 폄하됐습니다. 그런 낙인 속에서 그들은 정신과 진료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말을 번번이 목에서 삼켜야 했습니다. 천안함 사건 트라우마로 배를 타지 못했던 생존장병 중 몇몇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동안 배를 타지 않은 탓에 장기복무에 필요한 점수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직업군인으로서 꿈을 접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국가로부터 내쳐졌던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손팻말에 적은 “그래도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라는 말이 안타깝다. 김승섭 제공
국가로부터 내쳐졌던 천안함 생존장병들이 손팻말에 적은 “그래도 이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라는 말이 안타깝다. 김승섭 제공

군과 정부는 생존장병들을 보듬는 대신 이 참혹한 사건의 방패막이로 활용했습니다. 생존장병들은 천안함 사건이 벌어진 지 불과 2주 뒤인 2010년 4월7일, 환자복을 입은 채 기자회견에 응해야 했습니다. 그 기자회견을 두고 여러 언론이 비난했습니다. 명예를 생명처럼 여기는 군인이 환자복을 입고 언론에 나왔다거나, 군에서 진실을 감추기 위해 함구령을 내렸다는 말들이 한국 사회를 떠돌았습니다.그러나 현실은 사람들의 짐작과 달랐습니다. 생존장병들은 기자회견을 한다는 사실을 전날 밤에 통보받았습니다. 그들은 급작스레 기자회견에 투입되어 수많은 카메라 앞에서 충분한 준비 없이 말해야 했던 시간을 내내 아쉬워했습니다. 기자회견 이후로는 그들이 세상에 말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환자복을 입은 경위도 알 수 없습니다. 군에서 처음에는 군복을 입으라고 했다가 갑자기 환자복으로 바꿔 입으라는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생존장병들은 그 이유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군은 생존장병들에게 함구령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양심선언을 해라”라는 말이나, “도대체 이명박한테 얼마를 받았길래 진실을 그렇게 숨기냐”는 댓글을 보면 생존장병들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고 합니다.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의 장병은 국가로부터 어떤 보상도 받지 못했고 더 보여줄 진실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해했습니다. 앞장서서 의심을 풀어야 할 군은 여전히 생존장병 뒤에 숨었습니다. 생존장병들이 군에 왜 온갖 억측과 음모론에 대응하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럴 가치가 없다’는 답만 돌아왔습니다.어떤 이들은 최원일 함장이 천안함 사건 이후에 정부와 모종의 거래를 했고 그로 인해 ‘고속 승진’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닙니다. 그는 그 사건 이후 올해 전역을 하기 전까지 10년 동안 한 차례도 승진하지 못했습니다. 한 생존장병은 새로운 발령지에서 상사로부터 “함장이 죽었어야 니들이 보상금을 받는데, 걔가 살아 있어서 니들이 못 받는 거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최 함장은 천안함 사건 이후 군 감찰단의 고소로 입건되어 조사를 받는 모욕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타인의 고통 조롱하는 잔인함
지난달 28일 최 함장을 만나 물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강한 군인이어도 누가 욕하고 때리면 아픈 인간일 텐데, 도대체 그 시간을 어떻게 버틴 거냐.’ 한참을 생각하던 최 함장이 입을 열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앞뒤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내가 죽었다면 사고로 처리해버렸을 것 같다. 그럼 천안함에 탔던 104명의 장병들은 얼마나 억울하겠나. 살아남았기에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다.”저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용역연구 책임자로 세월호 참사에서 생존한 단원고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작업을 진행했었습니다. 물론 2010년의 천안함과 2014년의 세월호는 침몰 원인과 그 사회적 대응이 전혀 달랐고, 오늘날 전자는 보수, 후자는 진보의 사안으로 여겨져 아무런 접점을 찾을 수 없는 사건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서해바다에서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을 잃었던 생존학생과 같은 내무반에서 생활하던 전우들을 잃었던 생존장병을 모두 만나 그들의 상처를 기록하는 작업을 했던 제가 보기에 이 두 사건은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앙상한 실력이 드러난 사건들이라는 점과 그 피해자의 고통을 조롱하는 진영 논리의 폭력성과 잔인함이 만개한 사건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에서 생존한 학생이 자살 시도를 해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 그 가족들이 병원 의료진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는 “이 자살 시도가 세월호 참사와 연관성이 있다는 게 증빙되지 않으면 개인 의료보험으로 입원해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만약 치료비를 심사하는 위원회에서 이 자살 시도가 참사로 인한 게 아니라고 하면 병원은 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피해자는 내 고통이 재난으로 인한 것이라는 인과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전역자 21명 전액 사비로 치료
세월호 생존 피해자 모습과 겹쳐
국가가 우선 심리치료 지원해야


천안함 생존장병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국가유공자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천안함 사건으로 인한 것이라는 인과관계를 증명하는 일은 생존장병의 몫입니다. 제대 이후 치료비가 없어서 정신과 진료를 받지 못했는데, 그 시기 진료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지금 네 상태는 천안함 사건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세월호 생존학생과 천안함 생존장병 모두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등과 같이 재난과의 연관성이 충분히 알려진 질병에 대해서는 일단 국가의 지원으로 치료를 해주고, 그 인과성이 의심되는 경우에 인과관계가 없다는 증빙서류를 국가가 제출하는 경우에 한정해 심사를 거쳐 개인이 사후적으로 돈을 내게 하는 게 맞습니다. 2018년 연구에 참여한 생존장병 중 연소득 2천만원이 안 되는 비율이 40%에 이르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절실하게 필요한 변화입니다.천안함과 세월호의 생존자들이 자신의 트라우마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견디는 동안,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바라보며 보상금을 떠올리고 상처를 헤집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생존학생의 부모에게 어떤 이웃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수억원의 보상금을 언급하며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돈은 없었다고 말하자, “다 아는데 뭘 감추냐”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국가가 결정한 생존학생의 특례입학 제도를 두고 ‘친구 팔아 대학 간다’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주변의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했고 국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간혹 “살아서 좋냐” “군법회의에 회부해서 총살해야 한다” 같은 댓글을 만날 때면 온종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차가운 세상을 견디는 데 필요한 것

이러한 비난은 진영 논리 속에서 강화되었습니다. 진보, 보수라는 이름으로 나뉘어서 생존자의 상처에 생채기를 더하면서 자신이 정의롭다는 착각을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정의의 이름을 독점한 사람들이 가장 잔인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두 사건의 생존자를 두고 양 진영의 사람들은 타인에 대해 얼마나 더 가혹해질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듯 상대방을 모욕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두 사건의 피해자를 함께 애도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난 천안함 생존장병과 세월호 생존학생은 누구보다도 비슷한 상처를 견뎌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천안함 생존장병 중 가장 젊은 군인의 당시 나이는 20살로 세월호 생존학생이 참사를 겪었던 17살과 불과 3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려봅니다.


생존자 트라우마와 싸우는 동안
주위에선 “살아왔다”며 모욕도
우리 사회가 그들 지킬 외벽 돼야


남극에서 무리 지어 살아가는 황제펭귄은 가혹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허들링’을 합니다. 피부를 맞대고 원형으로 모여 열 손실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무리의 바깥쪽과 한가운데는 온도가 섭씨 10도 가까이 차이가 나게 됩니다. 어떤 펭귄도 계속해서 차가운 무리의 바깥 경계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동료의 몸으로 체온을 보존한 펭귄은 곧 바깥으로 나아갑니다. 차가운 세상을 감당한 펭귄이 무리 안으로 들어와 몸을 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이 과정을 계속 반복하며 펭귄들은 함께 살아남습니다.하지만, 가장 위태로운 자리를 자신의 몸으로 감당하며 평화의 대가를 치렀던 천안함 생존장병들에게 사람들 속으로 돌아와 자신의 몸을 데우며 삶을 추스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군대는 낙인찍고 보수는 이용하고 진보는 외면했습니다. 그렇게 생존장병은 누구도 그 고통을 온전히 공감해주지 않는, 이 세상에 존재한 적 없었던 보라색 펭귄이 되어 무리 밖으로 버려졌습니다.그렇게 내쳐진 생존장병들이 천안함 유가족분들과 함께 지난 4월20일부터 국방부 앞에서 매일 아침 시위를 하고 있습니다. 2010년 3월26일 전사한 뒤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국가유공자가 된 46명 용사와 달리, 같은 배에 탔던 생존장병 중 다수는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군에서 제대한 생존장병 34명 중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한 21명은 자신의 치료비를 전액 사비로 부담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지원이 전무한 상황에서 천안함 전우회는 굿즈 판매 등을 통해 치료비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생존장병들은 이 시위가 서해바다에서 이 땅을 지켰던 군인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라고 말합니다.1953년 휴전협정 이후 국지전이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불안정한 평화는 군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국가를 지키는 군인이 살아 돌아왔다는 이유로 모욕받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안전할 수 없습니다. 황제펭귄에게 허들링은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모두가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였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외벽이 되어 그들을 지킬 차례입니다.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



원문보기: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998138.html?_fr=mt1#csidx37ea0ccf73d72329811ea202f8c37e6 

‘백신 접종 100일’ 복지부 “접종률 세계 평균 이상, 상반기 목표 조기 달성”

 허지영 기자 

발행2021-06-05 15:53:03 수정2021-06-05 17:50:55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민중의소리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5일로서 100일을 맞았다. 정부는 국내 인구의 14.5%가 1차 접종을 마쳤으며, 현 속도라면 11월 집단 면역 형성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날 권덕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 보건복지부 장관은 페이스북을 통해 “오늘은 코로나19 예방접종을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이라며 “이는 우리나라 인구 대비 약 14.5%로 세계 평균을 뛰어넘는 수치다”라고 설명했다.

권 장관은 “60세 이상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사전예약률은 80%를 초과하였으며, 실제 접종하신 분들도 99.8%에 달하는 높은 접종률을 보이고 있다. 상반기 백신 물량도 순조롭게 도입되고 있다. 총 1억 9,300만 회분의 물량이 확보되었으며, 이는 우리나라 국민 모두가 맞을 수 있는 충분한 물량이다”라고 밝혔다.

이어 “60세 미만 국민의 참여도 함께 이루어진다면, 7월에는 전국민의 25%가 1차 접종이 완료될 것이고, 이에 따라 사회적 거리두기 또한 변화될 것”이라며 “나와 우리 가족, 모두의 일상 회복을 위해 예방접종에 적극 참여해 주시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린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계획대로 예방접종을 확대해 6월까지 1300만 명+a 접종을 달성하겠다”라며 “세계 공동체의 방역에도 기여하는 백신 허브 국가 달성과 우리 국내 백신 개발에도 매진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정부는 지난 2월 26일 만 65세 미만 요양병원·요양시설 종사자와 입원·입소자 등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을 시작했다.

코로나19 예방접종대응추진단에 따르면 이날 0시 기준 1차 접종자 수는 누적 743만 5천726명이다. 7일부터는 접종 대상이 약 396만 명 규모인 60~64세로 확대되며 접종 속도에 더욱 가속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이달까지 1차 접종 누적 1천300만명+α 목표를 조기 달성하고, 3분기에는 국민의 70%인 3천600만 명을 대상으로 1차 접종을 완료해 11월에는 집단 면역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시작 기륭 언니들..."위험하니까 남자들은 뒤로 가"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지난 40년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바뀐 것도 있으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은 6월 5일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시고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을 개최한다. 그러나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삶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그녀들이 해왔던 투쟁과 현재의 고민을 연재한다. 편집자.


※ 이야기마당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은 5일 오후 2시 온라인으로 중계된다.(☞바로가기 : "전설의 투쟁을 했던 여성노동자들을 모십니다.")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바로가기)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4일 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우개선과 비정규직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300리길 행진하는데 함께 하고 있는 유흥희 비정규직 이제그만 공동투쟁 집행위원장. ⓒ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
 

유흥희 기륭전자분회장에게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이야기마당에 나오라고 했더니, "내가 어디 대선배님들과 같이 하냐"며 고개를 젓는다. 사실 유 분회장은 활발하게 투쟁하는 현직이다. 기륭전자 최동렬 회장에 대한 법적 소송도 조금 남았다. 게다가 그녀는 요즘 눈에 띄게 투쟁하고 있는 '비정규직이제그만 1100만 비정규직 공동투쟁(비정규직이제그만공동투쟁)'의 집행위원장이다. 나는 "기륭전자는 살아있는 전설이지. 여성비정규직 투쟁을 그렇게 치열하게, 그렇게 길게, 공장의 벽을 넘어 한 곳이 있어?"하며 꼬드겼다.


 

마음의 고향, 구로공단


 

유 분회장은 정화여상 재학 시절, 학내 민주화운동을 했다. 사학비리를 알린 전교협 선생님들을 지지하는 사학비리 투쟁을 함께했고, 그 과정에서 시험거부 투쟁(백지동맹)과 농성을 했다. 고등학교 때 투쟁한 적이 있으니, 혹시나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목적의식적으로 구로공단에 들어간 것은 아닌가 싶어 물었다. 그건 아니라고 했다.


"92년에 상고를 졸업하고 경리직으로 몇 곳에서 일했지. 마지막에 화장품 회사 경리를 했는데 대리점에서 장부 조작을 요구하는 거야. 나는 안 한다고 대리점장하고 대판 싸우고 나왔지. 사실 조그만 사업장에서 경리는 빛 좋은 개살구야. 뻑 하면 커피 심부름, 담배 심부름,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고 그걸 매번 거부하는 것도 힘들고, 고등학교 갓 졸업했다고 애 취급하는 시선도 넘 싫고, 공장에 가서 마음 편하게 일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구로공단에 갔지. 그런데 사람들이 나보고 정신 나갔다고 했어. 92년이니까 사회주의권이 망하고 운동이니, 노동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 패배적인 시각이 컸을 때잖아. 그러니 내가 노동운동 하러 가는 걸로 생각한 사람들이 말린 거지."


 

생계를 해결하러 공단에 갔는데 어쩌다 보니 노동운동을 하게 된 경우라 다들 정신 나갔다고 했다. 유 분회장은 공단에서의 첫 1년은 너무 힘들었다고 했다. 공장에서는 위장 취업자와 같은 노동조합을 만드는 시늉만 하는 사람을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분위기가 여전했다. 작은 떡볶이 모임만 가도 이상한 눈으로 보고, 사람들을 따로 만나기만 해도 요주의 인물처럼 관리했다. 결국 4년 7개월 만에 제대로 모임조차 만들지 못하고 현장을 그만두었다. 그 후 구로지역 도서관에서 단체 상근활동을 시작한다. 을지로의 인쇄노조 취업알선센터 상근자로도 일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에 다시 구로공단으로 돌아갔다. 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녀에게 공단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파견직만 뽑는 달라진 구로공단


 

2005년 구로공단의 모습은 92년과 확 달라져 있었다. 구로공단에도 인력사무소, 파견업체가 넘쳐났다. 공장에서 노동자를 직접 뽑는 곳이 아예 없었다. 벼룩시장이나 인터넷으로 뽑았다. 1998년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이 통과된 후 비정규직 사용하는 회사가 늘어난 것이다. 옛날 굴뚝형 공장이 사라지고, 아파트형 공장들이 들어섰다. 바뀐 공장 대부분은 50명 미만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공장들이 많았다. 그래도 규모가 있는 곳을 들어가고 싶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나이는 많고 경력은 짧고, 게다가 경력 단절의 시간까지 있어서 인지 취업이 잘 안 됐다. 파견회사를 통해 들어간 곳에서 생애 처음 해고라는 것을 당해봤다. 그러다 2005년 6월, 워커스테이션이라는 파견회사를 통해 취업을 했다. 가리봉역에서 봉고차에 태워져서 들어간 곳이 우연하게도 기륭전자였다.


 

"처음에 갔던 곳은 핸드폰 케이스를 만드는 작은 회사였는데 새벽까지 야근, 특근을 했는데 해고됐어. 내가 이걸 '대청소 해고'라고 말했지. 하루는 파견직만 불러 놓고 청소를 시키는 거야. 핸드폰 케이스 중에서 단종된 품목들 정리하고 청소를 시키더니, 청소가 끝나고 정규직만 빼고 구두로 해고를 시켰어. 해고에 항의하다가 사과만 받고 그만뒀지. 혼자 싸울 자신이 없었거든. 다시 파견업체 통해서 취업하려는데, 담당자가 가리봉역으로 나오라고 해서 갔더니 봉고차를 타라는 거예요. 인신매매는 아닐까 걱정했는데 차 안에 아줌마, 아가씨들이 많은 거예요. 그 차에서 내려준 곳이 기륭전자였어. 당시 김소연이 기륭전자에 있는 걸 알아서 얼굴 안 마주치려고 애썼지."

 

면접은 간단했다. 33세라는 나이가 있으니 길게 일할 수 있는지, 혹시 결혼은 하지 않을지 물었다. 돈이 필요해서 길게 다닐 거고 야간특근 다 할 수 있다고 했다. 입사일만 적힌, 기간이 없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기륭전자의 파견노동자들은 최저임금보다 10원 많은 64만 8540원을 받았다.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해도 겨우 100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기륭전자에는 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등 여러 고용형태가 있었다. 무분별한 해고와 차별적인 문화가 넘쳐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했다.


 

"첫날부터 라인에 있는 사람들이 나 들으라는 듯 크게 말을 해. '지각하지 마라', '옆에서 잡담하지 마라', '조장들한테 잘 보여야 한다' 이런 말을 일상적으로 하는 거야. 아파서 안 나와도 해고되기도 하고. 조·반장들은 정규직도 갈구더라고. '영원한 정규직은 없다. 파견이 줄 서있다', '눈 밖에 나지 말고 줄 잘 서라' 그러면서 1등, 2등, 3등 줄 세우고. 이건 아니다 싶고. 하루를 다녀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노조에 가입했지."


 

기륭전자 노조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만든 노조다. 여성노동자가 많은 사업장이었으나 남녀 차별은 존재했다. 남성은 다 정규직이었다. 반면 여성은 생산직 중 조장 정도만이 정규직이었다. 정규직 중에 산전산휴 휴가를 쓰고 온 사람이 생긴 후에 기륭전자는 젊은 여성노동자는 6개월만 계약했고, 나이든 기혼 여성노동자는 1년 계약을 했다. 젊은 여성노동자는 결혼하거나 임신할 수 있다는 가정을 깔고 계약기간을 다르게 정한 것이다.


 

같은 포장업무를 해도 남성이 더 임금이 많았다. 심지어 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육아휴직 갔다 왔다고 괴롭히기도 했다. 노조는 노동부에 남녀 임금차별 진정을 해서 시정명령을 받았고, 실제로 법을 통해 차별된 임금을 받아 내기도 했다.


1895일, 간접고용 불법파견 투쟁


 

두 번째라 노조활동은 자연스러웠다. 2005년 노조는 인력파견업체들을 불법파견·파견직 임금차별(임금미지급)로 노동부에 진정했다. 파견법에는 제조업의 파견노동자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기륭전자 직원 500명 중 연구원 200명은 정규직인데 반해 생산직 300명 중 정규직은 단 10명에 불과했다. 계약직이 40명이었고, 250명은 파견노동자였다. 감사 나온 노동부에서도 이런 구조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였다. 2005년 8월 초 파견법 위반이라는 결정이 나왔다. 노조는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내걸고 8월 24일부터 공장점거 파업에 돌입한다. 그렇게 시작된 불법파견 비정규직 투쟁은 1895일이나 이어진다.


 

"이렇게 길게 싸울 줄은 몰랐지. 기륭전자에서 일한 기간보다 싸운 기간이 길어도 너무 길잖아요. 하하. 나만이 아니라 우리 조합원들 대부분이 파견이거나 계약직이었으니까. 그래도 후회는 안 해. 할 수 있는 싸움을 원 없이 했으니까."
 


실제 근무한 기간이 짧았는데도 왜 계속 싸웠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파견이 넘쳐나니 어딜 가도 하루살이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어서"라고 답한다. 그리고 너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것이 억울했다고.
 


"투쟁하면서 노동부에 갔는데 같이 싸우다 중단하고 나간 언니를 만났어요. 일자리 알아보려고 온 거지. 그런데 그 언니가 이렇게 말해. 계속 싸워서 공장에 들어가라고. 어차피 나와도 공단에서는 3개월, 6개월 파리목숨 처럼 짧게 일한다고."


 

불법파견은 기륭전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파견이 확산되면서 3개월짜리, 6개월짜리 불법파견이 넘쳐났다. 파견노동자들은 길어야 1년을 일하고 나면 다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는 신세다. 노조가 파견문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끝까지 싸워야 할 이유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기륭전자는 하청업체와의 계약 해지를 이유로 이들을 전원 해고했다. 그러나 법원은 기륭전자 노동자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검찰은 사측에 불법파견 혐의를 적용했으나 500만 원 벌금이 끝이었다.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업무방해와 손해배상이 줄을 이었다. 그렇다고 싸움을 멈출 수는 없었다.


 

남성들은 뒤로 가라고 했지


 

오랜 시간 싸우면서 무서웠던 적은 없냐고 물으니 '공장에서 용역들하고 싸울 때'라고 했다. 오석순 조합원의 목을 조르는 남성 구사대(사측이 만든 노동운동 파괴조직)를 볼 때 정말 끔찍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구사대와 맞서는 것을 연대 온 사람들에게 미루지는 않았다.


 

"2006년 싸움 때도 남자 용역이 많았어. 남자 용역들이 막은 공장 문을 해머로 부수고 현장에 열 발자국 들어간 것도 여성조합원들이 나서서 했다. 9박 10일 투쟁 할 때, 바닥에 눕는 투쟁도 우리가 앞장섰지. 거친 투쟁은 남자가 한다거나,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치마를 입어본 적도 없어. 현장에서의 성차별이 있었지만 싸울 때 우리가 여성노동자라는 걸 강조하지는 않았던 거 같아. 우리 문제는 우리가 풀어야 한다는 게 컸거든. 연대자는 연대자인 거니까. 당사자가 풀어야지. 그래서 우리는 남성동지들이 연대와도 '남자들은 앞으로 오세요'가 아니라 '뒤로 가세요' 그랬지."


 

그렇다보니 노동운동계에서 '기륭형님'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유 분회장은 여성노동자들이 대부분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비정규직문제를 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사회적 연대투쟁 촉발


 

공장점거 파업 이후에 삭발투쟁, 단식투쟁, 고공농성, 그리고 오체투지까지 했다. 2008년 투쟁 전 하이서울페스티벌이 열렸을 때는 조명탑 위에서 고공농성도 했다. 함께 올라간 최은미 조합원이 고소공포증으로 벌벌 떨면서 올라가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두려움을 잊으려 함께 불렀던 비정규직 철폐가! 과거로 돌아간 듯 눈빛이 반짝인다.


유 분회장에게 67일간의 단식투쟁이 힘들지 않았냐고 물으니 괜찮았다며, 힘든 건 2010년이었다고 했다. 2010년은 교섭이 지지부진해서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때는 정말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선까지 갔던 거 같아. 사회적 연대로 버틸 수 있었어. 윤종희, 오석순, 김소연이 모두 올라가 있어서 내가 발로 뛰어야 했잖아. 교섭도 힘들고 몸도 힘들고 고민이 많았어. 내가 내뱉은 말을 다 지킬 수 있을까, 거짓말이 되면 어쩌나 되돌아보게 됐지. 그런데 사실 출투(출근투쟁)가 더 힘들었어. 출근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는 거니까. 매일 회사를 볼 때마다 '정말 내가 이 회사를 다니고 싶은 걸까' 스스로 묻게 되니까 힘들었어."
 


2008년 투쟁은 고공농성과 단식투쟁으로 널리 알려졌다. 사회적 연대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당시 나도 기륭전자투쟁에 연대하기 위해 들락거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2005년 시작된 투쟁이 1000일을 넘기려 하고 있었다. 특히 김소연 분회장이 94일의 단식으로 죽음의 문턱에 서며 큰 사회적 파장이 일었다. 함께 단식을 시작한 유 분회장은 뼈만 남은 모습으로 먼저 병원에 실려 가면서도, 오래된 동지 김소연을 두고 가는 것이 더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1000일 투쟁하고 나서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을 무엇일까 생각해봤어. 아마도 사람들과의 관계가 아닐까. 혼자 하는 싸움이 아니니까. 조합원들과 수많은 시민들과 단체 활동가들, 서로가 보이지 않는 줄로 연결돼 있는 느낌이지. 자기 시간과 마음을 내주고 함께 한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이걸 끊고 가. 아마도 계속 싸웠던 건 나만의 싸움이 아니기 때문인 거 같아. 이미 사회적 연대로 우리 투쟁은 기륭만의 싸움이 아니게 된 거잖아."

 

기륭전자 투쟁에 대한 사람들의 애정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다. 단식투쟁을 하면서도 조합원들은 연대 온 사람들 밥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뿐인가. 기륭전자 투쟁 과정에서도 다른 투쟁에 연대를 쉬지 않고 했다. 울산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 싸움에, 한진중공업 김진숙 크레인농성 희망버스에, 쌍용자동차 투쟁 등 안 간 곳이 없다. 자기 사업장 투쟁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함께 싸워야 이긴다고 생각했다.

 


2010년 사회적 합의로 싸움이 일단락됐다고 여겼을 때에는 연대해준 시민, 단체, 문화예술노동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그녀들의 사회적 연대에는'정'이 묻어있다. 연대나 투쟁에 사람 냄새가 가득했다. 힘든 오체투지 과정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진 적이 없다.


 

▲2020년 1월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과 연대자들이 최동열 회장 집앞에서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집회를 한 후 기념촬영 ⓒ기륭전자분회
 

사회적 합의를 물거품으로 만들었으나  


조합원들은 국회의원회관 점거농성까지 하며 치열하게 싸워 정치권을 움직였다. 2010년 11월 정규직 직접고용 복직 합의가 이뤄졌다. 그때만 해도 없던 불법파견 관련한 의무조항이 생기는 등 성과를 거뒀다. 그런데 회사는 2013년, 본사를 옮기더니 신대방동 건물에 출근한 노동자들에게 업무도 주지 않았다. 합의이행을 거부한 것이다. 그해 12월 최동열 회장은 임직원도 자르고 야반도주했다. 돌아갈 공장이 없어진 것이다.
  


다시 거리로 나와 오체투지를 했다.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지 않고는 그 무엇도 일시적인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비정규직 제도를 없애는 투쟁을 하기로 했다. 그런 의미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상경투쟁을 할 때 쉴 수 있는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만들기로 결의한다. 많은 시민사회가 마음을 모아 꿀잠이 2017년 만들어졌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명분을 중요시 여겼고 투쟁의 원칙을 놓치지 않고 가려고 했어. 모두가 동의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잖아. 조합원들이 흔쾌히 동의해준 게 고맙지."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의 조건은 더욱 나빠지는데 투쟁은 흩어져 있었다. 촛불투쟁 이후 새로 취임한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로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유 분회장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2018년 11월, '비정규직 이제그만 1100만 공동투쟁' 만들자는 제안을 한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함께 투쟁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당사자들의 절박함도 중요할 뿐 아니라 같이 싸우면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문화도 바뀌지 않을까. 비정규직 제도가 만든 개별화된 현실을 바꿀 무언가가 되지는 않을까 기대했다. 그녀는 현재까지 집행위원장으로서 비정규직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유 분회장의 얘기를 듣고 있자니 '전설'의 낱말 뜻이 다시 훅 새겨진다. 기륭전자투쟁을 여성비정규직의 전설적 투쟁이라고 일컫는 것도 어쩌면 포기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으면서 그리고 자기 사업장의 문제로만 싸운 적이 없어서는 아닐까.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0500074819329#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21년 6월 4일 금요일

[2신] 정당한 국민 요구 전달한 대학생들 석방하라!

 


조석원 통신원 | 기사입력 2021/06/04 [22:08]

▲ 대구경북 대학생진보연합과 시민들은 대구 수성경찰서에 체포된 대학생들을 석방하라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 조석원 통신원

 

4일 오전 11시 일본의 독도 도발 규탄, 도쿄올림픽 불참 요구를 위해 국힘당 대구시당을 항의 방문한 대학생들이 경찰에 전원(5명) 연행됐다.

 

이에 대구경북 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경대진연)은 이날 저녁 6시 대구 수성경찰서 앞에서 연행 대학생들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개최했다. 10여 명의 시민과 대경대진연 회원들이 함께했다.

 

규탄 현장에 참가했던 대경대진연 회원은 석방을 요구하는 발언을 하면서 “정당한 대학생들의 요구에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이렇게 강압적으로 체포하는 게 맞는가? 즉각 석방하라”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한 시민은 자유발언을 통해 “어제(3일)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소속 국회의원 132명은 일본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공식 홈페이지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기한 데 대해 항의하는 규탄 결의안을 발의했는데 국힘당은 말로만 규탄하고 행동과 실천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생들이 들어간 것이 아니냐”라며 국힘당의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연행된 5명 중 1명은 석방됐으며, 현재 4명의 대학생이 대구 수성경찰서에서 수감 중이다. 

 

대경대진연은 연행 대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명이 몇 시간도 안 돼 수백 명을 넘어섰다며 대학생들이 석방될 때까지 시민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다.

 

▲ 퇴근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서 앞에서 기자회견 규탄발언을 하는 시민의 모습.   © 조석원 통신원

 

2021년 6월 3일 목요일

군대 내 ‘여군 성범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명하복 군대, 직속 상관의 강압적인 성범죄
임병도 | 2021-06-03 10:03:42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공군 여성 부사관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장 모 중사가 2일 저녁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국방부 보통군사법원에 압송되고 있다.ⓒ국방부 제공

지난달 22일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A 중사가 혼인신고를 한 날 관사에서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유족들은 “공군의 조직적인 회유와 은폐 시도가 딸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갔다”면서 군의 안일한 대처와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서욱 국방부장관이 2일 유가족을 찾아 “한 점 의혹이 없게 수사하겠다”고 밝혔지만 비슷한 사건은 재연될 것입니다.

2014년 현역 사단장이 성추행 혐의로 체포된 후 당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은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성군기 사고 예방 교육을 강화하고 여성 고충처리 전담 인원을 보강해서 상담 및 신고를 활성화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현역 중령이 부하 여군과 술을 마시다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을 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2015년에도 2016년에도 직속 상관이 여군 장교나 부사관을 성추행 하는 사건은 계속 발생했습니다. 급기야 2017년에는 해군 대령에게 성폭행 당한 여군 대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국방장관이 나서서 강력한 처벌과 재발 방지를 약속하지만 대한민국 군대는 자체적으로 여군을 대상으로 하는 성범죄를 막아낼 수 없는 구조입니다.

상명하복 군대, 직속 상관의 강압적인 성범죄

군대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입니다. 지휘관이나 상관이 강압적으로 술자리에 부르거나 노래방에 가자고 하면 부하 여군들은 거부하기 힘듭니다.

회식 자리에서 부대장이나 지휘관이 성희롱을 하거나 성추행을 하더라도 피해자들은 참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지적한다면 분위기를 망친다며 상관들이 피해자를 탓하거나 불이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2014년 1월부터 2017년 6월까지 성범죄 피해 여군 총 213명 중 부사관은 124명으로 50%가 넘습니다. 특히 여군 부사관 성폭력 피해자 중에서 하사는 80% 수준으로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여군 중에서 가장 계급이 낮은 하사가 지휘관의 추천과 평가로 이루어지는 장기심사를 앞두고 있다면, 상관의 성폭력을 막거나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회식이 제일 싫어요. 회식 때마다 쉰 살쯤 된 원사들이 “딸 같다”며 옆에 앉혀요. 그러고는 허벅지도 만지고, 등쪽 라인도 쓰다듬어요. 엉덩이도 툭툭 치고…. 언제, 몇 번인지 기억할 수도 없어요. 신임 하사 때부터 지금까지 술 마실 때마다 그래요. 주로 다른 사람들 정신없을 때 손이 쑥 들어와요. 술을 따르라거나 옆에 앉힐 때는 늘 ‘장기’나 ‘연장’을 가지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해요. (부사관은 의무 근무 연수가 3년이다. 2년째에 3년 더 근무할 수 있는 ‘연장’ 심사를 하고, 5년째에 계속 근무할 수 있는 ‘장기’ 심사를 한다. 최근 취업난이 심해지면서 심사의 경쟁률도 높아지고 있다.) 큰 행사가 있을 때면 꼭 지휘관 옆에 앉아서 술을 따르라고 하죠. “꼭 그래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너 이런 거 안 하면 어떻게 ‘장기’가 되겠어?”라고 말해요.> (어린 여성 부사관의 증언, 출처:한겨레 21)

<OO부대 소령은 평소 노래방에서 여군, 여군무원을 껴안거나 등을 어루만지면서 춤을 추었고, 악수할 때 검지손가락으로 상대방의 손가락을 간지럽히고 여군 중사에게 “여군 화장실도 업슨데 생리대를 어쩧게 처리하느냐?” “일주일에(부부관계)를 몇번이나 하느냐?”고 질문하고 전간부가 있는 상태에서 “우리 부대 여자들은 생리를 토요일과 월요일에만 하느냐”는 등의 성적수치심을 야기하는 발언을 함> (성적군기 문란행위 처벌 사례, 출처:육군법무감실)

<OO사단 대대장 김모중령은 부하 여군장교를 자신의 관사 등에 불러서 친한 오빠, 동생으로 지내자며 뒤에서 껴안고, 이를 거부하는 여군 장교의 입을 강제로 맞추는 등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강제적인 성적 접촉을 시도하였음> (성적군기 문란행위 처벌 사례, 출처:육군법무감실)

신고해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군사법원

2014년부터 2017년까지 군대 성폭력 사건 가해자 처벌 결과를 보면 징역형을 선고받은 것은 고작 9명에 불과합니다. 성범죄 가해자들은 집행유예나 기소유예, 벌금형 등의 가벼운 처벌만을 받고 풀려납니다.

군사법원이 선고한 전체 성폭력 사건 중 피해자가 여군인 사건의 선고유예 비율은 10.34%로 일반 법원의 1.36%에 비하면 월등히 높습니다.

군대 내 성폭력 관련 징계처분 273건 중 배제징계 (파면, 해임)는 총 20건으로 7.3% 수준입니다. 성폭력을 저질러도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는 것입니다. 

아무리 피해자가 신고해도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고 군대로 복귀하니 오히려 보복을 당합니다. 피해자들은 성범죄 신고를 해도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거나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군대 내 성범죄를 막는 길은 ‘강력한 처벌’뿐   

▲2014년 현역 육군 중령이 여군 장교와 함께 술을 마신 후 모텔로 데려가 성폭행을 하고, 이후에도 사무실과 승용차 안에서 수차례 성추행한 사건 ⓒMBN뉴스 캡처

군대 내 성범죄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강력한 처벌뿐입니다. 그동안 여군에게 성범죄를 저질렀던 가해자들이 모두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군대에서 불명예제대해 군대로 복귀하지 못했다면 지금보다는 피해가 줄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성도 징병제인 이스라엘은 군대 내 성범죄를 막기 위해서 강력한 처벌 제도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가해자의 처벌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상급 지휘관들도 불이익을 당해야 성범죄를 막을 수 있습니다. 여군 성범죄가 드러날 경우 사단장, 군단장, 참모총장 등이 보직 해임된다면 군 내부 자체적으로 알아서 성폭력을 막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해 싸워야 할 여군들이 성범죄자들 때문에 목숨을 잃는 군대는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자 개혁의 대상입니다.

매번 비슷한 사후대책은 보여주기에 불과하지 실질적인 효과는 전혀 없습니다. 지금은 말뿐인 성범죄 대책보다는 참모총장 또는 최소 해당 부대장들이 군복을 벗고 연금까지도 박탈당하는 강력한 처벌 규정이 필요합니다.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2307 

2021년 6월 2일 수요일

얀센, 예방 효과 낮다는데…기다렸다 다른 백신 맞을까요?

 등록 :2021-06-03 05:00수정 :2021-06-03 07:47

‘백·알·맞’(백신 알고 맞자) Q&A ⑤
“얀센 백신 예방·중증화·사망 방지 효과 충분해”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바이오엔텍, 얀센(존슨앤존슨), 스푸트니크 브이(V) 백신 바이알 모형. REUTERS/연합뉴스
아스트라제네카, 화이자-바이오엔텍, 얀센(존슨앤존슨), 스푸트니크 브이(V) 백신 바이알 모형. REUTERS/연합뉴스
▶전문가 자문을 거쳐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궁금증을 쉽게 풀어보는 코너 ‘백·알·맞’(백신 알고 맞자) Q&A로 질문을 보내주세요. 이메일(watchdog@hani.co.kr)로 문의를 받아 성심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
예비군과 민방위 대원 등에 대한 얀센 코로나19 백신 90만명분 사전예약이 진행되던 1일, 젊은 남성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에펨코리아’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얀센 예방률이 너무 낮던데. 66프로. 난 나중에 화이자나 모더나 들어올 시기에 맞을랜다.”이런 반응은 앞서 접종을 시작한 미국에서도 나왔습니다. 지난 3월 마이크 더건 미국 디트로이트 시장은 “최고의 백신은 모더나와 화이자다. 주민들이 최고의 백신을 맞도록 하겠다”고 얀센 백신 수령을 거부했다가 논란이 일자 하루 만에 번복하기도 했습니다.임상시험에서 각 백신의 예방효과는 얀센 66%, 화이자 95%, 모더나 94%로 보고됐습니다. ‘30%나 차이가 나니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을 맞는 게 낮지 않으냐’는 질문이 나올 법합니다. 판매 가격도 얀센은 한 회당 10달러, 화이자는 20달러, 모더나는 25~37달러로 매겨져, 앞서 접종을 시작했던 미국에서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일단, 화이자와 모더나는 영하 90~60도의 초저온 상태로 보관·배송을 해야 하는 점이 가격에 영향을 미친 부분이 커, 가격과 효능을 연관짓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입니다.


예방효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들은 이들 백신의 예방효과 수치엔 임상시험 시기와 시행 국가의 차이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말합니다. 모더나와 화이자는 주로 미국 내 유행이 잦아들었던 하절기인 지난해 8~11월에 3상 임상시험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얀센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1월까지 임상 3상을 수행했습니다. 지난 겨울은 미국만 아니라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 심각해지던 시기였던 것, 모두 기억하실 겁니다. 데버라 풀러 미국 워싱턴대 교수(미생물학)는 미국 언론 <복스>에 이 점을 지적하며 “만약 모더나나 화이자 백신의 임상시험을 얀센 백신이 했던 기간에 했다면 지금과는 매우 다른 예방효과 수치를 보게 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3차 유행 한참일 때 임상시험한 얀센

특히 주로 미국 내에서 임상시험을 진행한 모더나나 화이자와 달리 얀센은 참여자의 44%만 미국에서 참여했고, 나머지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브라질 등 7개국에서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미국 내에선 접종 4주 뒤 예방효과가 72%였지만, 베타 변이 바이러스가 유행한 남아공에선 64%였습니다. 이런 여러 나라에서 나온 수치를 합치면서 66%란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미 존스홉킨스 보건안전센터의 아메시 아달야 박사도 <복스>에 “백신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이 백신들을 같은 나라 같은 시기에 같은 임상시험에서 연구했을 때나 가능한 것”이라며 “임상시험이 동일한 방식으로 수행된 것이 아니면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지 말라는 것이 임상통계의 기본 원칙”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얀센 백신을 유행 상황이 심각하지 않은 국내에서 접종했을 때는 예방효과가 더 좋게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질병관리청이 지난 2~4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주 접종 대상이었던 60살 이상에서 예방효과를 계산했을 때 아스트라제네카는 86%, 화이자 백신은 89.7%로 비슷한 수준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임상시험에서 보고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예방효과 62~70%보다 수치가 더 높게 나온 것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진 백신을 평가할 때는 감염을 얼마나 막았느냐는 예방효과보다 중증화와 사망을 얼마나 방지할 수 있느냐는 대목이 더 중요합니다. 코로나19에 걸려도 중환자실에 입원하거나 사망으로 이르지 않는다면, 코로나19는 독감처럼 그다지 무섭지 않은 질병이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19 백신 접종 사업의 목표가 바로 이것입니다. 얀센 백신은 임상시험에서 중증예방엔 85%, 사망 예방에는 100%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캐나다 보건부의 지난달 21일 발표를 보면,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효과도 베타 변이에 대해 64%로, 화이자(75%)와 노바백스(55%) 백신 등과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1회 접종이어서 우려된다는 생각에는?

얀센 백신은 1회 접종이라 예방효과가 유지되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에 전문가들은 내년께 전 국민이 예방효과와 유지 기간을 강화해주는 추가접종, 일명 ‘부스터 샷’을 맞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이 문제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 국내만이 아니라 미국, 영국 등 많은 나라에서 다른 백신으로 추가접종을 받는 교차 접종에 대해 임상시험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각 국가의 백신 도입과 접종 상황상 추가접종까지 같은 백신을 맞기 어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재훈 가천대 의대 교수(예방의학)는 “얀센은 1회 접종 백신이라 효과와 지속 기간이 떨어질 수 있지만, 내년께 대부분 백신 접종자들이 추가접종을 받게 될 것으로 보여 이런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 하반기 예방접종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미접종자 접종이 시작될 오는 10~11월까지 기다린다고 해도 자기가 원하는 백신을 맞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닙니다. 그때까지 코로나19에 걸릴 수 있다는 위험성이 남아 있고, 백신 접종 완료자에게 주어지는 자가격리 면제 혜택 등을 누릴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나중에 화이자나 모더나 들어올 시기에 맞겠다”는 선택이 합리적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송만기 국제백신연구소 사무차장은 “팬데믹 상황에선 ‘어떤 백신이 좋으니까 그걸 맞겠다’는 전략은 전체 백신 접종 속도를 늦춰서 사망자를 증가시킨다. 일각에서 이런 백신의 사회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백신의 우열을 따지는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백신이 가장 좋은 백신일까요? 얀센 백신처럼 세계보건기구(WHO)와 유럽의약품청(EMA), 미 식품의약국(FDA) 등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기관에서 효과성과 안전성을 인정받아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사용을 허가한 백신이라면, ‘빨리 맞을 수 있는 백신이 가장 좋은 백신’이라는 것이 신뢰할만한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생각입니다. 참고로 저도 민방위 대원 자격으로 얀센 백신을 사전예약해 가장 빠른 날짜인 오는 10일 접종할 예정입니다.


김지훈 기자 watchd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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