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페이지뷰

2021년 6월 2일 수요일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일본 전범기 불타다

 

서대문 독립공원에서 일본 전범기 불타다

김영란 기자 | 기사입력 2021/06/02 [15:14]

▲ 대진연 회원들이 일본 전범기를 불태우고 있다.     ©김영란 기자

 

▲ 전범기에 불을 붙이는 대진연 회원  © 김영란 기자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앞에서 일본 전범기가 순식간에 불탔다. 

 

일본이 도쿄올림픽 홈페이지에서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표기하는 것에 항의하는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하 대진연) 회원들이 2일 오후 3시 서대문 독립공원 독립문 앞에서 일본 전범기 화형식을 했다. 

 

대진연 회원은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 지배에서 독립한 지 76년이 지났지만 현재 2021년 일본 정부는 도쿄올림픽에서 전범기를 사용하고 독도를 일본 땅으로 표기하는 등 또다시 우리 민족을 침략하려 하고 있다”라며 “이번 전범기 화형식을 시작으로 하여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 기필코 막아내겠다”라고 말했다.

 

대진연 회원들은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일본 정부 규탄한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전범기에 불을 붙였다. 

 

어제(1일) 일본대사관 앞에 이어 오늘은 독립문 앞에서 전범기 화형식을 한 것이다.

 

한편, 어제 전범기 화형식을 한 대학생들은 현재 종로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다. 종로경찰서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대진연 회원들을 연행했다. 

 

대진연은 연행된 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탄원서 수가 현재 450여 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아침신문 솎아보기] 이준석 분석한 한겨레 “보수 본색 여실히 드러나”

 4대 그룹 대표 간담회 대통령 사면 발언 인용 보도 즐비, 코로나19 학력 격차 공식 확인… 한겨레 이준석 비판 조명

지난 2일 문재인 대통령이 4대 그룹 대표를 만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에 대해 긍정적인 취지로 발언하자 중앙일보는 이를 1면 머릿기사로 썼다. 다른 전국 종합일간지도 대부분1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대통령 발언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사면을 예측하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3일 중앙일보 “이재용 8·15 특별사면 유력”하다를 1면 기사 제목으로 붙였다. 2일 낮 문 대통령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4대 그룹 대표와 가진 초청 오찬 간담회 내용을 전한 기사다. 구광모 LG 회장,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이 참석했다.

▲9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1면 갈무리
▲9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1면 갈무리

 

청와대 대변인은 최태원 회장이 이 자리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사면을 건의하자 문 대통령은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 기업에 대담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고 밝혔다. 시기상조 등의 이유로 사면 가능성에 선을 그어온 입장이 미묘하게 바뀐 것.

문 대통령의 발언은 사면에 여지를 열어 두는 쪽으로 서서히 변해왔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에는 “사면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지난달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선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서 판단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반도체 경쟁이 세계적으로 격화돼 우리도 반도체 산업에 대한 경쟁력을 더욱 높여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도 밝혔다. 2일엔 이보다 더 나아가 ‘국민이 공감한다’고 언급했다.

▲3일 중앙 1면
▲3일 중앙 1면
▲3일 동아 1면
▲3일 동아 1면

 

3일 9개 전국단위 종합일간지 중 이를 비판적으로 조명한 기사는 적었다. 조선일보는 “정치권과 재계에서는 이 부회장의 8·15 광복절 특별 사면 또는 가석방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며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 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거나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르는 불확실성 시대에 앞으로 2~3년이 중요하다. 건의(사면)를 고려해달라”는 등의 4대 그룹 대표 발언을 강조했다.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은 문 대통령 입장 변화에 주목했다. 경향신문은 “최근 문 대통령이 코로나19 경제 회복 국면에서 기업의 역할을 부쩍 강조하고 있고, 지난달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삼성을 포함한 4대 그룹이 대대적인 대미 투자 보따리로 문 대통령의 방미길에 힘을 실어준 가운데 나온 발언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면서도 “횡령·뇌물 등으로 유죄가 확정된 대기업 총수를 경제 논리를 앞세워 사면해주는 것은 기업 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사법질서를 훼손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된다”고 지적했다.

▲3일 조선 5면
▲3일 조선 5면
▲3일 한국 3면
▲3일 한국 3면

 

한국일보도 “'국민 공감대'와 '기업 역할론'을 말한 건 '사면을 위한 외형적 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으로, 문 대통령이 8ㆍ15 광복절 특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강력한 신호로 해석됐다”며 “이 부회장 사면은 문 대통령 스스로 세운 원칙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뇌물, 알선수재 및 알선수뢰, 배임·횡령 등 5대 범죄와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형을 받은 사범들은 사면 대상에서 원칙적으로 배제한다고 공약했다.

코로나발 기초 학력 붕괴… 교육 격차 더 벌어져

코로나19로 등교, 수업 등에 차질을 빚은 중·고등학생들의 ‘기초 학력 붕괴 현상’이 확인됐다. 지난해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 기초 학력 미달에 해당하는 학생 비율이 지난해보다 크게 늘었다.

2일 교육부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2020년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결과를 발표하며 ‘기초학력 미달’에 해당하는 1수준 중학생 비율이 국어 6.4%, 수학 13.4%, 영어 7.1%로, 영어는 지난해(3.3%)보다 두 배 이상, 국어는 지난해 4.1% 대비 2.3% 포인트 늘었다고 밝혔다.

▲3일 서울 9면
▲3일 서울 9면
▲3일 경향 1면
▲3일 경향 1면

 

1수준 고등학생 비율은 국어 6.8%, 수학 13.5%, 영어 8.6%였다. 서울신문은 “고등학교 수학 기초학력 미달 비율은 13.5%로 전년 대비 4.5%나 증가했다”며 “이번 평가 결과는 기초학력 미달 비율의 증가 폭이 빠르고 가파르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고 전했다.

‘보통학력’에 해당하는 3수준 이상의 비율은 하락했다. 중학교에서는 3수준 이상 비율이 국어 75.4%, 수학 57.7%, 영어 63.9%였으며 고등학교에서는 국어 69.8%, 수학 60.8%, 영어 76.7%로 나타났다.

여학생보다 남학생의 기초학력 붕괴 현상이 더 심했다. 남학생의 수학 기초학력 미달 비율을 보면 중학교 16.0%, 고등학교 16.3% 등에 달했다. 서울신문은 “중·고등학교 모든 과목에 걸쳐 남학생의 기초학력 미달 비율이 여학생보다 많게는 4배까지 웃돌았다”고 분석했다. ‘학업 성취도는 떨어져도 학생들의 행복도는 높아졌다’는 최근 수년간의 흐름도 바뀌었다. 학교생활 행복도가 ‘높다’고 답한 비율은 중학교 59.5%, 고등학교 61.2%로 지난해보다 각각 4.9% 포인트, 3.5% 포인트 줄었다.

2학기부터 전면등교를 실시할 예정인 교육부는 오는 14일부터 등교수업을 확대한다.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에서의 학교 밀집도 기준을 3분의 1에서 3분의 2로 상향 조정하고, 직업계고 학생들은 거리두기 2단계까지 전면등교한다.

▲3일 한겨레 3면
▲3일 한겨레 3면

 

한겨레 이준석 평가 “노골적인 엘리트주의”

오는 11일 국민의힘이 당 대표 선거를 앞둔 가운데 한겨레는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1위를 기록하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최고위원의 정치성을 분석했다. 그의 저서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2018)와 <공정한 경쟁>(2019), 최근 언론 인터뷰 및 토론회 발언 등이 분석 근거다.

한겨레는 “젠더 이슈에 의문을 나타내며 반페미니즘 정서를 노골적으로 부각하는 것은 다른 대중 정치인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전 최고위원이 여성을 포함한 정치적 소수자의 우대 정책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목에서 “이런 기조는 ‘트럼프식 갈등 이용 행태’라는 비난이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지층과 비지지층을 갈라치기 하고 이를 이용하던 모습과 비슷하다”고 비판했다.

한겨레는 또 “‘공정’과 ‘경쟁’을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는 배경엔 그의 노골적인 실력주의 가치관이 내재돼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 전 최고위원이 아버지와 친분관계가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의 인턴으로 정치 경험을 쌓은 점에서 “그의 신념과 배치되는 ‘내로남불’ 행적이라는 비판도 나온다”고도 지적했다.

이 전 최고위원은 저서, 인터뷰 등에서 “체제 우위를 통한 흡수통일 외에 방법이 없다. 통일 교육도 필요 없다”고 통일관을 밝혔다. 일자리 문제에선 “기업이 해고를 쉽게 해야 경영 효율성이 높아져 결국 사회에 득이 될 것”이라거나 “청년 일자리를 따로 만들기보다는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과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일자리를 구분해 취업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한겨레는 이에 “스스로 ‘진보와 보수의 중간 어디쯤 머문다고 생각한다’고 했던 그의 ‘보수 본색’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분석했다.

▲3일 국민 1면
▲3일 국민 1면
▲3일 세계 4면
▲3일 세계 4면

 

한편 국민일보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국민의힘에 입당해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뜻을 지인들에게 밝혔다고 전했다. 윤 전 총장의 익명의 측근은 2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윤 총장이) 백넘버 2번을 달고 대선에 나가겠다고 밝혔다”며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국민의힘에 합류한다는 계획”이라고 말했다.

세계일보는 “당 일각에선 윤 전 총장이 이르면 이달 중 평당원 자격으로 입당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며 “대규모 캠프 대신 소규모 참모 조직을 꾸리는 방향을 검토 중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대선준비팀을 수행·공보·정무·정책 등 핵심 기본만 구성하고, 윤 전 총장 처가 관련 의혹을 방어했던 법률 대리인들이 합류할 가능성도 거론된다”고 전했다.

500kg 파지더미 깔리기 전날 딸이 한 말 “사고 많이 나던데 아빠도 조심해”

 산재사망사고 화물노동자의 21살 둘째 딸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요”

이승훈 기자 
발행2021-06-02 19:16:30 수정2021-06-02 19:16:30

“아빠와 전날 밤 저녁 먹고 같이 얘기를 나눴어요. 최근에 이런 (산재사망)사고 많았잖아요. 그러니까 아빠도 조심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 쌍용 씨앤비 공장 산재사망사고 화물노동자 故 장창우 씨의 둘째 딸 장 모(21) 씨

지난 5월 26일 쌍용 씨앤비(C&B) 공장에서 컨테이너 문을 열다가 쏟아지는 압축 파지더미에 깔려 숨진 화물노동자 故장창우 씨 둘째 딸의 말이다.

21살 둘째 딸 장 씨는 2일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말했다. ‘평소 우리 가족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 있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사고 전날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 씨는 아버지가 딸의 걱정 어린 말에 “조심하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버지 창우 씨는 다음날 일터에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창우 씨는 자기 업무도 아닌 위험 작업을 수행하다가 사고를 당했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2일 서울 동작구 쌍용 씨앤비 본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에는 사망노동자의 두 딸과 처음 사고를 목격했던 동료 노동자가 참여했다.ⓒ민중의소리

파지 부스러기 날린다고 위험작업 지시
산재사망사고 28분 만에 사고현장 청소
사망노동자 둘째 딸의 절망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화물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는 2일 서울 동작구 쌍용 씨앤비 본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회견에는 사망노동자의 두 딸과 처음 사고를 목격했던 동료 노동자가 참여했다.

기자회견에서 둘째 딸은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도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사고현장을 훼손하고 작업을 이어갈 수 있나”라며 “그런 행동은 사람 목숨을 공장에 날리는 먼지만도 못한 취급 하며 생명을 멸시하는 행동”이라고 분노했다. 그러면서 “크고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다. 당연히 지켜달라는 것만 지켜달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라고 한탄했다.

지난달 26일 오전 9시15분쯤 화물노동자 창우 씨는 쌍용 씨앤비 작업장에서 컨테이너 문을 열다가, 경사로 때문에 입구 쪽으로 쏠린 300~500kg의 압축 파지더미가 쏟아지면서 산재사고를 당했다. 창우 씨는 동료에 의해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긴급하게 수술을 받았으나, 다음날 12시15분경 상태 악화로 숨졌다.

쌍용 씨앤비 측은 산재사고 위험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과 동료들에 따르면, 1년여 전까지만 해도 “경사로로 내려가기 전에 컨테이너 문을 연 후 컨테이너 내부 짐을 내려놓는 곳까지 후진하여 상·하차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작업장에 파지 부스러기가 날린다고 미리 열지 말고 경사면을 모두 내려온 뒤 컨테이너 문을 열라고 작업 지시를 했다고 동료와 유족은 전했다.

산재사망사고 직후 작업이 재개되는 모습ⓒ화물연대본부 제공 CCTV 화면 갈무리

또 회사는 119가 출발하기 무섭게 사고현장을 훼손하고 작업을 재개했다. CCTV를 보면, 사고 당일 오전 9시40분경 119구급대가 창우 씨를 구급차량에 태운 뒤 이송을 위해 문을 닫았다. 그리고 2~3분 뒤인 9시43분경 지게차로 파지더미를 다시 나르기 시작했다. CCTV에는 사고 현장이 사고 발생 28분 만에 훼손되는 장면도 담겼다. 이날 오전 10시15분경 회사는 지게차로 창우 씨를 덮친 파지더미를 치웠다. 이어 오전 11시쯤 창우 씨가 몰았던 화물차를 다른 곳으로 옮겼다. 누구든지 중대재해 발생 현장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둘째 딸이 “사람의 목숨을 공장에 날리는 먼지만도 못하게 취급했다”고 분노한 이유다.

딸 장 씨는 사고 직후 28분 만에 사고현장이 훼손된 사실을 듣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 생각했다고 한다.

박해철 공공운수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무엇보다 사고 이후 회사가 보여준 작태에 분노한다”라며 “화물노동자가 공장 정규직이 아닌 특수고용직이라고 할지라도, 사람이고 인간이다. 인간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서 회사는 오로지 비용만 (따지고) 있었다. 사람은 없었다. 화물노동자는 없었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화물연대본부는 2일 서울 동작구 쌍용 씨앤비 본사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민중의소리

위험작업 강제하는 업계의 관행
“자본의 탐욕이 부른 타살” 분통

이봉주 화물연대본부 위원장은 “인명 경시인지, 안전 불감증인지, 화물노동자들을 한낱 그림자 취급하는 것인지…”라며 똑같은 형태로 잇따르는 화물노동자들의 산재사망사고에 한탄했다.

앞서 지난해 9월 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짐을 싣던 화물노동자가 스크루(Screw)에 깔려 숨졌고, 같은 해 11월 남동발전 영흥화력발전소에서도 혼자 석탄재를 차에 싣던 화물노동자가 추락해 5분가량 방치돼 있다가 숨졌다. 올해 3월 한국보랄석고보드에서도 석고보드를 하차하던 화물노동자가 적재물에 갈려 숨졌다.

이 사고 모두 화물노동자의 업무가 아닌 상·하차 작업을 업계가 관행처럼 강요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였다.

이 위원장은 “화물노동자 업무는 운송”이라며 “관련법에 따른 안전운영 고시를 보면, 업무 범위가 명확히 명시돼 있다. 안전사고가 날 수 있는 경우면 해당 업무를 화물노동자에게 시켜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런데도 회사는 이익을 위해 사고 위험이 큰 경사진 도크 안에서 위험한 노동을 강제했다”라며 “누가 보더라도 자본의 탐욕이 부른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관련해서, 국토교통부도 화물자동차 안전운임 고시 유권해석을 통해 “컨테이너 문을 개방하여 내부를 검사하거나 청소하는 작업이 안전사고 발생 위험이 있으면 화물노동자에게 해당 작업을 수행하게 하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한편, 이날 오후 5시40분경 유가족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화물연대본부와 사 측은 합의안을 체결했다.

바람같은 전설의 언니들을 만났다..."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 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

0. 연재 순서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① 동일방직 해고자 김용자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② 구로동맹파업투쟁의 김준희 님을 만나

<바람 같은 전설의 언니들>③ 기륭전자분회의 유흥희 님을 만나 

*행사 참여 링크 http://bit.ly/21바람후원행사신청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장. 2019년 톨게이트여성노동자들에게 후원금과 후원물품을 전달했다.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김용자 동일방직 복직투쟁위원장을 처음 만난 건 톨게이트 수납노동자들의 싸움 때였다. 1978년에 있었던 철저한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40년이 지난 2019년에도 반복되고 있기에, 이들을 응원하고 경험을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한국도로공사는 법원도 인정한 직접고용의무를 저버린 채 자회사를 거부한 톨게이트수납노동자들을 집단해고 했는데 대부분이 여성들이었다. 톨게이트여성노동자들도 상의탈의 투쟁, 고공농성, 노숙농성, 단식농성 등 하지 않은 게 없었다. 왜 40년이나 흘렸는데 달라진 게 없을까?
 


어용노조를 만들려는 남성노동자들에 맞서


 

70년대 대표적인 여성사업장인 동일방직 투쟁은 어땠는지, 지금도 달라진 게 없는 성차별적인 여성노동자의 현실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 김용자 위원장을 만났다. 김위원장은 단호하고도 차분한 어조로, 43년째 복직투쟁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돌아갈 현장이 있기 때문에 투쟁도 길게 했어. 동일방직 사건 같은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들이잖아요. 똥물사건, 나체시위까지. 똥물을 끼얹고 그 사람들을 해고시키고. 피해자들을 내몬 거잖아. 우리도 억울하니까 포기할 수 없었지. 사실 한국노총, 국가권력, 회사 이 3자가 합심해서 우리를 탄압한 거잖아."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동일방직의 민주노조를 없애기 위해 한국노총만이 아니라 중앙정보부도 개입했다. 사찰의 흔적이 국정원과거사진상규명에서 드러났다. 78년 2월의 똥물투척사건도 당시 어용이던 한국노총과 회사의 합작으로 이뤄졌다. 주요 행위자는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 이전의 투쟁인 1976년의 상의탈의 시위도 남성노동자들이 사측관리자와 함께 여성집행부를 불신임하려고 하자 이에 대항하면서 벌어진 투쟁이다.


 

왜 남성노동자들은 사측의 입장에 서서 폭력을 행사했던 것일까.


 

회사는 당시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소수의 남성노동자들에게 특권을 주었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성차별적인 편견이 넘쳐났던 시대라 여성노동자에 대한 성희롱과 무시도 극에 달했다. 이른바 성별화된 노동통제다. 여성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남녀 성별 권력관계의 차이를 이용해 여성들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극대화한 것이다. 70년대 말 여성노동자들은 남성노동자들의 임금 절반인 5~6만원을 받았다.


"동일방직 직원 1300명 중에 남자들이 180명밖에 안됐어. 그런데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주도권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한 거지. 임금도 굉장히 차이가 컸어. 그러니까 노동조합 여성지부장을 탄생시킨 거지, 도저히 안 되겠거든. 3교대인데 화장실 갈 시간이 밥 먹을 시간이 없었어." 


국무총리가 나오는 행사를 망치다


 

똥물투척 사건 이후 124명이 해고되었다. 해고된 후 갈 곳이 없었던 대다수 조합원은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에서 생활한다. 산선 앞은 항상 사복형사들이 즐비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미행했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의 해고는 국가권력과의 공모로 이루어진 것이니 예상가능한 일이다. 


그러다보니 해고싸움은 국가기관에 대항한 싸움과 국가와 공모한 어용인 한국노총에 대항한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장충체육관에서 벌인 시위로 생방송을 중단시키기까지 했다. 1978년 3월 근로자의 날 행사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다. 국무총리까지 참석하는 규모있는 행사였다. 동일방직 여성노동자들은 행사장에 가서 "우린 똥물을 먹고 살수 없다"며 현수막을 펴고 구호를 외쳤다. 대부분 연행됐다. 나머지는 명동성당에 가서 단식농성을 했다. 나중에 종교 측의 중재로 일부는 현장에 복직했으나 나머지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래 명동성당에서 합의할 때는 조건 없이 복직을 시켜준다고 했어. 그런데 그렇지 않은 거지. 노조도 인정하고 우리가 해고됐던 기간의 임금도 보장하라. 그 조건으로는 못 간다 했지. 124명 중 76명이 남은 거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달도 안 돼 나왔어. 못 견디고 다 나왔어. 현장에서 일하는데 형광등 깨고 협박하고 그랬나 봐요. 어떻게 혼자 들어가서 제대로 일하겠어. 노동조합이 살아서 (현장에) 들어가도 힘든데, 어리석은 결정인 거죠. 혼자라도 들어가는 게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에요. 동지들을 배신할 수 없어. 그건 내 인생의 패배야. "


새롭게 집행부를 꾸리고 싸움을 이어갔다. 한국노총도 점거하고 동일방직을 다룬 연극을 하면서 투쟁을 이어가기도 했다. 1978년 9월 동일방직 똥물투척사건을 다룬 연극을 하던 여성노동자들은 연극을 하던 중 현수막을 들고 종로거리로 나와 시위를 했다. "노동3권 보장하라","유신헌법 철회하라" 경찰은 바로 진압에 나섰다.


"연극하고 다 잡혀갔어. 그때 정말 무서웠지. 그때 한 30명 이상은 구류됐어. 안기부, 치안부에 갔지. 매일 밤 11시만 되면 끌려가서 맞고 오고 그랬어. 가차 없었지." 


김위원장은 똥물 사건만이 아니라 해고 이후의 싸움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고 이후에 동일방직 노동자들하고 감옥에 간 사람이 60명이야. 구속사유는 폭력. 인천지역 사람들과 연대해서 인천 노동청을 점거 농성했지. 6명 다 구속됐지. 잡혀가면 정말 죽을 만큼 맞았어. 대우 이런 건 없었어. 구류 아니면 구속이지. 그때는 노동자들한테 특히 가혹했지." 


투쟁을 통해 얻은 존재감


 

가혹한 탄압을 받았으나 여성노동자의 정신, 사회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고 살았다. 나중에 들어간 현장에서도 열심히 하다 보니 일곱 번이나 해고당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히려 동일방직투쟁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얻었다며,'동일방직대학교'라고 작명까지 했다.


 

"당시로 되돌아가도 그런 선택을 하냐고 누가 물어. 나는 당연히 그 선택을 할 거 같다고 해. 그렇게 싸움으로써 내 존재감을 알았고 나도 쓸모 있는 인간이란 걸 배웠거든. 해고 안 당했으면 이 자리에 없다고 생각해. 우리는 이름도 없었어. 그때만 해도. 공순이 공돌이였거든. 근데 우리가 그걸 깬 거야. 나는 공순이가 아니다, 내 이름을 불러라. 내 이름이 있는데. 공장에서 나만 일하는 게 아닌데, 똑같은 인간이고, 귀천이 어디 있냐. 뭘 하든 똑같은 인격체로 바라봐야지. 우리가 그걸 주장한 거고. 그런 점에서 우리가 이겼다고 나는 생각해. 그래서 그 삶이 고단했지만 그래도 다시 선택할 거 같아."
 


그러면서 그것조차도 동지들과 함께 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블랙리스트로 취업도 안 되고. 내일 먹을 쌀도 없었어, 너무 무서웠지, 칼 들고 죽는다고 옥상에 올라간 사람도 있었지. 그래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동지들이 함께 하기 때문이야."


 

그래서인지 43년째 하는 모임인데도, 만나면 서로 밤새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사회문제를 이야기 하느라, 고단했던 투쟁을 이야기하느라 시간이 모자란다고 했다.


 

최근 있었던 LG트윈타워 청소노동자투쟁 이야기가 나왔다. 회사가 2천만 원으로 회유해서 몇 명이 투쟁을 접었고 나며지는 나중에 이겨서 현장으로 복귀한다고 했다.
 


"자신이 선택할 걸 잘못했다고 후회하면 내가 불행할 거 같아. 어렵게 가진 그 가치관을, 동지들과 이어온 그걸 포기하는 게 진짜 포기지. 그냥 잠시 생계를 위해 쉬는 거랑 다르지."


 

ⓒ동일방직복직투쟁위원회

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어떻게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싸울 수 있었냐고 묻자 길을 알아서 싸운 것은 아니라고 했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알바를 하더라도 마음은 포기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어찌됐든 그런 투쟁의 과정이 있으니까 단단해진 거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그런 거기도 했고. 앞에 길이 보여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너무너무 깜깜한데다 벼랑 끝이라 설 때가 없는 거야, 죽기 살기로 헤쳐 나가지 않으면 길이 없잖아. 그래서 여기까지 온 거지. 노동자들도 권리를 얘기할 수 있고 싸우면 이길 수 있고 얻을 수 있다는 걸 배웠지. 지금도 후배들한테 말해. 우리의 삶 속에 그 정신은 죽을 때까지 가져가야되는 거라고."


김위원장은 회사가 폐업했지만 복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작년에 인천 만석동에 있는 사업장은 문을 닫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복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했다.


 

"동일방직에는 계열사도 13개나 있으니까. 방직은 아니더라도 상징적으로라도 나는 복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 작년 하반기에 민변하고 만났어. 마지막으로 우리가 회사 상대로 복직 소송을 할 수 있느냐. 팀이 꾸려졌어. 원직복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법리 해석을 했지. 시효도 있고 나이도 있고 공장도 없고 이런 부분에서 볼 때 어려울 거 같다고 그러더라고. 그런데 우리가 그냥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건 난 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말했어. 어렵겠지만 시도는 해봐야지." 


왜 복직을 하고 싶냐고 재차 물었더니 "억울하니까"라고 답한다.


 

"내가 당했던 것들이 너무 잘못됐기 때문에 그거를 바로잡기 위해서지. 원직복직은 반드시 해야 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됐지만 종이때기 하나로 명예회복이 되는 건 아니야, 완전한 명예회복은 현장 복직이야. 하루라도 복직돼야지." 


43년 만에 복직이라! 한 생애에 걸친 싸움을 하는 모습이 눈이 부시다. 자신이 세운 가치관을 지키며 동지들과 함께 가겠다는 의지가 맑고 그러나 무겁지만은 않다. 김위원장은 행복하게 살기 위해 싸운다고 했다. 얼마 전 갔던 개울물과 바위가 떠올랐다. 바위틈에 고인 물은 따뜻하지만 이끼가 피었고, 흐르는 저편 물은 깨끗하고 시원했다. 흐르는 물의 생명력이 느껴졌다. 투쟁하는 여성노동자들이 역사에서 절대 지워지면 안 되겠구나! 묘한 사명감을 느끼며 인터뷰를 마쳤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60213583399546#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2021년 6월 1일 화요일

[이정랑의 고전소통] 人物論 망국의 군주, 충정의 장수

 

[숭정황제와 원숭환] 어리석은 숭정, 충신 원숭환을 죽이다 (下)
이정랑 | 2021-06-02 11:08:05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숭정황제와 원숭환】 어리석은 숭정, 충신 원숭환을 죽이다 (下)

군주가 소인배(小人輩)면 간신이 발호하고 충신은 결국 죽게 된다.

누르하치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황태극(皇太極)이 황위를 이어 청 왕조를 세웠다. 황태극은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물게 뛰어난 재능과 모략을 겸비한 황제였다. 그는 잠시 영원성 대신 조선(朝鮮)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로는 명과 청 왕조 모두 휴전하고 각자 전열을 가담을 시간이 필요했다. 명군은 성을 축조하고 병사들을 훈련 시켜야 했고, 청군은 조선을 공격하여 재물을 약탈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를 공고히 해야 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원숭환은 황태극에게 화친을 제의했고 황태극도 이에 동의했다. 그러나 명의 황제와 조정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만청이 줄곧 중원의 속국이었으니 황태극은 절대로 화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황태극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을 침략했고 원숭환은 성을 축조하고 금주 중좌와 대능하, 소능하 등지에 방어선 구축 공사를 진행하는 동시에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했다. 조선이 너무 빨리 투항해버리면 명군도 요동으로 돌아가 청군에 대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황태극은 조선을 침공해 커다란 승리를 거두면서 막대한 재물을 손에 넣었고 안정된 정세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숭환이 성을 보수하고 군마를 훈련 시키면서 세력이 갈수록 강대해지는 것을 보고는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휴전을 유지했다.

그러다가 1627년, 마침내 황태극은 대군을 이끌고 요서 지방의 명군 진영들을 공격하여 대능하와 소능하를 함락시키고 이어서 금주를 공격했다. 5월 11일에서 6월 4일 사이에 장군 조솔교(趙率敎)가 병력을 지휘하여 황태극의 군대에 맞서 결전 끝에 참패를 당했지만, 금주를 빼앗기진 않았다. 황태극은 금주 공략이 여의치 않자 영원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원숭환은 철저한 방비로 대응했고 양군이 대치한 가운데 벌어진 이틀 동안의 격전으로 쌍방이 모두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영원성을 함락시키진 못했다. 황태극은 다시 금주를 공격했지만, 성의 수비가 견고하여 청군은 무수한 사상자를 내고도 금주를 손에 넣지 못했다. 마침 폭염까지 겹쳐 병사들이 지독한 열사병에 시달리고 사기가 크게 떨어지자 황태극은 어쩔 수 없이 심양으로 철군했다.

금주 전투에서 명군은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원숭환은 한 단계 승진했을 뿐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원숭환이 위충현과 같은 당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원숭환이 진사에 합격했을 때 주고(主考-과거시험의 최고 심사위원)였던 스승과 그를 요동 수비에 추천했던 사람은 모두 동림당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영원대첩과 금주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어도 위충현의 호감을 사지 못했다. 오히려 위충현은 원숭환의 기세가 갈수록 커지는 것을 보고 사당을 동원하여 금주를 구하지 못한 것이 원숭환의 실책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원숭환은 사직하고 고향인 광동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해 8월, 목공예에 심취해 살던 희종황제가 사망하자 후사가 없어 친동생 주유검(朱由檢)이 황위를 이어받고 연호를 숭정(崇禎)이라 했다. 당시 숭정황제의 나이 겨우 열일곱 살이었지만 매우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 형과는 크게 다른 풍모를 보였다. 그는 겉으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엄당을 제거한 후 위충현을 자살로 몰아갔고 조정의 모든 독소를 교묘한 방법으로 해소해 나갔다. 위충현이 죽자 그에게 아첨하며 몸을 보전하던 신하들은 모두 주살되거나 군대로 충원되었고, 위충현으로부터 배척당했던 원숭환이 다시 기용되었다.

1628년 7월, 숭정은 낙향했던 원숭환을 불러 요동의 수비에 관해 물었다. 이 대화를 통해 숭정은 원숭환을 신뢰하고 따르게 되었다. 원숭환은 숭정에게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보급해주고 일체의 간섭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체적인 요동 수비의 책략과 원칙을 제시했고 숭정은 그의 제안과 요구를 모두 받아들였다. 숭정은 원숭환에게 보검 한 자루를 하사함으로써 그에 대한 신뢰와 지지를 표하고 요동을 잘 지켜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원숭환이 도착하기 전에 요동에서 병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간단했다. 군대에 군량이 부족했다. 당시 중앙이 잠시 무력해진 틈을 타 각급 관원들과 지주들이 재물을 훔쳐 가버려서 국고가 텅텅 비고 군량을 지급할 재원이 없었다. 원숭환은 즉시 황실의 재산을 이용하여 군량을 지급할 것을 건의했지만 재물을 목숨처럼 여기는 숭정황제는 몹시 화를 내면서 원숭환에 대한 태도를 바꿔 더, 이상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원숭환은 피도 대장 모문용(毛文龍)을 주살함으로써 또다시 숭정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피도는 요동 동남 해안의 작은 섬으로, 북으로는 청과 통하고 동으로는 조선으로 이어져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교동반도의 봉래와 등주를 방어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모문용은 일찍이 청에 대한 항전에서 공을 세운 바 있으나 위충현의 양아들이 되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질렀고, 청의 황태극에게 산해관을 양보하는 대신 자기에게 산동을 때어달라는 제안을 한 적도 있었다.

원숭환은 요동의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드러나지 않는 화근을 제거한다는 생각으로 숭정 2년(1623) 7웡, 병사들을 매복시켜 모문용을 체포한 다음, 그의 죄상 열두 가지를 공개하고 보검을 뽑아 주살했다. 원숭환이 모문용을 죽인 원인과 경과를 자세히 보고하자 숭정은 몹시 놀라며 다른 속셈이 있을 거라고, 의심했지만 당시로 서는 원숭환의 능력에 의지하여 청군을 막아내고 있던 터라 별다른 문책을 하지 못했다.

청의 황태극은 명과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이 역부족임을 깨닫고 줄곧 화친을 요구했지만 오만한 숭정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숭환이 중간에서 조정에 나섰지만, 매번 실패했다. 그러다가 1629년 11월, 황태극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명을 공격하여 원숭환이 주둔하고 있던 영원을 격파하고, 곧장 북경으로 향했다. 청군의 공격으로 장성과 준화가 함락당하자, 명군은 퇴각하기에 급급했다. 순무 왕원옹(王元雍)은 자살하고 산해관 총병 조솔교도 준화 성에서 전사했다. 준화를 손에 넣은 청군은 곧장 북경을 공격했다. 그러자 원숭환은 급히 군사를 이끌고 달려와 지원했고 연도에 흩어져 있던 군사를 규합하여 청군의 퇴로를 막는 데 주력했다.

11월 10일, 원숭환이 계주에 도착했을 때 청군은 이미 계주를 포위하여 서진 중이었고, 이어서 삼하와 향하 등의 성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원숭환은 급히 북경으로 달려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북경광거문 밖에 진을 쳤다.

청군의 맹렬한 공격에 숭정황제는 혼비백산했고, 수도는 한순간에 혼란에 빠졌다. 원숭환이 도착하자 그제야 마음을 가라앉힌 숭정은 그를 크게 치하했지만, 전투에 지친 군사들을 성안에 들이지 않았다. 여전히 원숭환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숭정은 병력을 외성에 주둔시켜달라는 요구마저 받아들이지 않고 청군과의 결전만을 강요했다.

원숭환은 군사들이 몹시 지쳐 있음을 알고도 숭정황제의 재촉 때문에 교전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달려가 격전을 벌인 원숭환은 청군을 남해자 근처까지 내모는 대, 성공했다. 하지만 청군이 아직 멀리 퇴각하지 않은 것을 본 숭정황제는 이들을 추격하여 섬멸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명군에는 여러 지대의 부대가 남아 있었고 원숭환의 지휘권, 하에 있었지만 아직은 힘을 모울 수 없는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성 밖으로 나가 결전을 벌일, 경우 청군은 배수진을 치고 달려들 것이 분명하기에 북경성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숭정은 원숭환을 의심하여 그의 병권이 막강해질 경우 자신을 제압하고 정권을 빼앗으려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만청 군대는 성 밖에서 대대적인 약탈과 폭행을 일삼으며 백성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었다. 태감들은 대부분 수도에 땅과 집을 갖고 있어 자신들의 재산이 파괴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이들은 이러한 불안을 원숭환에게 풀어버리기로 마음먹고 원숭환이 청군을 끌어드려 황제에게 화친을 강요하고 있다고 억지 주장을 했다. 이러한 여론은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의 마음을 한순간에 사로잡았고 모두 원숭환을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차에 누군가 북경성 문에 올라가 원숭환을 매도하는 고함을 지르며 아래쪽에 있던 원숭환의 병사들에게 돌을 던져 부상을 입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숭정황제의 의심과 불안은 더욱 깊어졌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청의 황태극은 음모를 꾸몄다.

얼마 전 청군은 명의 황궁에서 파견된 말 사육을 전담하던 태감 두 명을 사로 잡았다. 한 명은 양춘(楊春)이고 다른 한 명은 왕성덕(王成德)이었는데, 황태극은 철수하면서 부장 고명중(高鳴中)과 참장 포승선(鮑承先), 영완성(寧完成) 등을 시켜 이들을 지키게 했다. 이들은 청군에 귀순한 한족 장수들이었다. 저녁이 되자 포승선과 영완성은 황태극이 지시한 밀계에 따라 포로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자네 아나? 이번에 철군한 것은 다 작전이 있어서야. 황태극께서 혼자 말을 몰고 적진에 들어가 밀약을 맺고 왔거든. 황태극과 원숭환 사이에 밀약이 맺어졌으니 조만간 대사가 이루어질 걸세.”

두 명의 태감은 자는 척하면서 모두 듣고 있었다. 다음날 양춘은 적군이 혼란해진 틈을 타서 도망쳤고 자신이 들은 얘기를 곧장 숭정황제에게 보고했다. 숭정은 양춘의 보고를 그대로 믿고 즉시 원숭환을 궁으로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옥에 가둬버렸다. 원숭환의 부하장수들은 사태의 추이를 몰라 성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사흘 후에 황제의 뜻이 전해졌다. 원숭환이 적과 내통하여 모반을 계획했기 때문에 그에게 죄를 묻되 다른 사람들은 문책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에 병사들은 몹시 분통해, 하며 울음을 터뜨렸고 심지어 황제를 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형국이었다. 저대수도 비분에 젖어 병력을 인솔하여 금주로 돌아가 버렸다.

저대수가 가버리자 숭정황제는 청군이 다시 공격해올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저대수를 다시 오도록 원숭환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한편, 관리들을 보내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숭환은 여러, 대신들의 권고에 못 이겨 국가가 몹시 위중한 상태라는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저대수는 숭정이 보낸 사자를 적으로 생각하고 죽이려 했으나 그가 내민 원숭환의 친필 서한을 보고는 검을 내려놓았다. 그가 군대를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저대수의 모친이 말했다.

“네가 회군하면 원장군의 죄만 중가 시킬 뿐이다. 차라리 병력을 이끌고 가서 일부 지방을 탈환하고 승리를 거둔다면 원장군을 감옥에서 구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대수는 모친의 말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나가 청군이 점령하고 있는 두 개의 성지를 탈환하고 청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한편 황태극은 원숭환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쾌재를 불렀다. 그는 이미 북경 이남 20리 지점에 있는 양향을 점령했고 곧장 노구교를 공격하여 거군(車軍)을 격파했으며 4만의 명군을 대파하고 우두머리급 장수들을 생포하거나 사살함으로써 북경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러나 저대수가 회군한다는 소식에 퇴로가 차단될 것이 두려워 화친을 제안하는 한편, 산해관을 통해 서서히 병력을 철수했다.

청군이 물러가자 숭정은 다시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이때 많은, 신하들과 장수들이 원숭환의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고, 손승종도 원숭환을 위한 시문을 바쳤다. 자기가 대신 처벌을 받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숭환은 옥중에서 편지를 써서 부하들이 안심하고 청군에 대항할 수 있도록 독려했고, 반년 후에 명군은 무사히 청군을 장성 밖으로 쫓아낼 수 있었다.

반년 동안 원숭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 형벌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당분간 그를 살려두었다가 청군이 완전히 물러간 다음에 능지처참한다는 것이었다. 적군의 이간질에 속아 무고한 원숭환을 처형하고 그를 ‘민족의 반역자’로 증오하도록 민심을 호도한 것은 숭정황제의 소심하면서도 완고한 성격의 소치였다.

한편 원숭환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것도 자신을 보호하는 데 무능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지킬 줄 아는 것이 개인의 신상과 이익을 지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崇禎皇帝와 袁崇煥】 의심 많은 숭정, 충신 원숭환을 죽게 하다 (上)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 연구가,칼럼리스트)
경인일보/호남매일/한서일보/의정뉴스/메스컴신문/노인신문/시정일보/조선일보/서울일보 기자, 편집국장, 논설실장 등 역임.



본글주소: http://www.poweroftruth.net/m/mainView.php?kcat=2034&table=jr_lee&uid=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