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뒤통수
한국이 미국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번 인플레 감축법으로 한국차가 제대로 일격을 맞았다.
연초 바이든 방한 당시 현대기아차는 미국 조지아주에 8조원에 달하는 전기차 전용생산공장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추가로 6조3천억에 달하는 로봇공학, 도심항공교통, 자율주행 등의 투자계획을 발표하자 바이든이 “땡큐”를 연발하며,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미국 상,하원 의회를 통과하고 16일 바이든이 서명한 이른 바 “인플레 감축법”에서는 현대기아차를 보조금 지급대상에서 배제해 버렸다. 돈주고 빰맞은 격이다.
이 법에 의하면 10월 1일부터 미국에서 생산되는 전기차에만 7500달러(약 1천만원) 세액공제형식의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기아차는 2025년이나 되어야 조지아공장에서 전기차 생산이 가능하다. 현대기아차는 3년 동안 보조금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테슬라가 70% 점유율로 1위이다. 최근 현대기아차는 아이오닉5 등을 앞세워 유럽, 일본을 제끼며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 6%를 차지하며 빠른 속도로 2위로 등극하였다. 그 추격속도가 가팔라 미국언론도 ‘현대차, 일론 머스크 쏘리(sorry)’라며 현대차의 추격양상을 보도한 바 있다. 이미 발표한 보조금 지급대상차는 거의 미국 전기차 일색이다. 이렇게 되면 현대기아차는 400만원 정도 비싸져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정의선 현대기아차 회장이 곧바로 미국으로 날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해결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인플레 감축법, IRA>이란 무엇인가?
향후 10년간 법인세 등을 인상하여 추가세수를 확보하고 이중 일부는 의료보호확대와 약가인하에 쓰고, 따로 약 560조원 정도는 전기차 보조금 등의 지원을 통하여 친환경차 산업에 쓰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너지전환과 가격인하를 도모할 수 있다는 명분으로 ‘인플레 감축법’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원래 바이든이 대통령 공약으로 내건 <더 나은 재건법, Build Back Better, 트리플B>이 모태였으나, 석탄산업기반의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민주당 소속 조 맨친 상원의원이 결사반대하여 양측 동수인 상원에서 통과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3조 5천억 달러(약 4천 500조원)나 되는 자금을 풀면 가뜩이나 심각한 인플레이션에 기름을 끼얹는다는 비판이 일자, 명칭을 인플레 감축법이라고 바꾸고 규모도 7천 4천억 달러(약 910조원) 정도로 줄여 11월 선거를 앞두고 겨우 통과시킨 법이다.
이 지원금은 배터리 분야에도 적용된다. 배터리 분야 보조금은 내년 1월부터 미국내에서 생산하는 전기차 중에서 배터리 부품에 3500달러, 배터리 광물에 3500달러씩 7500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그런데 배터리에 들어가는 리튬 등의 광물의 40% 이상을 미국 또는 미국과 FTA를 체결한 국가에서 생산가공하고, 양·음극제, 전해질 등 핵심부품 역시 50% 이상을 북미대륙 내에서 생산조립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이 조건은 단계적으로 상향해서 2029년까지는 광물 80%, 부품 100%가 되어야 한다. 한 마디로 중국산 배터리를 쓰지 말라는 이야기이다.
현재 전기차 뿐만 아니라 배터리 산업에서도 세계 최강자는 CATL, BYD 등을 앞세운 중국이다. 테슬라조차도 상당부분의 배터리를 중국산으로 쓰고 있다. LG, SK, 삼성 배터리 업체들은 우수한 기술력으로 평가받는 리튬, 니켈, 코발트를 주요 소재로 하는 삼원계배터리(NCM배터리)를 생산하고 있다. 여기에 들어가는 코발트 81%, 수산화리튬 84.4%(2022년 1~7월 현재)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양극제, 음극제, 분리막, 전해질 등 4대 핵심부품 역시 50~70%가 중국에서 공급받고 있다. 한국기업이 중국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니켈, 코발트는 희귀금속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광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에서 배터리 공급과 전기차 생산이 가능해지려면 질이 좀 떨어지는 인, 철기반 배터리(LFP배터리)로 갈아타야 한다. 인, 철은 그래도 흔한 광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시장에 진출하려면 한국 기업들은 현재의 경쟁력있는 기술을 포기해야 하고, 가까이 있는 중국을 버리고 배터리 광물자원과 부품자원의 공급망을 미국중심으로 새로 개척해야 한다. 그런데 배터리 광물 제련의 70%는 중국이 하고 있다.
대미추종 일변도, 얼빠진 윤석열 정부
지난 5월 바이든 방한과 한미정상회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동맹은 경제안보동맹”이니, “포괄적 전략동맹”이니 하면서 완전체에 가까운 한미동맹을 과시하였다. 그리고 삼성 반도체를 비롯, 현대기아차, LG솔루션, SK이노베이션 등이 앞다투어 대미투자를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는 무엇인가?
인플레 투자법은 어제 오늘 준비된 것이 아니었다. 애초 법안 초안에서는 전기차 보조금 지급대상을 ‘미국내 노동조합이 있는 전기차 생산업체’로 국한하였다. 그런데 노동조합이 없는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가 강력하게 반대하여 ‘미국내 생산업체’로 변경된 것이다. 그럼에도 맹목적인 대미추종에 빠진 윤석열 정부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한국 통산교섭본부장이 우려를 표명한 것은 8월 7일 이미 미 상원에서 법이 통과된 3일 후인 8월 10일이었다. 11일이 되어서야 현대차 및 LG솔루션, SK온, 삼성SDI 배터리 3사와 비공개 간담회를 갖고, ‘한국정부 대응이 늦은 것은 아니다’는 엉뚱한 소리를 해가며 뒤늦게 허둥대고 있다. 통상본부장과 산업통상부장관이 방미를 한다느니, 유엔총회에서 한미정상이 만나 의논을 해보겠다느니 하고 있지만, 11월 선거를 코앞에 둔 바이든에게 기대할 건 아무 것도 없다.
미국 인플레 감축법안은 명백히 WTO, 한미FTA 위반이다. WTO는 ‘최혜국 대우’ 조항이 있다. ‘특정 국가에 부여한 혜택을 다른 국가에도 동일하게 부여해야 한다’는 조항이다. 한미FTA 제22조는 ‘내국민 대우’ 조항이다. 당사국에 대해 ‘동종의, 직접적으로 경쟁적인, 또는 대체가능한 상품에 대하여, 그 지역정부가 부여하는 가장 유리한 대우보다 불리하지 아니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한국차에게도 미국차에게 부여하는 동등한 혜택을 주어야 함에도 미국은 대놓고 이를 위반하는 법까지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불이익에는 유럽, 일본 등도 함께 당하고 있는 만큼 미리부터 이들 국가와 협의하며 다각적인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윤석열 정부는 8월 4일 미 하원의장인 펠로시 방한 당시에도 손을 놓고 있었다. 미국에 대한 환상과 추종으로 가득찬 윤석열 정부에게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플레 감축법, 한국경제 공동화로 이어진다
인플레 감축법에서 한국차가 불이익을 당하고, 배터리 기업이 난관에 봉착한다는 것이 현재 중요 쟁점이다. 그러나 이 인플레 감축법에는 더 무서운 그림이 도사리고 있다.
인플레 감축법의 다른 별칭은 ‘Made in America법’이라 할만 하다. 2008년 금융공황 직후 미국은 오바마 시절부터 ‘제조업 르네상스’와 ‘유턴’ 전략을 채택하고 제조업을 일으키려고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코로나 펜데믹이 터지자 마스크 하나를 못 만드는 실상 앞에 서게 되었고, 제조업을 중심으로 치고 나오는 중국에게 세계경제패권을 추월당하는 위기 앞에 놓이게 되었다.
인플레 방지법은 반도체지원법에 이어 향후 5~10년에 걸쳐 3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미국의 전략을 반영한 것이다. 첫째는 중국을 세계 공급망에서 배제고립시켜 중국의 발전속도를 늦춰보자는 것이다. 둘째는 차세대 핵심성장산업인 반도체와 전기차 산업에서 미국의 경쟁력을 증강시켜 이 분야 선두주자인 중국을 따라 잡아보자는 것이다. 셋째는 미국과의 동맹세력들인 유럽, 일본, 한국을 포함한 세력들조차도 따돌리고 차세대 성장산업에서 미국패권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인플레 감축법으로 전기차분야에 투입되는 약 560조원 규모의 보조금은 한국예산의 8배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이다. 여기에 중국산 배터리 광물자원과 부품영역까지 꼼꼼하게 포함시킨 것을 보면 얼마나 미국이 절치부심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국기업들은 여기에 올라타 미국시장을 개척해야 한다면서 대미투자에 열을 올리다가 이번에 뒤통수를 맞았다. 비록 한국기업들이 미국에게 불이익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미국시장을 뚫고 들어가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할 것이고, 결국 성과를 낼 것이다.
오히려 중대문제는 한국기업들이 대미투자에 올인하면서 정작 한국경제는 깡통, 속빈 강정이 되어 간다는 점이다.
신냉전시대 세계공급망 분리재편과정에서 새로운 생태계는 미국의 전략에 따라 미국본토를 중심으로 짜여져 가고 있다. 과거에는 국내 생산시절에 기반을 두고 수출입을 통한 무역으로 경제성장을 도모하였다. 그것이 IMF 이후에는 해외투자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변해왔다. 때문에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말이 유행할 만큼 국내시설투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한편 한국경제는 중후장대형 수출입산업구조에서 전기차, 디지털전환 등 새로운 성장산업으로 이동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하여왔다. 그런데 이 신산업의 생태계가 국내에 편성되는 것이 아니라 미국본토에 편성하라고 요구하는 법안이 바로 반도체 지원법과 인플레 감축법이다.
많은 국민들이 우려하는 대목이 이 부분이다. 앞으로 삼성, 현대 등 미국투자를 확대하는 재벌대기업은 살아남겠지만 한국경제는 국내 생태계가 무너져 더욱 빈곤해지고, 심각한 청년실업과 궁핍화, 양극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걱정이다.
윤석열 정부하에서 한국 재벌대기업의 대미투자는 거의 탈출러시 수준이다. 왜 그럴까? 이제 삼성전자나 현대차 등 재벌대기업은 사실상 우리나라 기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기업에 대한 외국자본의 지분율이 높아져 삼성전자는 57%, SK하이닉스는 51%, 현대기아차는 45% 내외에 이른다. 한국재벌대기업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윤석열정부 정책의 정체성도 심각하다. 미국은 사실상 전세계 제조업 투자를 인플레 감축법을 통하여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공장을 지어도 미국땅에 짓고, 원료를 써도 미국자원을 쓰라고 강제한다. 단순히 대중국 포위전략을 넘어서 미국동맹국들에게 미국 말고는 다 죽으라는 식의 노골적인 패권전략이다. 여기에 가장 맹종하는 것이 윤석열정부이다. 앞으로 국내경제 생태계가 어떻게 되었든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 워크에 앞장서는 것도 윤석열 정부이고, C4반도체 동맹 선두에 서는 것도 윤석열 정부이다.
그러나 미국식 패권전략은 이미 1930년 세계대공황기에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난 바 있다. 당시 공황에 빠진 미국은 관세를 4~50%로까지 끌어올렸고, 여기에 맞대응으로 유럽 역시 관셰를 끌어올리면서 전세계가 보호무역주의 물결에 휩싸였고, 세계대공황의 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저나갔다. 보후무역주의 위기는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부르고 말았다. 이것을 ‘근린궁핍화정책’이라고 부른다. 자기만 살려고 인근 나라들을 가난하게 만들려다가 전체가 가난해진다는 경제이론이다.
그런데 미국이 미국중심의 공급망을 짜면서 그 짓을 다시 하고 있다. 때문에 전세계에 생산비용이 증가하고 원자재값이 상승하며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진행되고 있다. 신냉전은 단순히 대중, 대러 포위전략만이 아니다. 가치동맹이라고 하는 미국과 유럽, 일본 등과의 모순이 격화되고 있다. 이런 식이면 미국과 한국, 인도, 남미 등 신흥국과의 모순 역시 더욱더 격화될 것이다.
신냉전 자국중심주의 경제시대에 한국은 수출주도보다는 내수를 강화해야 하고, 해외투자보다는 유턴을 실시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남북경협을 통해서 미증유의 세계경제위기에 대응해야 한다. 이러한 대전환을 윤석열 정부에게 기대할 수 있을까?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게 들려주고 싶다. 가장 미국적인 미국인 키신저가 말하지 않았던가. “미국과 적이 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미국과 함께하는 것은 더 치명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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