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경휴게소 건너편으로는 고속도로 다리 아래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을 볼 수 있다. 그 아래에 단성면 상방리 벽화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단양향교가 있어 여기가 옛 단양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는데, 1980년대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수몰된 아픔이 있다.
죽령 지나 충청북도의 관문인 단양 적성과 상방리 벽화마을로 가보자.
단양 적성 이야기
춘천방향으로 죽령터널을 지나면 휴게소가 하나 나오는데, 단양팔경 휴게소이다. 보통 휴게소는 고속도로의 오른편에 바로 있는데, 여기는 좀 특이하게 차로 언덕을 1분 정도 올라가야 보인다. 휴게소 규모도 다른 주요 고속도로의 것보다는 작은 느낌이다.
그런데 여기 휴게소는 다른 곳과 비교하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왼편의 중앙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인 지은 웅비의 상과 휴게소 뒤편에 있는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와 사적 제265호 단양 적성이 있기 때문이다. 왼편에 있는 웅비의 상은 중앙고속도로 공사개요와 참여했던 이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아달라이사금의 죽령길 개척 이후 2001년 터널로 직선화되기까지는 무려 184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중앙고속도로는 3조 7천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간 12년에 걸친 대공사였는데, 고속도로에서 마지막으로 완공된 곳이 바로 죽령터널이다. 죽령터널은 토목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1990년대 토목 기술을 적용한 몇 안 되는 장대터널이다. 게다가 2012년까지 11년 동안 국내 최장 도로터널이었다.
웅비의 상 뒤로 계단이 있는데, 바로 단양 적성으로 가는 길이다. 계단으로 가기 전 전망대가 하나 보이는데, 남한강과 그 위에 놓인 중앙고속도로 다리인 단양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시판을 보니 눈에 띄는 안내판이 하나 보였는데, 단양대교 뒤 산 건너편이 옛 단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경시장으로 유명한 곳이 단양 중심지가 아니었다고? 적성 일대를 살펴보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적성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관리를 안 해서 그런지 풀들이 내 키를 넘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자라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풀들을 지나 왼편을 보니 마침 성벽이 보인다. 그런데, 성벽을 보니 반듯한 직육면체 돌로 쌓은 수원성과 달리 깬돌과 다듬은 돌을 포개어 쌓았는데, 삼국시대에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타원형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을 뒤로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다. 윗부분이 깨져 있지만 한자는 육안으로 제법 잘 보인다. 비석은 1978년 1월 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끈 단국대조사단이 이곳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했는데,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길이 진흙탕이었다고 한다. 진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리다 흙이 묻은 돌부리가 살짝 드러나 흙을 털려는 순간 글자가 보였는데, 돌부리 주변을 야전삽으로 파니 신라 고관들의 관등과 공훈자에 대한 포상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장 첫 머리에는 10명의 중앙고관이 나오는데, 그중 이사부, 비차부, 거칠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 다음은 신라의 정복사업을 목숨까지 바쳐 도운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하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551년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이와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남에 갇혀 있던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했다는 기록과 진흥왕 당시 신라 관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어 발견 후 이듬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적성비 왼쪽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뭔가 비밀이 숨겨 있는 것 같아 길을 따라가 봤다. 한 5분 정도 걸으니까 산 정상 푸른 들판에 놓인 옛 성벽과 북문터가 탁 트인 남한강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성벽 너머 내 마음을 트이게 하는 남한강을 보니 왜 이곳에 신라가 적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적성 좌우로는 하천, 바로 북쪽에 남한강이 흐르는데,남한강과 좌우 하천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천혜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관문을 굳건히 하면 남한강을 따라 동쪽으로는 오늘날 영월과 그 주변 강원도 산지를, 서쪽으로는 오늘날 충주, 양평, 서울을 따라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다. 그래서 죽령 이북을 점령한 후 성을 쌓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단양 적성은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성 벽화마을
적성을 둘러보고 건너편 옛 단양의 역사가 궁금해서 건너편 단성면 일대를 가보기로 했다. 원래는 단양 나들목에서 내려 제천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고 36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야 하지만, 이미 이 나들목을 지나 북단양 나들목에서 매포읍을 지나 영주방향 5번 국도를 따라 왔다.
단성면 일대를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원래 있던 마을이 잘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 사연을 보려고 했는데, 일단 큰 길 오른편에 무려 500년의 역사가 담긴 단양향교가 있다. 문이 굳게 닫혀 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여기가 조선시대 단양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시(漢詩)와 전통 옷을 입은 남녀들로 가득한 벽화로 가득하다. 벽화에는 도산서원의 주인공인 퇴계 이황도 있는데, 조선 제13대 왕 명종 무렵 단양군수로 역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마을로 들어가 보니, 단성면이 옛 단양의 중심지였다는 흔적이 보인다. '소방서 앞 거리', '마지막 장날'과 그 옆을 수놓은 그림들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황이 군수로 부임해 근무했던 곳도 바로 여기 일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황이 근무했던 관아와 그의 흔적은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남한강 물속에 잠겨버렸다. 또한 구 단양읍 일대의 80%가 수몰되었는데, 대다수 원주민들이 오늘날 구경시장이 있는 단양 읍내로 이주한 아픈 현대사도 담고 있다.
단양 적성 일대와 단성면 마을을 같이 보니, 남한강을 넘어가기 직전 중앙고속도로 동편은 신라의 군사요충지, 서편은 조선과 근현대사의 단양군 이야기를 담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영주발 죽령의 마지막 내리막길이 오랫동안 읍내의 기능을 했다는 게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였고.
옛 죽령길 또는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을 지나 남한강으로 가기 전 성재산 일대에는 옛 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군사요충지임을 말해주는 적성이 있다. 할아버지 김무력은 죽령 이북 정복과 신라의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장군으로, 손자 김유신은 할아버지가 개척한 공로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적성 건너편에는 조선시대와 80년대 이전까지 단양읍이었던 단성 벽화마을이 있다. 군사 기능을 잃어버린 적성의 유지를 이어받아 관아와 향교가 있던 조선시대 단양 중심지였는데, 충주댐의 준공으로 옛 도읍의 명성은 이제 물속으로 사라지고, 이곳의 주민들과 군청은 오늘날 '신'단양으로 이주했다. 적성과 '옛' 단양은 앞으로도 옛 추억으로 남을 것인가?
그런데 여기 휴게소는 다른 곳과 비교하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왼편의 중앙고속도로 준공기념탑인 지은 웅비의 상과 휴게소 뒤편에 있는 국보 제198호 단양적성비와 사적 제265호 단양 적성이 있기 때문이다. 왼편에 있는 웅비의 상은 중앙고속도로 공사개요와 참여했던 이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아달라이사금의 죽령길 개척 이후 2001년 터널로 직선화되기까지는 무려 184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중앙고속도로는 3조 7천억원에 가까운 비용이 들어간 12년에 걸친 대공사였는데, 고속도로에서 마지막으로 완공된 곳이 바로 죽령터널이다. 죽령터널은 토목역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1990년대 토목 기술을 적용한 몇 안 되는 장대터널이다. 게다가 2012년까지 11년 동안 국내 최장 도로터널이었다.
▲ 단양팔경휴게소 왼편 웅비의 상. 중앙고속도로 공사개요와 공사 참여자의 명단이 있다. | |
ⓒ 최서우 |
웅비의 상 뒤로 계단이 있는데, 바로 단양 적성으로 가는 길이다. 계단으로 가기 전 전망대가 하나 보이는데, 남한강과 그 위에 놓인 중앙고속도로 다리인 단양대교가 한눈에 들어온다. 게시판을 보니 눈에 띄는 안내판이 하나 보였는데, 단양대교 뒤 산 건너편이 옛 단양이었다고 한다. 오늘날 구경시장으로 유명한 곳이 단양 중심지가 아니었다고? 적성 일대를 살펴보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에서 적성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쉽지 않았다. 관리를 안 해서 그런지 풀들이 내 키를 넘어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자라 있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풀들을 지나 왼편을 보니 마침 성벽이 보인다. 그런데, 성벽을 보니 반듯한 직육면체 돌로 쌓은 수원성과 달리 깬돌과 다듬은 돌을 포개어 쌓았는데, 삼국시대에 산 정상을 중심으로 성벽을 두른 타원형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을 뒤로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가 있다. 윗부분이 깨져 있지만 한자는 육안으로 제법 잘 보인다. 비석은 1978년 1월 6일 정영호 교수가 이끈 단국대조사단이 이곳에서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를 밝히는 학술조사를 했는데, 간밤에 내린 눈 때문에 길이 진흙탕이었다고 한다. 진흙을 털려고 두리번거리다 흙이 묻은 돌부리가 살짝 드러나 흙을 털려는 순간 글자가 보였는데, 돌부리 주변을 야전삽으로 파니 신라 고관들의 관등과 공훈자에 대한 포상의 내용이 담겨 있었다.
▲ 전망대 아래로 보이는 남한강과 단양대교. 다리 왼편 산 너머에는 옛 단양의 흔적이 있다. | |
ⓒ 최서우 |
▲ 국보 제198호 단양 신라 적성비. 이사부, 거칠부, 김무력의 당시 관등과 정복사업을 돕다 목숨바친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 |
ⓒ 최서우 |
문장 첫 머리에는 10명의 중앙고관이 나오는데, 그중 이사부, 비차부, 거칠부,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김무력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 다음은 신라의 정복사업을 목숨까지 바쳐 도운 야이차의 공훈을 표창하는 내용이 나온다.
삼국사기에 551년 죽령 이북 고현 이남의 10군을 탈취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대다수 학자들은 이와 연관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남에 갇혀 있던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한강으로 진출했다는 기록과 진흥왕 당시 신라 관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어 발견 후 이듬해 국보로 지정되었다.
적성비 왼쪽에 계단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는데, 뭔가 비밀이 숨겨 있는 것 같아 길을 따라가 봤다. 한 5분 정도 걸으니까 산 정상 푸른 들판에 놓인 옛 성벽과 북문터가 탁 트인 남한강과 함께 장관을 이룬다.
▲ 사적 제266호 단양 적성과 북문터 일대. 북문 뒤에 보면 울타리가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내성벽에 덧대어 석환(石丸)을 몰아두던 석환무지다. | |
ⓒ 최서우 |
▲ 북성문터 아래로 보이는 남한강. 신라는 단양 적성을 교두보 삼아 남한강 동편으로 강원 영월을 비롯한 산간 지방을 정복했고, 서편으로는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 |
ⓒ 최서우 |
성벽 너머 내 마음을 트이게 하는 남한강을 보니 왜 이곳에 신라가 적성을 쌓았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적성 좌우로는 하천, 바로 북쪽에 남한강이 흐르는데,남한강과 좌우 하천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천혜의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관문을 굳건히 하면 남한강을 따라 동쪽으로는 오늘날 영월과 그 주변 강원도 산지를, 서쪽으로는 오늘날 충주, 양평, 서울을 따라 중국으로 진출할 수 있다. 그래서 죽령 이북을 점령한 후 성을 쌓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단양 적성은 신라 삼국통일의 기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단양 적성 북문터. 바로 앞으로 남한강이 보인다. | |
ⓒ 최서우 |
단성 벽화마을
적성을 둘러보고 건너편 옛 단양의 역사가 궁금해서 건너편 단성면 일대를 가보기로 했다. 원래는 단양 나들목에서 내려 제천방향으로 5번 국도를 타고 36번 국도를 따라 좌회전해야 하지만, 이미 이 나들목을 지나 북단양 나들목에서 매포읍을 지나 영주방향 5번 국도를 따라 왔다.
단성면 일대를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원래 있던 마을이 잘린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런지 사연을 보려고 했는데, 일단 큰 길 오른편에 무려 500년의 역사가 담긴 단양향교가 있다. 문이 굳게 닫혀 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여기가 조선시대 단양의 중심지였다는 증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단성면 벽화마을 전경. 이곳이 옛 단양읍 일대였다. 마을의 80%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
ⓒ 최서우 |
▲ 600년 역사의 단양향교. 명종 13년 단양 군수 황준량이 현 위치로 이전했다. 풍화루를 지나면 앞에는 강학공간인 명륜당, 뒤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여러 성현을 모신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구조다. | |
ⓒ 최서우 |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시(漢詩)와 전통 옷을 입은 남녀들로 가득한 벽화로 가득하다. 벽화에는 도산서원의 주인공인 퇴계 이황도 있는데, 조선 제13대 왕 명종 무렵 단양군수로 역임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깊이 마을로 들어가 보니, 단성면이 옛 단양의 중심지였다는 흔적이 보인다. '소방서 앞 거리', '마지막 장날'과 그 옆을 수놓은 그림들이 이를 잘 설명해준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황이 군수로 부임해 근무했던 곳도 바로 여기 일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황이 근무했던 관아와 그의 흔적은 충주댐을 건설하면서 남한강 물속에 잠겨버렸다. 또한 구 단양읍 일대의 80%가 수몰되었는데, 대다수 원주민들이 오늘날 구경시장이 있는 단양 읍내로 이주한 아픈 현대사도 담고 있다.
▲ 단성 벽화마을. 오른편 천원 지폐의 주인공인 이황은 명종 3년(1548년) 1월에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얼마되지 않아 형 이해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자, 상피제에 따라 경상도 풍기군수로 옮기게 된다. | |
ⓒ 최서우 |
▲ 옛 단양의 풍경을 보여주는 벽화. 충주댐 수몰 전 활기찬 옛 단양읍내의 광경을 보여준다. | |
ⓒ 최서우 |
단양 적성 일대와 단성면 마을을 같이 보니, 남한강을 넘어가기 직전 중앙고속도로 동편은 신라의 군사요충지, 서편은 조선과 근현대사의 단양군 이야기를 담은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영주발 죽령의 마지막 내리막길이 오랫동안 읍내의 기능을 했다는 게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였고.
옛 죽령길 또는 중앙고속도로 죽령터널을 지나 남한강으로 가기 전 성재산 일대에는 옛 신라와 고려시대까지 군사요충지임을 말해주는 적성이 있다. 할아버지 김무력은 죽령 이북 정복과 신라의 전성기의 시작을 알린 장군으로, 손자 김유신은 할아버지가 개척한 공로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룬 영웅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적성 건너편에는 조선시대와 80년대 이전까지 단양읍이었던 단성 벽화마을이 있다. 군사 기능을 잃어버린 적성의 유지를 이어받아 관아와 향교가 있던 조선시대 단양 중심지였는데, 충주댐의 준공으로 옛 도읍의 명성은 이제 물속으로 사라지고, 이곳의 주민들과 군청은 오늘날 '신'단양으로 이주했다. 적성과 '옛' 단양은 앞으로도 옛 추억으로 남을 것인가?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 동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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