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이해관계
우크라이나 사태의 전초전 격인 조지아 사태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시아 혁명의 여명기, 현재의 조지아 영토에서는 멘셰비키(소수파,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우파)가 지배하는 조지아와 볼셰비키(다수파, 구소련공산당)가 장악한 오세티야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다. 러시아의 개입 후 지역 전체가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됐지만 조지아와 오세티야의 갈등은 수면 아래서 수십 년 숨죽여 이어진다.
2008년 전쟁으로까지 치달은 조지아-오세티야 분쟁에서 이념이라는 명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지난 세기 민족 갈등은 이념이라는 탈을 썼을 뿐, 그 탈이 벗겨진 지금에 와서는 상호간 증오와 이기주의의 맨살만 드러났다. 여기에 러시아 팽창주의가 개입되면 소수민족 갈등은 제멋대로 유린되고 상처는 더 깊어진다.
▲ 러시아, 우크라이나, 조지아 ⓒ 구글 지도
2022년 우크라이나 사태도 본질은 매한가지다. 그럼에도 조지아와 달리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유는 이곳에서의 러시아 팽창주의가 서방의 그것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지아 사태 당시 러시아의 총구가 남쪽을 향했다면,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총구는 서쪽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 차이점이다.
결국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은 러시아 팽창주의·미국-서유럽 팽창주의·우크라이나 민족 갈등, 이렇게 세 요소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는 조지아의 경우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더 사활을 걸고 있고, 서방세계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우크라이나 국민은 더 큰 위기에 노출돼 있는 것이다.
푸틴은 절대악인가
국제관계에서 절대악을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선악을 결정할 절대 지상권(至上權)이 국제사회에는 없기 때문이다. 해당 국가에 대해 국제법, 무역보복 등을 통한 제재 수단이 없지 않지만 고립을 감수하고 버티면 그만이다. 지금 러시아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한 예다.
그럼에도 지구상 국가의 절대다수가 인정하는 공동 가치가 수렴되면 제한적이나마 불의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전쟁의 책임이다. 선제적 무력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 푸틴이 지배하는 러시아가 구체적 명분 없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선제적 무력행사를 한 사실은 재고의 여지없는 사실이다.
▲ 지난 17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키이우 외곽에서 발생한 폭격 후 창고 주변에서 컨테이너를 옮기고 있다. ⓒ AP=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지속적인 위협"을 받고 있으며 "안전함을 느끼며 발전하고 살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으로 삼았다. 그는 군사행동의 목표로 우크라이나 정부의 괴롭힘과 집단 학살 위협에 노출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비무장화, 비나치(非Nazi)화" 하는 것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부터 어떤 위협을 받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못했다. 우크라이나가 어떤 명분으로 외세에 의해 비무장화 될 수 있는지, 어떤 근거로 나치화됐다고 규정할 수 있는지도 밝히지 못했다. 요컨대 푸틴 대통령은 타국에 대한 침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국제사법재판소(ICJ)가 러시아의 국제법 위반을 판결한다 해도 집행기관인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집행을 거부할 수 있다.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인 만큼 러시아의 패소 판결이 나더라도 그에 대한 집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집행 가능 여부와 관계없이 러시아의 전범국가 판결은 불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푸틴 대통령은 왜 그토록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을까? 분명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초기에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무력화시키고 국제사회의 중재를 거쳐 유리한 입장에서 실익을 챙기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과거의 예처럼 전쟁 후 푸틴 대통령에 대한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도 확고해지리라 예상했을 거다.
푸틴 대통령이 구상한 이번 전쟁은 분명 '무리한' 전쟁이 아니었을 거다. 그의 구상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및 유럽연합 가입 포기를 이끌어냄으로써 우크라이나를 확실한 완충국가(Buffer State)로 보장받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을 러시아의 직접적 영향권에 넣고자 했을 것이다.
▲ 2022년 2월 21일(현지시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대국민 연설을 하고 있다. ⓒ AP
하지만 전쟁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고 국제사회의 반발은 예상을 넘어 러시아에 점점 불리해지고 있다. 러시아 국민들의 지지 또한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2008년 조지아 개입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쟁과 달리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 경제를 빠른 시간 만에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항복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러시아가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이미 상당히 제한돼 있다.
러시아의 계획이 실패로 귀결된다면 그것이 곧 서방세계의 승리를 의미할까? 사실 이번 전쟁의 발발 자체가 이미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외교적 실패를 명시적으로 확인해준 것에 다름 아니다. 미국과 서유럽의 이른바 '동진 정책'은 이미 출발부터 잘못된 구상이었다.
미국과 서유럽의 잘못된 구상
서방세계의 '동진정책'은 세 축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군사적 차원.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NATO) 회원국 확대를 통해 점차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늘려왔다. 장기적으로는 유럽 자체 방위 기구(유럽군) 창설을 통해 미국의 부담을 절감하면서 지속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이 계획은 동아시아의 쿼드(미국-일본-호주-인도) 구상과 함께 미국의 장기적 안보정책 전환과 연결되며 유럽의 독자적 방위체계라는 오랜 염원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를 유럽의 일부로 복귀시키겠다던 더 큰 전략과 심각한 모순을 빚는 결과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 보리스 옐친은 실제로 러시아를 서구화시켜 '유럽 속의 러시아'를 만들려 했다. 그는 러시아 국영기업들을 빠른 속도로 민영화시켜 자본주의 체제로 이동하려 했지만 통제 없는 국부 유출만 부추기면서 신흥 재벌(올리가르히)들의 배만 채웠을 뿐 러시아 경제를 더 심각한 위기 속으로 빠져 들게 했다.
▲ 28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러시아 화폐인 루블화를 정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금융 제재가 발표되고 러시아가 핵 위협 카드를 꺼내면서 러시아 화폐 가치가 30% 가까이 폭락했다. 이날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날 역외 시장에서 1달러당 루블화 환율은 장중 117.817루블을 기록하며 전 거래일 종가 대비 약 28% 하락했다. 미국과 유럽은 전날 러시아 중앙은행을 제재하고 일부 러시아 은행들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퇴출하기로 합의했다. 2022.2.28 ⓒ 연합뉴스
그러는 동안 서방세계는 강박적으로 소비에트 경제 해체만 기다렸다. 러시아의 건전한 자본주의 세계 합류에는 관심이 없었다. 푸틴 체제의 러시아가 유럽행을 포기하고 독자적 세력을 만들어가는 데 서방세계의 책임이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리고 이것이 서방세계 '동진정책'의 두 번째 축인 경제적 차원에서의 오류에 해당한다. 서유럽의 경제적 팽창주의는 유럽연합(EU) 회원국을 늘리는 방향으로 귀결되지만 푸틴의 러시아에 위기감을 자극하면서 결과적으로 심각한 안보 위협을 키우는 결과를 낳게 된다.
서방세계 '동진정책'의 세 번째 축은 정치적 차원으로 자유 민주주의 전파가 이에 해당한다. 군사적, 경제적 팽창정책이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 구체적 조직을 통해 이뤄졌다면 정치적 차원의 민주주의 이식은 다소 추상적 이념의 문제에 해당한다. 그리고 추상적 이념의 문제는 자칫 착시 효과를 일으키며 상대국에 위화감을 주기도 한다.
미국의 적성 국가들 또는 라이벌 국가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설교가 국가 전복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이데올로그들은 친미주의와 민주주의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리는 데 소홀히 한다. 또는 실제 그들도 그렇게 믿는 듯하다.
그런 시각이 굳어지면 실질적 민주주의 이식 여부와 관계없이 친미 체제가 들어서는 것이 곧 민주주의라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친미 또는 친서방(親西方) 정책이 반드시 민주주의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은 남아메리카의 많은 국가에서도 확인된다.
옐친 대통령이 민주적 절차도 무시하고 심지에 탱크를 동원해 국회의사당에 포격을 가할 때도 소비에트 제거라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러시아 신흥재벌(올리가르히)이 온갖 부패와 부당한 혜택 속에서 국가의 이익을 좀먹을 때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러시아 국민들은 친미 또는 친서방이 자신들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으며 과거 소비에트 대제국 시대(그들에게 이념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의 영광이 그리울 뿐이다. 그리고 그들 중 다수에게 푸틴이라는 이름은 그 영광을 재현해줄 영웅에 다름 아니다. 이처럼 서방세계의 서툰 팽창정책들은 러시아의 재활을 도와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그들의 심각한 위협으로 다시 맞이하게 된 것이다.
대통령 영웅 신화
러시아와 서방세계의 팽창주의가 하필 우크라이나에서 충돌한 이유는 물론 지정학적 이유가 꼽힌다. (앞선 기사 <끔찍한 패륜, 푸틴식 '하이브리드 전쟁'의 처참함> (http://omn.kr/1wad7) 참조) 서쪽으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다. 민족적으로도 서쪽은 서슬라브족, 동쪽은 동슬라브족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국가에는 특히 정치적, 외교적 신중함이 필요하며 그것은 국가의 명운에 절대적 영향을 미친다. 과거 야누코비치 대통령 당시의 급진적 친러 성향이 대규모 국민 저항을 야기했듯이, 현재의 젤렌스키 대통령의 위험하리만큼 급진적인 친서방 태도는 러시아의 침공을 야기했다.
▲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17일(현지시각) 러시아의 침공으로 인해 부상을 입고 한 병원에 입원 중인 키이우 주민들을 방문하고 있다. ⓒ AFP=연합뉴스
전쟁이 발발하고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이어지고 있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대통령은 오히려 영웅이 되어 있다. 러시아의 전범 행위는 물론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무능한 서방 국가들은 자신들의 대외정책 실패를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흔히 그래왔듯 영웅 신화를 만들어 자신들의 과오를 덮으려 한다.
대통령이 전쟁에서 도망가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영웅적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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