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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11일 금요일

'언론 마피아'와 평생 투쟁, 불꽃같은 격정의 80년을 기억하다


[기고] 故 오홍근을 추억하다  

장현철 (전 언론인)  |  기사입력 2022.03.12. 11:10:49 최종수정 2022.03.12. 11:17:03 


"후회는 없어. 이만하면 잘 끝내는 거지. 난 돌아가지 않을거야."

1999년 4월, 취재원으로 만난 오홍근은 간명하고 직설적인 어법을 구사했다. 말은 꾸미지 않고 표현 방식은 거침이 없었다. 사회부 기자를 오래한 탓인지 경찰서 사건 냄새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사건기자의 근성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취재원으로 첫 만남 이후 30년 가까이 지켜본 그는 첫 인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투박하고 직정적인 사람이었다. 싫으면 곧바로 '아니오'라고 말하되 뒤돌아서 뒤통수치거나 꼼수 부리는걸 경멸했다. 무원칙하게 중심을 향해 가로지르기 보다는 원칙을 지키며 주변부를 고수하는 고집과 집요함이 느껴졌다.

그는 당시 중앙일보 논설위원으로 근무하던 중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한 홍준표 의원이 아무 근거도 없이 '김대중 대통령에 의한 정치보복'을 주장한 것을 비판하는 칼럼을 썼다가 회사측이 게재를 거부하자 사표를 내고 신문사를 떠났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기자의 바른 소리를 신문에 실을 수 없다 하는 것은 신문사를 떠나라는 의사 표시라고 봤다"고 말했다. 단순히 '몰고' 때문에 떠난 것이 아니었다. 오홍근의 '언론관'과 그의 '성격'은 이 에피소드에 잘 드러나 있다.

그가 2012년 1월 5일자 <프레시안> 칼럼에 밝힌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는 에필로그가 있다. 필자가 중앙일보를 떠난 그해 9월,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이 보광그룹 조세포탈 혐의로 구속 된다. 바로 이어 중앙일보 김영희 대기자가 IPI(국제 언론인협회)에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김영희 대기자가 "97년 대선에서 중앙일보가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며 선거법 위반 사실을 실토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섞어놓았다. 

이런 얼토당토않은 대목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기반인 전라도 출신의 직원 3명이 화를 내며 사임하면서 사태는 악화 되었습니다. 이들 3명은 지역 차별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전라도 출신 3명은 언론계에 알려져 있듯이 필자와 박준영 씨(현재 전남지사), 고도원 씨('고도원의 아침편지' 필자) 등을 지칭한다. 분명한 것은 3명 모두'지역 차별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화를 내' 사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기자 김영희 씨가 곤궁한 처지를 모면해 가기 위해 거짓을 말한 것이었다. 지역감정 조장이었다. 용서 받을 수 없는 행패였다." 

그가 본 것은 '거대 언론사'의 이면이었다. 그 안에서 겪어왔던 총체적 부조리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30년 몸담은 애정어린 회사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온 이유는 단순히 '홍준표 비판 칼럼'에 대한 반발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포악한 정권에선 비굴하고 온건한 정권에선 교활한 한국 주류 언론"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88년 '언론인테러' 사건으로 '회칼테러'를 당했던 그는 사건 당시 피묻은 출근길의 양복을 훈장처럼 여기며 살았다. 국정홍보처장 재임 시절 한국언론의 자유를 논하며 국제언론단체 임윈진들에게 선혈이 낭자한 자신의 피묻은 양복을 보여주며 한국 언론상황을 설파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군인들에 의해 길이 34센치, 깊이 4센치의 자상 후 남겨진 허벅지 흉터는 그의 오랜 자부심이자 존재의 출발점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1988년 '오홍근 회칼테러' 사건 관련 긴급 시민 토론회에 참석해 이를 규탄했다. 훗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장차관 워크숍에 오홍근을 초청해 언론 개혁의 방안에 관한 강연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1988년 9월 9일 오후 7시, 서울 종로4가 종로성당에서 열린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의장 문익환 목사) 주최 '군사문화 종식과 백색테러 추방을 위한 시민 공개 토론회'에 참석한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이 발언하고 있다. 노무현사료관은 "이날 토론회 참석자들은 군사문화종식과 백색테러 추방을 위한 시민토론회를 갖고 오홍근 씨의 테러와 우리마당 피습사건의 진상규명, 군사문화 청산, 양심수의 전원석방 등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고 기록했다. ⓒ노무현사료관

테러 사건 이후 그가 평생을 껴안은 화두는 결국 '언론'이었다. 현역 군인들에게 식칼 테러를 당하며 직접 목도한 공권력의 흉악무도한 보복은 그에게 두려움 보다 저널리스트의 의무와 책임을 깨닫게 하는 실증적 경험이었다. 그는 한홍구 교수, 김종대 전 의원과 대담에서 사건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오홍근 : 우리 사회를 지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역할을 한 게 군사문화죠. 문제는 핵이 되는 깃발 든 놈은 얼마 안 되는데 바람잡이들이 굉장히 많은 겁니다. 그게 이제 카르텔을 일으켜서 주변에서 계속 동조해주고 그들이 기득권 세력이 되어서 이권을 위해서 세력을 형성하지 않습니까? 군사문화가 적폐에 이르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게 보수 정당과 정치검찰도 있지만 언론도 빼놓을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른바 언론'이라고 그럽니다. 

이른바 언론들의 공이 혁혁합니다. 그들이 군사문화하고 어깨동무하고, 정치권력하고 야합하고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단물 빨아먹었거든요. 한 선생께서 고생 많이 했냐고 저한테 물어보셨죠. 사실 아픈 것은 몸보다도 마음입니다. 칼을 맞고, 오십몇 바늘을 꿰메고, 입원하고 지팡이 짚고 다니고 이런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건이 딱 터지고 한 달쯤 병원에 있다가 퇴원을 하니까 회사 분위기가 이상하더라고요. 삼성 비서실에서 오홍근 때문에 삼성 망하게 생겼다는 이야기가 들려요. 그때가 한창 방산 수주할 때에요. 1988년의 일입니다. 

김종대 : 당시 F-16을 도입하는 한국형 전투기 사업, 즉 KFP 사업입니다. 

오홍근 : 그러니까, 삼성 비서실에서 볼 때는 이놈이 그냥 고춧가루를 뿌린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 중앙일보 사장이 서울 시내에 수도권에 있는 장군들을 5~6명씩 그룹핑해서 매일 저녁 냉면그릇에다 맥주 소주 붓고 술대접을 하면서 돕니다. 그리고 그 뒤에 얘기를 들어보면 '저희가 가해잡니다. 이해해주세요.' 이랬다는 거죠? 

한홍구 : 아, 거기까지 갔어요? 저는 중앙일보, 삼성 쪽에서 굉장히 곤혹스러워서 오 국장님을 한직으론 돌렸다는 얘기까지는 들었지만. 

오홍근 : 그 분이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이 양반이 그러고 나서는, 신문사 사장이 얼마나 속이 불편했겠어요. 수행직원이 만취한 이 양반 어깨를 끼고 차를 태워요. 그러면 차를 타면서 “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야?” 하면서 운다는 거지. 내가 그 얘길 듣고 어떻게 가슴이 아프던지. 

(프레시안, '오홍근 회칼테러 30년, 군사문화는 병영으로 돌아가야') 

언론개혁 진영의 앞줄에 서지는 않았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주류 언론과 고강도 싸움을 펼쳤다.오홍근이 향한 타겟지점은 두가지였다. 권력과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득권 주류 언론의 사주, 마피아 체제를 구축한 제도 정치권의 패거리 독식 문화를 늘 겨냥했다. 특히 대학 동기인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 <프레시안> 등 매체에 연재 칼럼을 게재하며 나홀로 지속적인 게릴라전을 펼쳤다. 다수의 주류언론인들을 국정 요직에 기용하며 언론과 역대 정권 최고의 친화적 관계를 유지하던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오홍근은 90여회의 칼럼을 싣고 4대강,민간인사찰 등 민감한 주제에 과감한 비판을 가했다. MB정부를 비롯한 보수정권에게는 눈엣 가시같은 존재였다. 

"마피아 시스템'의 해악은 무엇보다도, 옳고 그름과는 상관없이 철저하게 이권을 독차지하는 집단에 의해, 불공정하게도 빼앗기기만 하는 쪽이 있다는 점이다.마피아에 '착한' 마피아는 없다. 그저 배타적 이익을 독차지하기 위한 냉혈한(冷血漢)들의 잔인무도한 범죄 집단일 뿐이다."( '그레샴 법칙의 나라'-빼앗긴 이명박 5년의 기록,오홍근 저,이담북스 출간).

마피아식 기득권적인 권력체제를 그는 생래적으로 거부했다.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홍보처장이었지만 언론자유와 공정보도에 무게를 두고 언론사주들과 긴장을 유지했다. 지금 생각하면 간담이 서슬해지는 언론사주 구속까지 이루어진 김대중 정부에서 오홍근은 타협을 모색하던 권력의 이너서클과 물과 기름처럼 어울리지 못했다. 소송,반박성명,언론중재위 제소 등 언론을 상대로 타협 없이 직공을 퍼붓던 그에 대한 권력 중심부의 시선은 싸늘했다.4개월 단명으로 끝난 청와대 공보수석직은 권력의 아웃사이더였던 그에게 애초부터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을지 모른다.

한 사람의 생애는 명과 암이 교차한다. 오홍근의 정치권 진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두 차례의 국회의원 출마는 실패로 끝났고 한때 안철수와 함께 새정치를 표방하며 손 잡았지만 아름답지 않게 헤어졌다. 그에게 야심을 뒷 받침할만한 잔꾀와 기교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교태'나 '애교'를 몰랐고 정치공학적인 셈이 부족했다. 유시민이 말한 '정치의 비루함'을 감내하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수를 못 부리는데 무슨 수로 정치권에서 버틸수 있었겠는가.

그는 정치공학은 약했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은 뛰어났다. 오홍근은 전주고 은사였던 시조시인 신석정이 아끼던 문학도였다. 평생 글의 정교함을 추구했고 글의 힘을 믿었다. 칼럼을 구상하고 쓰는 과정을 힘겨워했지만 이를 저널리스트의 책무이자 즐거움으로 받아들였다. 

오홍근은 군사문화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그러나 굴하지 않았고 군사문화로 대표되는 기득권 체제의 대표적인 저격수의 살을 선택했다. 우회로 없이 직진만을 거듭하여 이문이 남지 않는 삶이었지만 위 보다는 아래를 늘 살피던 따뜻한 사람. 오홍근을 보내며 그의 전 생애를 휘감은 진실된 언론에 대한 옹골진 고집과 쉼 없던 열정을 반드시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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