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뇌를 리셋(reset)할 수 있을까? 만약 사람의 뇌를 리셋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뇌는 기억을 저장하고 경험을 축적하는 장치다. 기억과 경험은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만약 뇌를 리셋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기존의 인격을 완전히 잃는다. 백지처럼 하얗게 변한 뇌는 그 위에 무엇을 그리느냐에 따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된다.
그래서 뇌의 리셋은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만 가능하다면 공상과학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 병기도 만들어낼 수 있고, 특정 신념에 집착하는 추종자들도 생산(!)할 수 있다.
실제 이 실험을 한 학자가 있었다.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라는 뇌 리셋 과정을 연구한 캐나다의 정신의학자 도널드 이웬 카메론(Donald Ewen Cameron, 1901~1967)이 그 주인공이다.
CIA의 지원을 받은 뇌 리셋 실험
뇌의 신경을 잘 못 건드리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한다. 기억을 잃거나 뇌의 수준이 유아기로 돌아가는 퇴행 현상을 겪는 것이다. 하지만 카메론은 기억상실과 뇌의 퇴행을 부작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뇌를 유아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야말로 뇌의 리셋 과정이라고 믿었다. 유아기의 뇌는 백지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카메론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찾은 환자들에게 무지막지한 전기쇼크를 가했다. 실험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그는 다양한 약물까지 동원했다.
그의 실험은 마침내 성공을 거뒀다. 카메론은 뇌가 리셋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상을 주입한 것이다. 우울증 환자에게는 “당신은 좋은 어머니이자 아내입니다. 사람들은 다 당신과 친해지고 싶어합니다”라는 테이프를 반복해서 들려주었다. 환자는 백지화된 뇌에 새로운 긍정 마인드를 빨아들여 완전히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재탄생했다.
카메론이 실험을 진행했던 때는 1950년대, 동서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이 실험에 누가 가장 큰 관심을 보였을까? 바로 미국 CIA였다.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중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 병기를 만들어내는 공상과학 스토리가 꽤 있다. 그런데 그 영화 같은 일이 실제 벌어진 것이다.
CIA는 새로운 고문 기법을 개발하기 위해, 혹은 자본주의에 충실한 새로운 인간형을 조작하기 위해 카메론 박사의 연구를 지원했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였던 카메론은 기꺼이 CIA의 손을 잡았다. 이 끔찍한 사실은 미국에서 정보공개법이 제정되면서 온 세상에 알려졌다.
세계적 저술가이자 진보적 사상가인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이 이야기를 자신의 책 『쇼크 독트린』에 소개하면서 신자유주의가 쇼크를 이용해 사람들을 개조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이 엄청난 재난으로 민중들의 뇌를 백지 상태로 만든 뒤 신자주유주의 사상을 주입한다는 것이다. 클라인의 이야기를 잠시 들어보자.
“쇼크 독트린 신봉자들이 보기에 마음껏 그릴 수 있는 백지를 만들어내는 위대한 구원의 순간은 홍수, 전쟁, 테러 등의 공격이 일어날 때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약해지고 육체적으로 갈피를 못 잡는 순간이 오면, 이 화가들은 붓을 잡고 자신들이 원하는 세상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재난자본주의 복합체는 군산복합체보다 활동반경이 넓다.”
재난을 이용하는 신자유주의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치는 바람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다. 미국 언론은 뉴올리언스에 약탈과 강간이 횡행한다며 공포를 조장했다. 대통령 부시는 공포를 배가시키기 위해 뉴올리언스에 주 방위군을 투입했다.
허리케인이 할퀴고 간 도시에 주 방위군이 총을 들고 돌아다니면 사람들의 머리는 쇼크와 공포로 하얗게 변한다. 이때 자본은 이곳에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 나간다.
“이곳을 빨리 복구해야 공포와 혼란이 끝난다. 가장 빨리 도시를 복구하는 방법은 자본에게 복구를 일임하는 거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자본에 모든 것을 팔아라!”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실제 복구단에서 가장 눈부신 활동을 한 이들은 부동산업계의 거물들이었다. 당시 부통령 딕 체니(Dick Cheney)는 자신이 회장을 맡았던 할리버튼의 계열사에 수백 만 달러의 재건 공사를 안겨주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재난 이후에 뉴올리언스의 공립학교가 대부분 사라졌다는 점이다. 폐허가 된 공립학교 자리는 자본을 앞세운 사립학교의 차지가 됐다. 신자유주의를 열렬히 칭송하는 미국기업연구소(AEI,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는 “루이지애나의 자유주의자들이 몇 년이나 열망했던 일(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사립학교 세력을 확장하는 일)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하루 만에 해냈다”며 감격해 했다.
2004년 12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 인근 해상의 쓰나미로 22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은 “쓰나미로 200만 명이 빈곤에 빠질 것이다”라며 공포를 조장했다.
사람들의 뇌는 쇼크에 백지 상태가 돼버렸다. 신자유주의는 이 백지 위에 “재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서야만 지역경제가 회복된다”는 테이프를 틀어댔다. 그 결과 스리랑카 해변의 어민들은 고향에서 쫓겨났고, 그 땅은 세계적인 리조트 회사의 손에 넘어갔다.
심지어 클라인은 1998년 한국이 겪은 외환위기도 쇼크 독트린의 일환이었다고 주장한다. 미국 월가가 인위적으로 한국과 아시아 국가의 금융시장을 박살냈다는 것이다. 한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가 부도 사태라는 쇼크를 경험했다. 국민들의 머리는 백지가 됐고, 신자유주의는 곧바로 한국을 장악했다. 자본시장 완전 개방과 금융 자유화가 이뤄진 때가 바로 이 시기였다.
재난을 시장의 손에 맡길 수 없는 이유
재난은 벌어지지 않아야 하고, 우리는 재난을 예방해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재난이 벌어졌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정신줄을 꽉 잡아야 한다. 한 사회의 미래가 쇼크 상태에서 극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재난이 모든 사회에 신자유주의적 재앙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전 세계 민중들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보다 평등하고 보다 민주적인 세상을 꿈꿨던 이들의 헌신이 있었다.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재난을 딛고, 백지 상태의 사람들의 머릿속에 복지국가라는 그림을 그렸다.
최저임금제도 등 놀라운 복지제도가 속속 도입됐다. 미국은 이런 새로운 사상 덕에 베트남 전쟁 직전까지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등한 대번영의 시기를 일궈냈다. 유럽도 대공황을 계기로 시장만능주의를 버리고 탄탄한 복지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영광의 30년’을 만들어 냈다. 재난 이후 어떤 세상이 만들어지느냐는 재난을 돈벌이에 이용하고자 하는 자본과, 평등하며 민주적인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진보의 힘의 크기에 달렸다.
세월호 참사 5주기를 맞아 우리는 그 슬픈 기억을 다시 떠올린다. 참사의 충격 위에 대한민국은 촛불혁명이라는 새롭고 위대한 길을 선택했다. 시장이 아닌 공공의 복원은 강원도 산불이라는 재난을 훌륭히 극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래서 재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일은 시장이 아닌 공공의 힘에 맡겨져야 한다. 돈벌이가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보다 안전한 세상을 향한 리셋의 계기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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