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 따라 화엄경 불밝힌 서우담
화엄경 59만자 한글음 단 서우담 대표
» 화엄경 한자 59만자에 한글음을 붙인 서우담 대표. 그가 작업한 컴퓨터 바탕화면 사진은 그의 스승 탄허 스님이 제3공화국 당시 청와대에 초청 받아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가 경영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을 청와대에서 찍은 것이다. 탄허는 1970년대 대학교수들의 초청으로 고려대에서 3개월간 강의를 해 서울시내에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박정희 독재를 춘추전국시대의 악덕 군주들을 빗대 비판했는데, 그로 인해 긴급조치가 발동되면서 강의가 중단됐다.
서화담 16대손으로 어려서 개구져
고향사람들 “저 놈 중됐단 말 못 믿어”
대종사 탄허 스님 알아보고 거둬 출가
16년 뒤 환속하고도 숙겁의 인연
화엄학연구소 이어받아 탄허 책 내
유불선 한문 원전 줄줄 외는 ‘박학’
어느 날 두 스님 찾아와 떠보며 무례
“어찌 마음 잃고 찾을줄 모르나” 일갈
며칠 뒤 다시 와 사과하며 속말
“한자 몰라 경 한권 제대로 못봐…”
애잔한 마음에 최근 3년간 독음 몰두
“내 일은 여기까지, 출간은 다른 인연이”
검사들의 성추행이 잇따라 폭로되면서 ‘미투 운동’이 번져가고 있다. 어찌 검찰뿐이겠는가. 승려들까지 은처자 의혹이 끊이지 않는 시대다. 하지만 권력과 부를 쥐고 있다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율곡 이이가 평양 원접사로 갔을 때였다. 기생이 수청을 들기 위해 방에 들었다. 율곡도 혈기 왕성한 때여서 초저녁이 되자 음심이 심히 동했다. 그러자 율곡은 좌정을 하고 “숙헌(율곡의 자)이, 숙헌이!” 하고 부르며 음심을 가라앉혔다. 율곡은 이렇게 자정과 새벽에 세 번 동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을 불러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탄허 스님(1913~83)은 제자들의 일탈을 미리 막으려 이런 예화를 들어 ‘성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 서울 인사동 서대표가 탄허스님 사후에도 지켜온 화엄학연구소에 걸린 탄허스님의 글씨. <순자>의 말이다. 하늘 아래 두 길이 없고 성인에게는 두 마음이 없다는 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천하무이도 성인무양심)
노무현 김근태 이용훈 등 드나들어
서울 종로구 인사동 건국빌딩의 화엄학연구소에서 ‘도서출판 교림’의 서우담(79) 대표가 탄허의 숨은 일화를 들려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탄허의 분신이다. 1960년 21살 때 오대산 월정사로 출가해 1976년 절을 떠날 때까지 탄허 스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다. 서 대표는 애초 출가할 때부터 끝내 절집에서 머물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비록 환속했지만 탄허와의 숙겁의 인연은 이어졌다. 그는 탄허의 속가 딸과 결혼했다. 그 딸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탄허가 출가해 유복자나 다름없이 자랐다. 서 대표는 탄허가 세상을 뜬 이후에도 탄허의 육필원고를 정리하고 교열하고 출판하는 것을 필생으로 업으로 삼았다. 서 대표가 실무를 맡은 이 연구소에서 탄허는 말년에 춘성·고암·서운·경산·청담 등 당대의 고승들을 만나곤 했다. 또 정·관·법조·경제계의 거물들도 탄허에게 ‘길’을 묻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탄허가 세상을 뜬 뒤에도 서 대표는 지금까지 34년을 줄곧 이 연구소를 지켰다. 노무현·권노갑·김근태·임채정·이용훈 등 정치·법조인들도 이곳을 드나들었다. 신영복의 감방 스승인 한학자 노촌 이구영(1920~2006)도 이 건넌방에 사무실을 두고 있어서 이 방을 드나들며 고담준론을 나눴다.
탄허도 없이 서 대표가 외롭게 지키는 이곳에 왜 그들이 찾았을까. 서 대표의 얼굴은 어려서 앓은 마맛자국으로 얽어 있다. <삼국지>에서 제갈공명과 같은 재주를 지니고도 외모 때문에 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봉추 선생 방통’의 처지였을까. 유불선에 통달한 당대의 천재 탄허를 잃고 허전해하던 이들은 서 대표의 ‘박학’을 들으며 아쉬움을 달랬다. 본명이 ‘서상기’인 서 대표는 전남 나주에서 ‘조선의 천재 유학자’ 서화담의 16대손으로 태어났다. 그런데 탄허가 한문 경전에 대한 그의 비상한 기억력과 이해력을 보고는 ‘서화담이 다시 왔다’는 뜻의 ‘우담’(又潭)이라고 부른 뒤부터 ‘서우담’이 됐다.
» 서대표가 출가해서 스승과 함께 전남 해남 대흥사에 방문해서 찍은 사진. 두번째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탄허 스님이고, 맨 아래 왼쪽에서 첫번째가 서대표다.
원고지 6만장에 국한문 혼용 해석
서 대표는 전남대 법대 재학중 처음엔 해인사로 출가하러 찾아갔다고한다. 그곳에서 대학 선배인 법정 스님을 만냤다. 법정 스님은 그에게 "여기서 10년 배울걸 오대산 탄허 스님에게 가면 1년만에 해마칠수 있다"며 탄허 스님에게 출가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는 법정의 충고대로 오대산으로 가 탄허에게 몸을 의탁했다. 그는 어려서 개구진 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출가했다고 했을 때 고향 사람들이 ‘천하 사람이 다 중이 되어도 저놈이 중 됐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런 서 대표에게 자신을 알아봐주고 거둬준 탄허는 그야말로 구세불이었다.
탄허는 20대에 이미 당대의 고승들을 상대로 <화엄경>을 강의할 정도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또 사회에서도 자신보다 10년도 더 연상인 당대의 철학자 함석헌(1901~89)과 `자칭 국보‘ 양주동(1903~73)이 배울 정도로 고준한 경지를 거닐었다. 서 대표도 그런 탄허를 시봉한 덕분에 당대의 고승들 뿐 아니라 양주동, 이은상 같은 당대의 거목들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인재들로 늘 문전성시던 화엄학연구소는 탄허의 열반 직후 적막강산이 됐다. 이는 그가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그는 스승이 아직은 너무나 할 일이 많다고 여겼기에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스승의 유촉을 받들기 어려웠다. 그는 스승이 하루라도 더 지상에 머무기를 바라며, 열반 전 3개월간 잠 한숨을 자지않고 곁을 지켰다. 스승의 다비식을 치른뒤엔 3일간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잠에서 깨고 보니, 이불과 온 방안이 피범벅이었다. 서 대표의 눈과 귀와 코에서 나온 피였다. 서 대표는 "스님을 보내고 난 뒤 말로만 듣던 피눈물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는 스승의 유지를 받들기엔 힘이 미력했다. 그토록 화엄경을 좋아해 평생을 화엄학 연구에 바치고, <화엄경합론>을 쓴 당나라 이통현 장자의 방 이름을 따 월정사 조실채도 방산굴에라 명했던 스승이 목숨을 걸고 해석해 마친 <신화엄경합론>조차 계속 발행할 힘이 없었다. <화엄경>은 석가모니가 대각 후 21일 동안 설한 불교의 정수로, 이를 이해하지 못하자 하나하나 설명을 덧붙인 것이 팔만대장경이 됐다고 전한다. <화엄경>은 한자로만 100만자에 이르러 누구도 해석할 엄두를 내지 못한 경전이었다. 탄허는 이를 무려 6만여장의 원고지에 국한문 혼용으로 해석하고 현토를 붙여 <신화엄경합론> 23권을 냈다. 그런데 그 책마저 동나버린 것이다.
서 대표는 그즈음 꿈에 탄허가 나타나 “책이 떨어졌으면 만들어야지 뭐 하고 있느냐”고 하자 “책 만들 돈이 어디 있느냐”며 “그깟 책은 내서 뭐 하냐”고 항변했다고 한다. 꿈을 깨고 나서 그냥 장난삼아 지인인 석불암 비구니 혜윤 스님에게 전화를 해 “돈이 없어 책을 못 내고 있다”고 하자 그다음날 절 지으려 모아둔 돈이라며 5천만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래서 <신화엄경합론>을 다시 찍었고, 책을 팔아 그 돈을 갚아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최근 3년간 불철주야 다시 <화엄경>을 놓고 씨름했다. 탄허 스님은 한자에 너무 밝아서 그 방대한 책을 해석하면서도 음은 붙이지 않았다. 가령 ‘모든 이치를 꿰뚫어 본래 마음을 밝힌다’는 ‘通萬法 明一心’으로 해놓을 뿐 ‘통만법 명일심’이란 한글 독음을 달지 않았다. 한문세대엔 아무런 문제가 안 됐지만 승려들조차 한자를 모르는 이가 태반인 지금에 와서는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접근조차 할 수 없다. 서 대표는 한자로 59만여자에 모두 음을 붙였다. 이 작업은 한 스님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 서대표가 도서출판 교림에서 펴낸 탄허 스님의 책들. 그는 탄허스님의 육필원고를 정리해 출간하는데 인생을 바쳤다.
“경 좀 봤나…참선 했나…경계 아나?”
» 한글음을 붙인 화엄경어느 날 두 스님이 찾아와 ‘경을 좀 봤느냐’고 물었다. ‘눈가림으로 좀 보았다’고 했더니 또 ‘참선도 했냐’고 물어 ‘선방에서 좀 졸아봤다’고 답했다. 그러자 한 스님이 턱밑에 고개를 들이밀고는 ‘하늘도 땅도 녹아지고 천지 만물이 녹아지는 경계를 봤는데, 당신도 그런 경계를 아느냐’고 대차게 물었다. 그러자 서 대표는 주먹으로 얼굴을 날려버렸다. 그러고는 “맹자가 ‘인유계견방 즉지구지 유방심 이부지구’(人有鷄犬放 則知求之 有放心 而不知求)라 했다.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찾을 줄 알면서 어찌 마음을 잃어버리고는 찾을 줄 모르느냐’는 것이다. 그 마음을 어디 두고 어디로 찾아 헤매고 다니느냐”고 일갈했다. 3일 뒤 그 스님이 다시 찾아와 전날의 무례를 사과하며 속말을 했다. ‘30년 넘게 선방을 다녔지만 무식해서 한자를 몰라 경 한 권을 제대로 못 봤는데, <화엄경> 읽어보는 것이 소원이니 한글 음을 달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애잔한 마음이 들어 불철주야 3년간 무려 59만여 한자에 모두 음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내 일은 여기까지”라고 한다. 이 불사가 진정으로 중생을 위한 것이라면 또 어느 인연이 나타나 출간이 되리라는 거다. 그는 유불선 한문 원전을 줄줄 외는 박학임에도 그 현학을 놓고 무식자처럼 껄껄 웃었다. “<화엄경>은 불교의 진수라 어렵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지금까지 읽을 수 없어서 그랬지 읽기만 하면 남녀노소 유무식을 떠나 누구든 그 진리에 다가설 수 있을 만큼 쉽다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