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북한과 미국이 실제 마주 앉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조율이 필요하다. 북미 모두 대화의 필요성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지만, 그 전제조건에 대해서는 생각을 달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 동결→완전한 핵 폐기’ 2단계 접근법,
현실에서 통할까?
문 대통령은 지난 25일 강원도 평창 모처에서 김영철 부위원장 등 북한 고위급 대표단을 비공개로 만나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문제의 본질적 해결을 위해서라도 북미 대화가 조속히 열려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문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구상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과 미국에게 한반도 비핵화는 북미대화의 목적지이기도 하다.
문 대통령이 제시한 방법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청와대는 말을 아끼고 있지만, 문 대통령이 그동안 언급해온 구상과 현실을 감안하면 ‘단계적 방법론’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동안 문 대통령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북핵 동결은 대화의 입구가 되고 출구는 완전한 핵 폐기”라며 ‘핵 동결→완전한 핵 폐기’라는 2단계 접근법을 제시해왔다.
이는 북한이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중단하고 비핵화 논의를 위한 대화의 장으로 나온다면, 미국 등 국제사회가 단계별 상응 조치를 협의해 나가겠다는 의미다.
문 대통령은 작년 6월 기자간담회에서 “최소한 북한이 추가적인 핵·미사일 도발을 하지 않고 핵 동결 정도는 약속을 해줘야 본격적인 핵 폐기를 위한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핵 동결을 핵 폐기를 위한 대화의 입구라고 생각한다면 동결에서 폐기에 이를 때까지 여러 가지 단계에서 서로가 ‘행동 대 행동’으로 교환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도 언급했듯 이러한 구상이 실현되려면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주지사들과의 연례회동에서 “우리는 오직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만 대화하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도 북한의 분명한 입장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와 관련해 북한은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온 조선신보는 최근 “남북 관계개선이 이어지는 동안, 북한이 핵과 미사일 시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밝혔다. 북한은 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던 작년에만 해도 핵·미사일 시험을 이어갔지만, 올해는 단 한 차례도 하지 않고 있다.
핵 동결을 선언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는 미국에 대한 자위권 행사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할 수 없다’던 북한의 기존 입장에 비춰보면 한결 완화된 분위기로 읽힌다.
지난 2007년 8월 3척의 미국 핵항모가 합동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있는 모습.ⓒ미 해군 공개 사진
북핵 동결에 상응한 미국의 카드는?
한미 합의에 조정 가능한 한미합동훈련 조정 가능성
북한이 ‘대화의 입구’가 될 핵 동결을 공식화하는 것은 미국과의 대화 여건이 조성돼야 가능할 것으로 관측된다. 그 여건은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북한의 대화 의지와 핵 동결 가능성을 확인한 문 대통령이 향후 미국과 대북 정책을 어떻게 조율해나가느냐가 한반도 정세를 푸는 데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향후 한미간 협의 과정에서 쟁점이 될 대북 정책으로는 ‘대북 제재’와 ‘한미합동군사훈련’이 꼽힌다.
이중 대북 제재는 북한이 강하게 거부하는 정책일 뿐만 아니라,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데 있어서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사실 대북 제재는 사안에 따라 예외로 인정하면 적용을 피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재개된 남북교류 과정에서도 확인됐다. 북측 갈마비행장까지 비행할 아시아나 전세기의 이륙은 미국의 독자 제재에 걸려 있었지만 한미간 협의로 문제를 풀 수 있었다. 유엔 안보리와 미국의 동시 제재 대상이었던 최휘 노동당 부위원장의 방남도 예외로 인정돼 가능했다.
다만 미국 의지만 있다면 비교적 문제 해결이 쉬운 독자 제재와 달리 국제사회의 다자간 합의인 유엔 안보리 제재의 경우 문제 해결 과정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북한이 평창올림픽 응원단 등을 태우고 입경한 만경봉호 92호의 등유와 난방용 경유 등 기름 지원을 우리 정부에 요청했다가 결국 무산된 것도 유엔 안보리 제재 때문이었다. 문 대통령이 북미 사이를 중재하더라도, 당장 대북 제재를 완화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 배경이다.
그럴 경우 남는 카드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다. 북한은 한미합동훈련에 줄곧 반발해왔다. 미국은 자신들이 결코 북한을 적대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북한 입장에서 한미 합동훈련은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당장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26일 “합동군사연습 재개 책동은 북남관계의 개선을 위하여 온갖 성의와 노력을 다하고 있는 우리 공화국에 대한 악랄한 도전으로서 절대로 용납될 수 없다”고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또 “남조선에서 외세와 함께 벌이는 합동군사연습으로 현 북남관계 개선의 흐름이 깨지게 된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미국과 그에 추종한 자들이 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현재 한미합동훈련은 한미 합의에 따라 평창올림픽과 패럴림픽 기간 중에는 중단돼 있는 상태이다. 패럴림픽이 끝난 뒤 4월에 훈련이 재개될 가능성도 높지만, 한미간 합의에 따라 얼마든지 훈련 규모와 시기 등을 조율할 수 있다는 건 확인된 셈이다. 결국 미국의 의지가 관건이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27일 기자들과 만나 한미합동훈련 재개 여부와 관련해 “지금 뭔가를 가정해서 얘기를 하기에는 시기상조”라며 “아마 패럴림픽 끝나고 나서 공식 입장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을 종합하면 문 대통령은 북미 양측에 ‘핵 동결과 한미합동훈련 중단’을 중재안으로 제시했거나 앞으로 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중국과 러시아가 해결책으로 제안했던 ‘쌍중단(雙中斷)’과도 비슷하다. ‘쌍중단’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한미 합동훈련도 중단하는 것으로, 현실적인 방안으로 평가 받고 있다.
문 대통령이 26일 류옌둥 중국 국무원 부총리와 접견한 자리에서 “미국은 대화의 문턱을 낮출 필요가 있고, 북한도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래서 미국과 북한이 빨리 마주 앉는 게 중요하다”고 밝힌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는 “전제조건을 100% 깔고 가면 만나는 것 자체가 어렵다”며 “펜스-김여정 만남 불발도 있었지만 그런 대화의 조건을 서로 조금씩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대화가 순조롭게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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