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192] 글씨가 써 있어도 괜찮을까
흙먼지 잦아든 산길이 걷기 좋았다. 며칠 전 내린 단비 덕분이다. 한두 번 더 오면 산불 걱정도 꽤 덜겠다 싶었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텔레비전에서 애타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며, 하늘 뒤덮은 연기, 말 그대로 화마(火魔)를 보았다.
‘산불이 휩쓸고 간 강릉시 주택과 펜션들이 잿더미로 변해 있고….’ 손쓸 길 없이 덮친 화마도 미운데 ‘변해 있고’마저 께름칙하다. 잿더미가 돼 당분간 그 모습일 테니 ‘변했고’ 하면 그만. 이렇게 굳이 쓰지 않아도 상태가 지속됨이 드러나는 문맥에서 ‘-어 있다’ 형식의 보조동사 ‘있다’는 군더더기다.
‘둘은 생김새뿐 아니라 성격도 서로 닮아 있다.’ 한번 닮았다가 느닷없이 달라지는 일은 상식적이지 않으므로 ‘닮았다’만으로 닮은 모습이 이어짐을 충분히 보여준다. 구태여 ‘닮아 있다’ 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임영웅 노래는 100위권에 10여 곡이 포진해 있다.’ 역시 ‘포진했다’고만 써도 진을 친 상태가 계속된다는 뜻인데 ‘포진해 있다’ 하니 거추장스럽지 않은가.
‘있다’는 쓰더라도 자동사(自動詞) 뒤에서 그나마 어법에 어긋나지 않는다. ‘뒤쪽에 Counter(카운터)라고 흰 글씨로 써 있다.’ 말로들 더러 하는지라 어색하지 않을지 모르나 문법은 맞지 않는다(‘쓰여 있다’ O). ‘타동사+있다’가 성립하려면 그 동사가 피동형이라야 하기 때문. 불신과 적의가 ‘깔아 있다’가 아니라 ‘깔려 있다’, 손가락에 가시가 ‘박아 있다’가 아니라 ‘박혀 있다’ 해야 문장이 이뤄지는 데서 보듯.
‘형용사+있다’ 형식도 어색하다. ‘지는 데 익숙해 있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안다.’ ‘익숙하다’가 바로 형용사. 표준국어대사전은 주로 동사 뒤에서 ‘–어 있다’ 구성으로 쓰인다는데, 형용사 뒤에서 성립하는 문맥은 찾기 어렵다. ‘익숙해져 있어서’ 하면 틀리지는 않지만, ‘익숙해서’나 ‘익숙해져서’가 바람직하다.
불탄 강릉 산림(山林)이 379헥타르라 한다. 축구장 하나 사라져도 동호인만 수백 명이 속 탈 판에, 그 530배라니. 자나 깨나 불조심, 말조심.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