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국빈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6일(현지시각) 워싱턴디시(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열린 공동 기자회견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워싱턴/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한겨레S 뉴스레터를 구독해주세요. 검색창에 ‘에스레터’를 쳐보세요.“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사용해서 유명해진 문장입니다. 뉴턴의 위대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전임자의 성공과 실패에 많은 것을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대통령의 업적 위에 윤 대통령이 공적을 쌓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12년 만에 국빈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열어 한-미 핵협의그룹 설치를 결의한 워싱턴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상·하원 합동 회의에서 연설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국빈방문은 국제사회에서 한껏 높아진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계기였다고 평가합니다. 미국은 우리나라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입니다. 역대 대통령 모두 대한민국 국익을 위해 한-미 동맹을 중시하고 강화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이번 방미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외교적 성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후유증을 좀 남긴 것 같습니다. 미국의 핵우산은 더 튼튼해졌다고 하는데 한반도 정세는 오히려 더 불안해질 것 같습니다. 북한,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는 악화하고 있습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요?
국익 저해하는 ‘대결적 세계관’
윤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한 ‘가치 동맹’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는 이번 동포 간담회에서 “양국은 자유와 인권 그리고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이를 근간으로 국제사회의 연대를 실천해나가는 최상의 파트너”라며 “한-미 동맹은 이익을 거래하는 게 아니고 자유 수호를 위해 피로 맺어진 동맹”이라고 했습니다. 한-미 관계를 ‘혈맹’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과거 대통령들도 한-미 동맹을 강조하기 위해 이 정도 표현은 사용했습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발언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평생 검사를 한 사람입니다. 사람을 범죄자와 비범죄자로 구분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정치를 흑백논리에 따라 선과 악의 대결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를 기본 동력으로 하는 대결 프레임이 그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민주당과 시민사회를 색깔론으로 공격했던 4·19 기념사를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 그대로 반복했습니다.
국내 정치를 바라보는 이러한 색깔론을 윤 대통령은 국제 정치에도 그대로 투영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과 미국과 일본은 자유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 즉 ‘우리 편’으로, 이와 맞서는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가 물리쳐야 할 전체주의 세력’으로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이번 한-미 공동성명에서 “대만해협의 평화와 안정 유지의 중요성을 재확인하였다. 불법적인 해상 영유권 주장, 매립 지역의 군사화 및 강압적 행위를 포함하여 인도·태평양에서의 그 어떤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에도 강력히 반대한다”고 중국을 겨냥했습니다. 공동 기자회견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같이 무고한 인명 피해를 야기하는 무력 사용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공동 입장을 확인”했다며 러시아를 겨냥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이러한 인식과 행동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국제사회의 냉혹한 현실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들의 대외정책 노선에서 이탈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9세기 말 열강의 각축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를 잃었던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국익 최우선 실용주의 외교 노선’을 체득하고 있습니다. 해방 직후 “미국(놈) 믿지 말고, 소련(놈)에 속지 말라. 일본(놈) 일어선다. 조선 사람 조심하자”는 노래가 유행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변치 않았던 ‘국익 최우선 실용’ 노선
역대 대통령들도 국내 정치의 이념과 노선은 다양했지만, 대외 관계에서는 ‘가치나 이념’이 아니라 ‘국익 최우선 실용 노선’을 채택했습니다. 한-미 동맹이 아니라 언제나 대한민국 국익을 중심으로 판단했습니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강하게 요구한 이유는 북한의 재침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미국을 압박하려고 반공 포로를 석방하기도 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은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 3대 원칙으로 천명했습니다. 1973년에는 “우리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한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 국가들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한다”는 6·23선언을 발표했습니다. 대미 군사력 의존을 줄이기 위해 자주국방을 했고, 심지어 핵무기까지 개발하려고 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3년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 1985년 중국 어뢰정 및 함정 영해 침범 사건, 1985년 중국 공군 폭격기 불시착 사건, 1986년 중국 공군기 망명 사건 등을 국교가 없던 중국과 신뢰를 쌓고 관계를 개선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은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문을 열기 위해 소련·중국과 먼저 수교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이어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생에 걸쳐 한반도 평화를 연구하고 고민한 경세가였습니다. 1971년 대선에 출마하면서 4대국 안전보장론을 내놓았을 정도입니다. 그의 혜안과 집념은 2000년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 마지막 장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다’에 외교·안보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따로 정리해놓았습니다. 그의 삶에서 외교·안보가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의 4강 외교는 ‘1 동맹 3 친선 체제’가 되어야 한다. 미국과는 군사 동맹을 견고히 유지하고 중국, 일본, 러시아와는 친선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
“한반도는 4대국의 이해가 촘촘히 얽혀 있는, 기회이자 위기의 땅이다. 도랑에 든 소가 되어 휘파람을 불며 양쪽의 풀을 뜯어 먹을 것인지, 열강의 쇠창살에 갇혀 그들의 먹이로 전락할 것인지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 나라를 책임진 사람들이나 외교관은 어느 누구보다 깨어 있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반미주의자면 어떠냐”고 했지만, 대통령이 돼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이라크 파병도 했습니다. 국익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쿨하다’던 엠비의 탁견
실용주의를 내세웠던 이명박 대통령은 어땠을까요? 그는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중국을 드나든 경험이 있었습니다. 1988년 아시아수영연맹 회장 자격으로 광저우를 방문했고, 1991년에는 민간사절단으로 정주영 회장과 함께 베이징을 방문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되자 한-중 관계를 어떻게 다룰지 관심이 쏠렸습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한-중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점을 중국에 이해시키는 데 주력했습니다. 중국 국빈방문을 계기로 양국 관계는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됐습니다. 사업가다운 수완이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검사 시절 이명박 대통령 때가 가잘 ‘쿨’했다고 평가한 일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여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면까지 해줬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참모들을 요직에 많이 기용했습니다. 외교·안보 실세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대통령의 조언은 몰라도 이명박 대통령의 외교·안보 분야 조언은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이런 지혜를 남겼습니다.
“나는 어느 한쪽과의 관계가 강화되면 다른 쪽과의 관계는 악화된다는 식의 제로섬 논리가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에 적용될 필요는 없다고 봤다. 외교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복합 다중의 관계로 이루어지며, 한국이 필요로 하고 추구하는 한-미 관계와 한-중 관계를 미국과 중국이 동시에 이해하도록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떻습니까? 탁월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명박 대통령 시기와 지금은 국제 정세가 많이 다릅니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대통령의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며 동맹국에 동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미국과 일본은 ‘좋은 나라’, 북한과 중국과 러시아는 ‘나쁜 나라’로 구분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사고방식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한·미·일’-‘북·중·러’ 대결 구도로 한반도 위기를 고조시키는 것은 국가의 운명과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벌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가지 논란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는 윤 대통령의 애국심을 믿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윤 대통령이 미국 국빈방문 뒤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두가지입니다.
첫째,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와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개선해야 합니다. 둘째, 여야 대표들과의 회담이나 기자회견을 열어 방미 성과를 설명하고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국민이 조금이라도 더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야 실패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치부 선임기자 shy99@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