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가입을 서두르고 있는 포괄적 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가입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CPTPP 국민검증단에 전문가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한 나원준 경북대 교수가 CPTPP의 위험성을 지적하는 글을 몇 차례 씁니다. 독자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지구적 범위에서 시장 통합을 지향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흐름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곳곳에 암초가 있었다. 세계무역기구(WTO)가 추구해온 다자간 자유무역은 도하 라운드를 거치면서 사실상 실패했다. 지역화 경향으로 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이 자유무역의 중심 협상 형태가 된 것도 WTO 체제의 불안정성을 노출시켰다.
세계화의 지체라고 할 ‘슬로벌라이제이션(slowbalisation)’ 경향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긴축의 시대에 더 뚜렷해졌다. 특히 코로나19 위기는 세계화의 지체 경향을 더욱 심화시킨 계기였다. 그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쇠퇴하는 과정에 있어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고 있다. 위기를 거치면서 글로벌 공급망 재편 및 물류 사슬 축소, 기업들의 본국 회귀, 보호주의와 경제안보 개념의 확산, 중국과 서방의 분리로 특징지어지는 포스트 코로나 세계경제질서의 큰 추세가 점점 더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다.
메가 FTA의 확산은 세계화의 지체 및 블록 경제화 추세와 맞물린 모순적 현상
CPTPP와 같은 ‘메가 FTA’는 두 나라 사이에 체결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경제블록을 구성하는 여러 나라를 포괄한다. 다자간 자유무역이 가져오는 이점과 함께 각국의 민감 품목을 중심으로 양허 수준을 협의할 수 있는 신축성도 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메가 FTA는 최근 강조되는 경제안보 개념과도 접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특정 권역 내에 교역을 집중시키면서 동시에 경제블록 외부와 내부 사이에 장벽을 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메가 FTA의 확산은 세계화의 지체 및 블록 경제화 추세와 맞물린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모순적 현상이다.
자립적 경제의 소중한 가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파국을 맞는 가운데 주요국 정부는 장래 또 다른 위기 상황에 대처하면서 경제 ‘회복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공급망 안정화가 강조된다. 세계 각국은 생산설비의 본국 배치와 반도체, 제약 등 전략산업에서의 경쟁력 강화에 주력하고 있다. 이들이 미국의 리더십 하에 특정 경제블록으로 모여드는 현상도 경제안보 강화와 연관되어 있다. 분명한 점은 이와 같은 자국화와 블록화 추세는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던 자립적 경제의 소중한 가치를 확인시켜준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사업 위험을 노동자와 사회 전체에 떠넘겨 예측 불가능한 경제위기와 기후위기를 초래했다. 경제를 제 발로 서게 하지 않고 초국적 자본에 굴종해온 역사의 귀결은 극단적인 불평등과 비극적인 기후 재앙, 식량위기, 그리고 제2, 제3의 팬데믹인 것이다.
초국적 자본의 통제는 노예의 길을 벗어난 주권국가가 짊어진 시대적 과제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자본의 활동 범위가 국가권력의 작동 범위로부터 벗어나도록 했다. 초국적 자본은 주권국가의 통제를 벗어남으로써 사회에 대한 책임도 부담하지 않게 되었다. 시장이 사회를 집어삼킨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현재 세계화의 위기는 세계화가 포화 상태가 되어 더는 남은 지역이 지구상에 없게 된 탓이라고 볼 일이다. 더는 제국주의 자본에게 이윤의 원천이 될 추가적인 식민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달도 화성도 아직은 상상 속에만 존재할 따름이다. 그렇다면 한국경제와 한국 민중은 앞으로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불평등 심화를 감수하면서 신자유주의의 노예로 남아 달을 닮은 신식민지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인가.
우리는 지금 칼 폴라니가 제시한 거대한 전환의 ‘두 번째 운동’인, 경제를 사회에 다시 의식적으로 종속시키는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초국적 자본에 대한 통제와 사회의 자기보호는 주권국가의 권능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에서부터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포스트 코로나 대전환의 시대에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주권국가는 시장에 대한 통제를 확립하고 공공성과 사회적 안전을 초국적 자본의 이윤 논리보다 앞세워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가져온 온갖 질곡을 타파하는 과감한 체제 전환의 길을 열어갈 책임이 한국 민중 앞에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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