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민철 사회부 기자
입력 : 2022-10-17 04:05
영화나 드라마 속 악당 캐릭터를 빌런(Villain)이라고 부른다. 빌런은 본래 고대 로마의 농노(農奴)를 뜻하는 단어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본뜻 대신 악당이란 의미로 더 널리 쓰이게 됐다. 시대 변화에 따라 용례가 달라진 것이다. 한때 대역죄였지만 이제는 도덕성의 표상이 된 단어도 있다. ‘민주주의자’가 그 예다. 소설 ‘나니아 연대기’ 작가인 C.S. 루이스는 자신의 에세이집 ‘이야기에 관하여’에서 이런 단어들을 나열하며 “인류는 누군가를 잔인하다거나 신뢰할 수 없다고 곧바로 말하는 대신 다른 단어로 빗대어 말한다”고 분석했다.
작가가 무엇보다 우려한 것은 단어의 죽음이었다. 어떤 단어 앞에 ‘좋은’ ‘나쁜’과 같은 형용사가 붙게 되는 상황에 대해 “한 단어가 치명적인 질병에 걸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신사(Gentleman)라는 단어를 예로 들었다. 신사는 본래 상당한 땅을 소유한 귀족이란 사회적 신분을 의미하는 용어였다. 누군가를 신사라고 부르는 건 그를 바리스타나 교수라고 부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이를 ‘진정한 신사’나 ‘참된 신사’라고 말하는 순간, 그 단어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는 게 루이스의 진단이었다. 어떤 단어에 ‘진짜’나 ‘참된’ 같은 형용사가 붙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 멸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원을 모르면서도 누군가의 행동에 대해 신사답다거나 신사답지 못하다고 말한다. 단어의 본뜻과 별개로 벌어지는 현상이다.
루이스가 1962년 내놓은 이런 진단은 2022년 대한민국에 일상화된 일이다. 검사라는 단어 앞에는 ‘참된’ ‘정치’와 같은 형용사가 붙은 지 오래다. 시민은 ‘깨어있는’지에 따라 나뉘고, 건물주 앞엔 ‘착한’이란 조건이 생겼다. 우리는 ‘참된’ 회사원이나 ‘정의로운’ 야구선수라고 하지 않는다. 회사원과 야구선수는 그저 회사원과 야구선수다. 정치권의 손때를 탔느냐의 차이일 터다.
단어는 주로 부정적 의미가 스며들 때 죽음의 길로 간다. 사법과 정치를 오래 지켜본 한 선배는 최근 초등학생 딸이 학교에서 공작 수업을 했다는 말을 듣고 순간 아연했다고 했다. ‘다른’ 공작을 먼저 떠올렸다는 것이다. 공안(公安)검사의 공안은 공공의 안전과 질서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공안에 ‘음침한’이란 함의가 덧씌워지자 검찰은 공안부를 없애고 공공수사부로 이름을 바꿨다. 루이스는 ‘현대적’이란 단어는 효율적·실용적이란 의미로, ‘중세적’이란 단어는 잔혹하고 엄혹한 것으로 통용되는 현실을 거론하며 “단어를 찬사와 비방의 심연에 빠지도록 내버려두면 늘 이런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정치권은 흔히 단어를 본뜻이 아닌 호불호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지난 정부는 2019년 탈북 어민 2명을 강제 북송하며 ‘진정성 없는’ 귀순이라는 해석을 꺼냈다. 검찰이 최근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야당 대표에게 관련 혐의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자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서도 ‘정무적인 수사’를 바라는 목소리가 나왔다. 전직 대통령은 감사원의 서해 공무원 피격 사건 조사 요구에 대해 ‘대단히 무례한’ 감사라고 일갈했다. 귀순은 귀순이고, 수사는 수사고, 감사는 감사지만, 그 의미가 확장되면서 진정성 있는 귀순과 정무적인 수사와 예의 바른 감사라는 새로운 함의가 생겨났다. 현직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열차가 등장하는 풍자 만화에 ‘편항적’이란 수사가 붙은 것도 마찬가지다. 정치나 사회를 에둘러 유머러스하게 비판한다는 의미에 무의미한 족쇄가 붙었다. 작가가 우려한 단어의 소멸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단어를 말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단어가 그 자체의 핵심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어떤 형용사도 무의미하다. 루이스는 “단어를 하나 죽인다면 그 단어가 원래 나타내던 것을 인간의 정신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했다.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면, 결국 그것을 떠올리지도 못하게 된다.
양민철 사회부 기자 listen@kmib.co.kr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s://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4268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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