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22-11-01 05:00
29일 밤에 벌어진 이태원 참사 이후 일상생활에서 ‘압사 위험’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아졌다. 인구 950만 도시 서울에서 ‘과밀’은 익숙한 단어였지만, 이젠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일상 속의 위험이 된 것이다. 이번 사고를 계기로 정부가 도시 과밀 환경을 분석해 종합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시민 개개인 또한 과밀 환경에 대한 위험성을 인지해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과밀 자체보다, 과밀 환경에 익숙해진 것이 더 큰 위험 요소다. 재난 관리 전문가인 줄리엣 카이엠 전 미국 국토안보부 차관보는 30일 <시엔엔>(CNN)과의 인터뷰에서 서울 시민들이 밀집 환경에 익숙하다는 점을 이태원 참사의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서울 사람들은 붐비는 공간에 익숙하기 때문에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붐비는 공간에 너무 익숙해지는 위험’도 있다”고 분석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대규모 인파가 몰리는 상황에 대한 대응 매뉴얼은 미비한 실정이다. 비탈마다 좁은 골목이 놓인 이태원 일원에 1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지만, 서울시와 용산구, 경찰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관할 지자체인 용산구는 안전관리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았고, 경찰도 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는 정복 경찰관은 58명을 배치했을 뿐이다.
이송규 한국안전전문가협회장은 “정부와 국민 모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사람들이 압사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간 안전 대책도 부실했다”며 “이번 사고로 생긴 학습효과로 정부는 과밀 환경에 대한 대책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번 사고는 일방통행 등 동선을 관리하고 혼잡 시간대 이태원역 무정차 통과를 사전에 계획했었다면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앞서 압사 사고로 대규모 참사를 겪은 다른 나라들이 사고 뒤 마련한 대책들을 참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영국은 1989년 힐즈버러 경기장에 인파가 몰리면서 철책에 갇힌 관중이 깔려 숨지는 사고가 발생한 이후 축구장의 안전 관리를 위한 축구관중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축구 구단에 관중 입장을 허가하고 통제하는 면허를 주고, 감독기관을 설치해 면허를 관리하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또 입석을 없애고 좌석제를 의무화하는 내용도 담겼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메카 성지순례 기간 압사 사고가 반복되자 2016년 특단의 대책을 수립해 발표했다. 성지순례 허용 시간을 제한하고 대사원에 입장할 때는 지피에스(GPS) 칩이 내장된 전자팔찌를 착용하도록 했다.
일본은 2005년 효고현 아카시 불꽃놀이 압사 사고 이후로 국가공안위원회 규칙과 경비업법을 개정해 경비 업무에 ‘혼잡 경비’ 조항을 추가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2014년 새해맞이 행사 때 몰린 인파로 36명이 숨지는 압사 사고가 벌어진 뒤 관광지·공원 등 공공장소군집 안전관리방법에 대한 조례를 만들었다. 관계 기관과 유기적인 정보 공유, 다수 군중이 모였을 경우 현장 관측 강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과밀 사고를 막기 위해 ‘예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전찬기 인천대 명예교수(도시환경공학부)는 “예측을 제대로 해야 예방과 대비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김태환 용인대 교수(경호학과)도 “일본은 아카시 불꽃축제 사고 이후 행사 주최 쪽이 없어도 크리스마스, 음력설 등 인파가 몰릴 때면 경찰·소방·자치단체가 협업해 자체 안전 계획을 세운다”며 “핼러윈에 인파가 몰리는 것이 올해가 처음도 아닌데, (동선을 분리하는) 분리대 설치나 사고 예방책 등 재난안전 담당 부서의 대비책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시민과 기관이 과밀 위험에 대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도 있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지하철이나 공연장에 매우 많은 안전장치가 있지만 사람들이 빨리 가기 위해, 혹은 공연을 더 즐기겠다는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는 경우가 있다”며 “제도적 보완도 중요하지만 시민들도 스스로 경각심을 갖고 과밀 환경이 주는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혜민 기자 jhm@hani.co.kr 서혜미 h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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