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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0일 월요일

크러시 제작진 "이태원 참사 풀리지 않은 의문 많아, 분명한 건..."

 


[오리지널 인터뷰 시리즈] 다큐멘터리 <크러시> 만든 조시 게이너 공동 프로듀서
23.10.31 07:12l최종 업데이트 23.10.31 07:12l
10·29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
▲  10·29 이태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크러시>
ⓒ 파라마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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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고 이해하고 싶다면 추천한다." 

<우리가 보지 못한 대한민국>의 저자이자 서울에 거주하는 영국 출신의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라파엘 라시드는 지난 22일 자신의 엑스(옛 트위터)에 짧은 소감이라며 이렇게 남겼다. "세부 사항과 장면들은 지켜보기 힘들 정도로 끔찍하다"는 단서와 함께. 

지난 17일 미국에서 파라마운트+를 통해 공개된 다큐멘터리 <크러시>(Crush) 이야기다. 이미 많은 언론에 소개된 것처럼 <크러시>는 지난해 이태원 참사를 소재로 한 총 90분짜리 2부작 다큐멘터리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내레이션 없이 바디캠과 CCTV, 생존자의 휴대전화, 청문회와 기자회견 등 280개 1500시간 분량의 영상을 바탕으로 세밀하고 몰입감 넘치며, 끔찍한 디테일로 비극이 재생된다"고 <크러시>를 소개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다. 그래서 라파엘 라시드는 "한국에서 볼 수 있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라는 지적도 함께 남겼다. <크러시>를 서비스 중인 파라마운트+는 티빙에 입점하는 형태로 한국에도 진출했으나 티빙에서는 <크러시>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따르면 "<크러시> 제작사가 미국 외 다른 국가와 콘텐츠 제공을 논의한 바 없다"는 것이다.

외신들은 <크러시> 공개 소식을 전하면서 2017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루트 91 하베스트' 음악 축제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11분>(11 Minutes)으로 수상 경력이 있는 제작진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바로 그 <11분>을 연출한 제프 짐벌리스트가 <크러시>에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크러시>를 둘러싼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제프 짐벌리스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공동 프로듀서인 조시 게이너에게 공을 넘겼다.

조시 게이너와 조율한 끝에 30일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할 수 있었다. 이태원 참사 1주기인 29일에 보도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현지와의 시차 등으로 인터뷰 마감이 늦어졌다. 다음은 인터뷰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크러시>를 제작한 조시 게이너 공동 총괄 프로듀서
▲  <크러시>를 제작한 조시 게이너 공동 총괄 프로듀서
ⓒ 폴스빌리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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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신에서는 다큐멘터리 <11분>을 만든 제작진이 이태원 참사 다큐멘터리 <크러시>를 만들었다고 소개했다. <크러시>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크러시>의 총괄 프로듀서는 제프 짐벌리스트(올라이즈필름스), 수전 지린스키(씨잇나우스튜디오스), 테리 롱(씨잇나우스튜디오스), 그리고 스투 슈라이버그(센터드라이브미디어)다. 나(조시 게이너, 폴스빌리지미디어)는 공동 총괄 프로듀서로서 한국에서 팀을 이끌었다. 프로듀서는 얼래나 사드이며 한국에서의 프로듀서는 박세진씨다.

제프 짐벌리스트, 수전 지린스키, 테리 롱, 스투 슈라이버그와 얼래나 사드는 모두 <11분>을 제작한 팀의 일원이었고 나는 <크러시>를 위해 팀에 합류했다."

- 한국의 이태원에서 발생한 사건에 어떻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씨잇나우스튜디오스 팀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11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또 다른 중요한 이야기를 깊게 파고들어 시청자들에게 사건의 전개 과정을 몰입감 있게 보여줄 기회를 찾고 있었다. 이태원 참사는 미국에서도 보도되었지만 광범위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다. 더 많은 관심을 받을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는 점이 분명해 보였다."

- <크러시>를 제작하기 위해 한국에는 얼마 동안 체류했고 체류 기간 동안 한국에서 받은 인상은 무엇인가?
"지난 4월 말 한국에 입국해 한 달 가까이 머물며 팀원들과 함께 취재와 촬영을 진행했다. 또한 한국 방문에 앞서 몇 달 동안 조사와 취재를 했다. 이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제작할 수 있게 도와준 한국의 훌륭한 팀과 협업할 수 있어 좋았다. 이태원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그날 밤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크러시>에는 내레이션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나?
"이 다큐멘터리의 목표는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 많은 사람을 만나 인터뷰하면서 사건의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날 이태원 참사를 막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 참사에 대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많이 남아 있다. 그날 밤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로 159명이 사망했다. 핼러윈은 수년간 이태원에 많은 사람을 불러왔고, 10월 29일에도 많은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159명 중 대다수가 사망하기 몇 시간 전부터 위험을 경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신고 전화가 걸려 왔다. 이태원에서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더 많은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 한국 정부는 '참사'가 아닌 '사고'라는 말을 썼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크러쉬> 공식 예고편을 보니 한 인터뷰이가 "이건 사고가 아니다. 사고라는 것은 막을 수 없었던 것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당신은 이 사건을 어떻게 정의하나?
"질문 고맙다. 위의 답변을 참조 바란다."

"카메라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감사"
 
다큐멘터리 <크러시>
▲  다큐멘터리 <크러시>
ⓒ 파라마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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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디언> 인터뷰에서는 "한국에서 보낸 시간을 돌이켜보면 카메라 안팎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계속 나오는 단어가 트라우마였다"라고 했던데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목격하거나 경험한 가장 큰 트라우마는 무엇이었나? 
"생존자와 목격자, 희생자 가족과 친구, 구조대원과 기자들, 뉴스에서 참사를 지켜본 시민 등 우리가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 인터뷰는 이태원 사건이 발생한 지 불과 몇 달 후에 이뤄졌다. 인터뷰에 응한 많은 이들이 여전히 사건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많은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왜 사랑하는 이들이 죽었는지 하는 기본적인 답을 얻기 위해 여전히 노력 중이었다.

개인적으로도 참사로 인한 슬픔을 서울 거리에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시청 앞에 마련된 추모 공간에서 보낸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 유가족들이 이태원 희생자 159명 모두의 이름을 불렀고 한 명씩 이름을 부를 때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 있었다. 사망한 수많은 사람들 영정 앞에서였다. 유가족들이 느끼는 슬픔이 얼마나 클지 상상할 수도 없다. 그날 밤 그곳에 있었던 것은 내 이력에서 가장 감동적인 경험 중 하나였다."

- <크러시>는 이미 공개되었는데 제작 과정이나 제작 후에 아쉬운 점이 남는 것은 없었나?
"다큐멘터리를 만들거나 어떤 이야기를 다룰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분명 계획은 있지만, 이야기와 증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게 된다. 그게 바로 과정의 일부다. 나는 이 팀의 일원이었음에 자랑스럽고, 우리가 제작한 다큐멘터리가 자랑스럽고, 우리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다큐멘터리인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파라마운트+의 파트너사인 티빙에서 파라마운트+의 다른 프로그램은 볼 수 있지만 <크러시>는 제공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도 <크러시>를 볼 수 있을까?
"현재 파라마운트가 한국과 배급 계약을 체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공동 총괄 프로듀서로서 그런 협상이나 결정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에 공유할 정보가 없다."

- 한국에서 프리랜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영국 출신 라파엘 라시드 기자는 "한국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소감을 남겼다. 일각에서는 정치적인 이유로 <크러시>를 한국에서 보지 못하게 조치한 것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 "질문은 고맙지만 답변은 위와 동일하다."

- 마지막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한마디 부탁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들려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우리가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책임이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다른 상황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카메라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이 보여준 친절과 온정, 품위를 잃지 않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이태원 참사 1주기를 맞이하는 지금, 슬픔에 잠긴 사람들을 생각하며 목숨을 잃은 159명을 기리고 있다."
 

태그:#이태원참사, #다큐멘터리, #조시게이너, #크러시

2023년 10월 29일 일요일

아트 테크는 ‘예술품 투자’로

 

[쉬운 우리말 쉬운 금융] 아트 테크는 ‘예술품 투자’로

신혜주 기자

hjs0509@

기사입력 : 2023-10-30 00:00 최종수정 : 2023-10-30 06:36

[한국금융신문 신혜주 기자] 요즘 젊은 세대들의 재테크 수단으로 미술품과 음악 저작권 등에 투자하는 ‘아트 테크(Art Tech)’가 급부상하고 있다. 단순 소비를 넘어 개인 삶의 가치를 높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늘면서 기존 주식과 펀드에 국한됐던 투자 항목이 다양해지고 있다.

예컨대 좋은 작품을 사게 될 경우 자신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소유하면서 가격이 꾸준히 올라 투자도 겸할 수 있기 때문에 일석이조의 소비를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아트투게더와 뮤직카우가 이들을 대상으로 한 관련 서비스를 선보이고 있다.

아트 테크는 예술품을 뜻하는 영단어 Art와 재테크의 줄임말인 Tech의 합성어로, ‘예술 작품을 재테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일’을 의미한다. 주로 작품을 구입한 후 되팔아 이익을 남기거나 저작권으로 수익을 올리는 활동이다.

국립국어원은 ‘우리말 다듬기 누리집’을 통해 아트 테크를 대체할 쉬운 우리말로 ‘예술품 투자’를 선정했다.

예를 들어 ‘젊은 세대들이 아트 테크에 관심을 두면서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보다 ‘젊은 세대들이 예술품 투자에 관심을 두면서 국내 미술시장 규모가 빠르게 커지고 있다’로 순화해 표현할 수 있다.

미술품 투자 플랫폼 아트투게더는 미술 작품에 대한 권리를 투자계약증권 형태로 발행해 누구나 쉽게 소액으로 미술품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여기서 투자계약증권은 특정 투자자가 타인 간의 공동사업에 금전 등을 투자하고, 주로 타인이 수행한 공동사업 결과에 따른 손익을 귀속 받는 것을 말한다.

아트투게더가 작품을 선정하면 투자자는 미술품 투자를 통해 작품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게 된다. 작품을 철저하게 관리 및 보관되며 매각 시점에 의결권을 가진 투자자의 매각 투표를 진행한다. 매각으로 발생한 수익은 투자 후 확정된 최종 소유 지분에 따라 투자자에게 분배된다.

2023년 10월 22일 기준 아트투게더가 모집한 작품 수는 146점이며, 매각 평균 수익률은 46.28%다. 연환산 평균 수익률은 150.68%다.

최근에는 미미술품을 넘어 시계와 보석 등 각종 명품 및 귀금속에 대한 공동구매 상품을 선보이고 있다. 명품과 귀금속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바라보며 아트투게더의 주요 고객층인 2030 세대의 취향과 구매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다.

음악 수익증권 플랫폼인 뮤직카우는 기존 아티스트만의 전유물이었던 음악 저작권료를 수익증권 형태로 개인이 소장하고 거래가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지난 9월에는 ‘음악 저작권료 참여 청구권’으로 거래되던 1084곡을 한국예탁결제원을 통해 전자등록하고 음악수익증권으로 발행했다.

음악수익증권은 안전한 자산 보호를 위해 저작권 신탁 및 전자등록 단계를 거쳐 발행된다. 예탁결제원 전자등록을 통한 수익증권 발행으로 발행 및 유통 구조의 안정성을 확보하게 됐다.

자산은 신탁 계약으로, 예치금은 키움증권에 개설되는 고객 명의의 증권 계좌에 직접 입금됨으로써 보호된다. 발행된 음악수익증권은 고객별 개인 명의의 증권계좌를 개설해야만 거래할 수 있다.

지난 9월 18일 기준 키움증권 계좌 개설 인원은 전월 대비 26.6% 증가했으며 MCPI(음악 저작권 지수)는 14.7% 증가했다. 마켓에서 거래되고 있는 곡 중 81%는 가격이 올랐다. 뮤직카우는 현재 조각투자를 넘어 ‘문화 금융’이라는 새로운 투자 트렌드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한국금융신문은 국어문화원연합회와 ‘쉬운 우리말 쓰기’ 운동을 함께 합니다.

신혜주 기자 hjs0509@fntimes.com

2023년 10월 27일 금요일

“서울-양평 고속도로 비리만으로 탄핵 사유 충분”…12차 양평 촛불문화제 열려

 



문경환 기자 | 기사입력 2023/10/27 [21:23]

27일 오후 7시 양평군청 앞에서 서울-양평 고속도로 국정농단 진상규명 촉구 농성단이 주최한 ‘서울-양평 고속도로 국정조사 특검, 윤석열 탄핵! 12차 양평 촛불문화제’가 양평·여주 주민 등 7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 행사는 10.29 이태원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묵념과 가수 십자 씨의 추모곡 공연으로 시작하였다.  © 문경환 기자

 

유필선 여주시의회 부의장은 10.29 이태원 참사 추모사를 통해 “단 한 명도 처벌받지 않았다. 촛불항쟁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국격이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가.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니) 너무 분했다”라며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저들의 무능력, 무책임, 무자비한 행태에 우리 국민은 이미 탄핵을 준비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 유필선 부의장.  © 문경환 기자

 

그러면서 “이태원 참사를 기억해야 한다. 기억하기 위해 추모해야 한다”라고 강조한 뒤 “윤석열 각오하라, 우리가 끝장낸다!”라고 외쳤다. 

 

양평군청 앞에서 112일째 천막농성을 하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운 농성단 단장 최재관 더불어민주당 여주시·양평군 지역위원장은 “지금 국토위 국정감사를 하고 있는데 90% 이상 범인을 잡았다. 우리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 최재관 단장.  © 문경환 기자

 

최 단장은 “국감에서 채 밝혀지지 않은 것은 국정조사에서 밝히려고 벼르고 있다. 오늘로 촛불집회는 마무리하지만 우리는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에게 진상을 알려 나갈 것이다. 형태만 바뀐 것이다”라고 하였다. 

 

진영미 대구촛불행동 공동대표는 “양평에 와서 김건희 땅을 둘러봤는데 관광지 투어가 따로 필요 없더라”라며 김건희 일가가 양평에 엄청난 땅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 진영미 공동대표.  © 문경환 기자

 

또 남한강 휴게소 비리 의혹을 제기하며 “이제 (한국은) 윤석열, 김건희 인맥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라가 돼버렸다”라고 꼬집었다. 

 

▲ 감사원 앞에서 국토부 감사를 촉구하는 1인 시위 중인 ‘서민 보급형 가수’ 김롹커(김은국) 씨가 흥겨운 공연을 하였다.  © 문경환 기자

 

▲ ‘서민 보급형 가수’ 김롹커(김은국) 씨.  © 문경환 기자

 

서울-양평 고속도로 비리를 폭로했다가 제명된 여현정 전 양평군의원은 “윤석열·김건희 정권이 초호화 해외 관광 놀음과 친미·친일 사대매국 놀이에 도취해 있던 지난 1년, (정권은) 민생을 외면하고 역사와 미래까지 말아먹었다”라고 주장했다. 

 

▲ 여현정 전 양평군의원.  © 문경환 기자

 

그러면서 “서울-양평 고속도로 비리 하나만으로도 탄핵 사유 충분하다”라고 강조하며 “국정농단의 땅으로 점철된 이곳 양평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 가수 십자 씨의 공연이 이어졌다.  © 문경환 기자

 

▲ 힘찬 율동 공연이 이어졌다.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한편 이날 집회에는 진선화 여주시의원, 오솔잎 국민주권당(준) 경기도당 위원장 등도 참석하였다. 

 

▲ 진선화 여주시의원.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 문경환 기자

2023년 10월 26일 목요일

아기와 아지

 최태호의 맛있는 우리말 [84] 아기와 아지

최태호 필진페이지 +입력 2023-10-27 06:30:00







 
▲ 최태호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문학회 회장
계림유사에 나타난 우리말을 계속 이어 보고 있다우리말에서 아지나 아기는 작고 어린 것을 이르는 말로 알고 있다이에 대한 계림유사의 풀이를 보기로 하자. ‘아지(알지 ·閼智, 東史脫解王… 小兒名曰閼智 閼智者方言 小兒之稱한국 역사에서 탈해왕… 어린 시절에 아지라고 했다아지는 어린 아이를 이르는 말이다)는 어린 아이라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아가(丫加)’는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말(父呼子曰 丫加)’이었다지금도 부모가 아이를 부를 때 아가라고 하고 있으니 유래가 참 오래된 말이다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를 때도 아가라고 하니 참으로 정겨운 우리말이 아닐 수 없다이 글자도 원문에는 로 되어 있는데 필자가 로 바꾼 것이다.
 
아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1. 아기를 귀엽게 부르는 말시어머니가 젊은 며느리를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다아지는 접사처럼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강아지·망아지·송아지 등과 같이 동물의 어린 새끼를 이를 때 많이 사용한다결국 아지나 아기·아가 등은 모두 하나의 어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중부대 한국어학과 교수·한국어문학회 회장

2023년 10월 25일 수요일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 장창준 객원기자
  •  

  •  승인 2023.10.26 08:00
  •  

  •  댓글 0
  • 팔레스타인 비극사 ②

    • 누구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라 하고, 누구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전쟁이라 한다. 또 누구는 ‘민주’ 이스라엘과 ‘테러’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전쟁은 이스라엘의 억압에 맞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이다. 70년 넘게 진행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독립전쟁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억압사, 팔레스타인 비극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지도와 숫자, 국제 협정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다양한 명칭을 통해 팔레스타인 비극사를 정리한다.<편집자주>

    ① 지도가 보여주는 것들

    ② 숫자가 보여주는 것들

    ③ 국제 협정이 보여주는 것들

    ④ 명칭이 보여주는 것들

    6%의 땅에 살던 31%가 52%를 차지

    1947년 11월 29일 유엔 총회는 팔레스타인 지역 분할안을 제시했다. 아래 표는 팔레스타인 지역 인구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사진 설명을 입력하세요.

    유대인의 비중은 31%였다. 이에 반해 소유하거나 정착하고 있던 땅 비율은 6%에 불과했다. 이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첫째,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상당히 많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했다. 둘째, 31%의 인구가 소유한 땅이 6%였으니, 유대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극히 일부였다.

    그런데 유엔은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지역의 52%를 분배하는 안을 제시했다. 유엔은 애당초 편파적이었다. 유엔의 분할안은 공정하지 않았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인근 아랍 국가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75만 명이 30%의 물을, 4만 5천 명이 70%의 물을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는 이스라엘의 손에 들어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는 (조사 시점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75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점령한 후 유대인을 이주시켜 이스라엘 정착촌을 확대해 갔다. 1987년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4만 5천 명이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이스라엘 군대의 폭격으로 가자지구의 수도시설은 거의 파괴되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공급하는 물에 의존해야 했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가 사용하는 물의 30%을 75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공급했다. 나머지 70%의 물은 4만 5천 이스라엘 정착민들에게 주어졌다.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려 죽이려’ 했다.

    분노에 차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봉기에 나섰다. 1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가 시작된 것이다. 1차 인티파다는 1987년에 시작되어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1차 인티파다의 직접적 발단 계기는 이스라엘 탱크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들이박아 4명이 즉사하고, 7명이 중상을 입은 것이었지만, 1967년 가자지구 점령 이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말려 죽이기’ 정책의 결과였다.

    미국, 점령지역 도로 건설에 1조 이상을 지원

    1993년 오슬로 협정 이후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평화 협상'을 중재했던 것은 미국. 그러나 이스라엘은 '평화 협상' 기간에도 정착촌을 늘렸다. 당시 총리였던 네타냐후(지금도 총리!)는 정착촌을 4배로 늘렸다. '평화 협상'의 중재자 미국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대를 지원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점령지에 있는 모든 정착촌을 도로로 연결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 도로 건설에 1조 원이 넘는 돈을 지원했다. 당시 미국이 팔레스타인에 지원한 액수는 50억이었다.

    7년에 걸친 '평화 협상'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대표하여 PLO가 팔레스타인 측 대표로 참석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미국의 중재에 ‘고분고분한’ PLO에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50% 증가, 팔레스타인은 36% 감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 이스라엘의 GDP는 50% 증가했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단지 10% 증가에 그쳤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경제가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20개국 이상의 국가와 외교 관계를 맺고 그들과의 무역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평화 협상'은 이스라엘에 커다란 이익을 안겨 주었다.

    1993년 오슬로협상이 시작되었지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에 대한 봉쇄 조치는 계속되었다. 아니 정착촌 확대에서 볼 수 있듯이 더 강화되었다. 이 시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10억 달러 이상 손실을 보았고, 그들의 1인당 GNP는 36% 감소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실업률은 1995년 9월 18.5%에서 1996년 28.4%로 증가했다. 이 수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장이 아니라 1997년 유엔 보고서에 적혀있다. '평화 협상'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중했다.

    7년의 '평화 협상' 기간 PLO가 이스라엘을 위한 “추잡한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인식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사이에서 확대되었다. 외교적으로 관대하다는 평판을 얻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 측의 “굴욕적인”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PLO에 실망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하마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하마스는 2006년 가자지구 총선에서 승리한다.

    이스라엘 정착민, 7만 5천 명에서 40만 명으로 늘어

    1990년대 초반 이스라엘 정착민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합해 7만 5천 명 정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이스라엘 정착민은 급증하여 서안지구에 19만, 가자지구에 5천~7천, 동예루살렘에 19만 명의 이스라엘 정착민이 거주한다. 1967년 3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시리아 영토인 골란고원에도 이스라엘 정착민이 1만 7천 명 이상 거주한다.

    '평화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이스라엘 정착민이 6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유대인과 팔레스타인인들 사이에서 충돌을 발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래 표는 2000년부터 2011년까지 물리적 충돌로 인한 양측 사망자 통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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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서안지구의 베이드 아리에(Beit Arye) 지역의 한 마을.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대는 올리브나무 4,000그루를 제거했다. 미처 제거하지 않은 나무에서 열매를 수확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올리브나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몇 안 되는 수입원 중의 하나이다.

    ▲ 이스라엘군이 올리브나무를 베려 하자 이를 막고 있는 팔레스타인 여성

    1991년 미국은 PLO에 서한을 보내 “미국은 1967년에 점령된 영토에서 정착촌 활동을 하는 것을 반대해 왔고 앞으로도 반대할 것”이라고 확약했다. 1999년 올브라이트 미 국무부 장관 역시 “정착촌 활동이 평화구축에 파괴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사이 이스라엘 정착촌은 몇 배 늘어났고, 미국의 원조금은 정착촌 건설에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정착촌의 확대는 2차 인티파다의 주원인이 되었다.

    2017년 국제 앰네스티 사무총장은 “50년이 지난 지금, 이스라엘의 정착촌 확장을 단순히 규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명백하게 국제법을 위반하고 전쟁범죄에 해당할 행위를 하는 불법 정착촌에 자금 지원을 멈춰야 한다. 이제는 세계가 구체적인 국제 행동을 취해야 할 때이다”라고 말했다.

    6m 높이의 분리 장벽, 65km(가자지구)와 714㎞(서안지구) 길이로 설치

    2차 인티파다는 1차 인티파다와 달리 폭력적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이스라엘은 군대를 앞세워 팔레스타인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점령지역에 분리 장벽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6미터에 달하는 분리 장벽이 가자지구에 65km, 서안지구에 714km 길이로 설치되어 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2004년 7월 분리 장벽이 국제법에 어긋난다고 판결하고, 철거 조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분리 장벽을 가리키며 “일리걸”이라고 외친다. 불법(illegal)이라는 것이다. 분리 장벽을 다녀온 세계 평화 활동가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분리 장벽은 팔레스타인을 옥죄는 뱀”이라고.

    ▲ 가자지구 분리장벽

    ▲ 서안지구 분리장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