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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3일 목요일

이정희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 마음 없앨 수 없다”

최규화 북DB 칼럼니스트 somecrud@interpark.com  2016년 03월 03일 목요일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이정희의 말, 말, 말
-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 "(민중연합당을)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프리즘②]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
- 이정희는 누구? :
혹시 그 이정희? 맞다. 그 이정희다. 2012년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서 집권여당 후보에게 “당신 떨어뜨리려 나왔다”라고 말하던 사람.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표. 정당 해산 이후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아까운 진보 정치인’과 ‘시대착오적 운동권 정치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좀 천천히 삽니다"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 어떤 책을 냈나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진보를 복기하다>다. 통합진보당의 핵심 과제로 추진됐지만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것, 또는 주목받게 되어 비난을 불러온 것”들 가운데, "진보의 대안을 담고 심어진 새싹"들을 골라 담았다. 참신하거나 근본적이거나 절박한 것들부터. 그렇다고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이 직시해야 할 잘못과 한계가 깊은 반성과 함께 담겨 있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한 줄 서평을 남겼다. “딱 이정희 같다."
- 지금 왜 이정희를 만났나: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던 2014년 겨울부터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되고 봄을 바라보기까지, 1년 2개월 동안 정치판과 언론에서 이정희는 사라졌다. 그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가 2월 20일 보도된 ‘주간경향’ 인터뷰다. 그리고 이번이 그녀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두 번째 인터뷰. 정치인 이정희를 ‘저자 이정희’로 만나, 그녀가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뼈아픈 패배를 곱씹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남긴, 이정희식의 사죄를 따라 읽기 위해서였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
진보정책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녀는 정치평론가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서서 반성문을 읽는 느낌과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할 때도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씩 말을 멈추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예민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분명 그 점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긴 고민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는 분명한 사죄의 대상만큼이나 분명한 질타의 대상도 있었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2월 20일, 진보당 해산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머리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라는 대답을 읽었는데, 살아보려고 애쓰는 와중에 이 책을 쓰려고 한 이유는 뭔가요?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 혼자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소멸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이 정책들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내가 가지게 된 것들만큼은 그분들께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Q. 그 주인공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통상절차법에 대해 이 책에 썼는데요, 그 법은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경험하고 나서 만든 거였어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영감을 준 촛불소녀와 촛불시민 같은 주인공들이 있죠.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은 온전히 농민들이 만들어내신 거라 그분들이 주인공이고요. 기업살인처벌법은 산재로 고통 받은, 지금도 위험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이 만든 법인 거죠. 그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들께 "당신들의 목소리가 이런 법안을 만드는 데까지 갔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집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국회의원들이 임기를 마칠 때쯤 되면 지역구 주민들께 의정보고서를 돌리기도 하고 정책보고서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그런 일을 할 겨를조차 없이 그저 해산 결정에 따라서 강제된 스스로의 사망신고를 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작년 10월 중순에, 갑자기 잊혀가는 정책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오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웃음) 책에는 맺음말로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글을 먼저 썼고, 그 뒤로 두 달 반 정도 쓴 것 같아요.
Q. 책에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성도 많이 있습니다. 뼈아픈 기억을 되짚어야 했기 때문에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쓰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몇 분을 뵐 일이 있었어요. 당이 해산당하고 나서, (세월호 가족처럼) 고통을 겪고 계신 당사자 분들을 잘 못 뵙겠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그러다가 작년 11월쯤에 기회가 있어서 뵀어요. 뵙고 나서 한참 몸살을 앓았어요. 그분들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제가 너무 싫더라고요. ‘잘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건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 책을 내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괴감이 많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Q. 11장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각 장마다 있는 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이 구성은 직접 아이디어를 내신 건가요?
박홍규 화백님의 ’무제’라는 그림,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을 다룬 장에 실린 그림을 책에 꼭 넣고 싶었어요. 농민들이 앉거나 서 있는 뒷모습을 그렸는데, 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이 꽂힌 대상은 화폭에 등장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백님의 설명은 "농민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라는 말이었어요. 박 화백님도 농민이기 때문에 차마 그릴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태풍이 오고, 정부는 무관심하고, 그해 농사지은 것들을 다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농민의 한 해가 다 날아가는 상황을 그린 거예요.
그 그림을 책에 싣고 싶다고 화백님께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시면서, 당신이 그리신 그림 가운데 책과 맞는 것이 있으면 더 써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짧은 기간에 네 작품 정도를 새로 그려주셨어요. 굉장히 마음이 찡하고 참 감사하더라고요. 책 편집도 한 달 정도로 굉장히 빨리 한 것인데, 책을 받아보고 나서 출판사에서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주셨다는 게 느껴져서 참 고마웠어요.
Q. 각 장마다 다른 책에서 찾은 시구나 감성적인 글귀들이 인용돼 있습니다. 전부 직접 읽고 찾은 것인가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죠.
지금도 독서노트를 쓰는데요, 거기서 골라낸 글들이에요. (기자 : 얼마나 된 습관인가요?) 몇 년 안 됐어요. 삼사 년?(웃음) 평소에도 좋아하는 글귀는 1장 기업살인처벌법 부분에 실린 김해화 시인의 ’이렇게 나뉜 사랑-상사화’라는 시예요. 김해화 시인께서 철근 일을 지금도 하시는데, 당신이 일하시면서 느끼는 생생한 감성들이 날 것 그대로가 아닌, 한번 아픔을 겪으면서 걸러지고 다듬어진 것으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읽었어요. 시를 책을 싣도록 허락해주셔서 애독자로서 매우 영광이었어요.
"혁명을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 헌법 안의 진보만 생존 가능"
Q.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기업살인처벌법에 대한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온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일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너무 비극적이고, 한 순간도 연장돼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동자가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또 세월호 참사처럼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먼저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진보의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해요.
Q. 기업살인법 부분을 보면 ’정명(正名)’이라는 단어와 함께 "진보정당이 만들어내는 대안은,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진보세력이 시급하게 만들어내야 할 말, "말하지 못했던"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보도 혁명이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가 됐잖아요.(웃음) 인류의 역사는 혁명으로 진보해온 거죠.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헌법 안의 진보’만을 생존 가능한 것으로 만들잖아요. 세상을 정말 근본에서 바꾸고 싶다면 그 말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저항권이고, 저항권이야말로 헌법의 핵심이고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죠.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민주주의 자체를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Q. 책에서 "평화를 이상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는데, 지금 가장 필요한 평화정책을 법안의 형식으로 제안하자면요?
아마 ’한반도 평화협정 비준동의안’쯤 되겠죠. 제가 제안한 정책 가운데 ‘한반도 4자 평화선언’에 대해 책에 한 꼭지를 넣으려다가 넣지 못했어요. 한반도에서 분쟁상태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 정전(停戰) 상태가 아니라 평화 상태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종전(終戰)선언이 가장 시급하다고 제안드린 바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평화협정 이야기가 중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고 북-미 간에도 의논이 있었다고 하고,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Q. 그 이야기를 책에 쓰려다가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회의원 일을 하면서도 늘 고민스러웠는데요, 평화통일 문제를 다룰 때 국회의 논의만으로는 참 쉽지 않더라고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대외관계와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정당 입장에서도 정책을 제안할 수는 있는데 당장 국회에서 뭔가를 통과시키기가 어려워서, 이 책에 하나의 장으로 담지는 못했어요. 다만 국회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분단의 올가미에 사로잡혀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일만은 없게 하는 것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차별금지법과 대체복무법에 담겨 있는 거죠. 이 정도라도 국회가 해준다면 분단에 발목 잡히지 않는 진전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비슷한 맥락에서 군데군데 국가보안법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철폐가 답이라 생각하시기 때문인가요?
만약에 제가 ‘꼭 없애야 할 법 열한 가지’ 이런 책을 썼다면 국가보안법이 첫 번째로 들어가겠죠.(웃음)
Q. 통상절차법을 다룬 부분에서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꼭 만들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국회 들어오기 전에 제가 기지촌 여성 문제부터 주한미군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다뤘어요.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 인권 문제들을 보게 됐는데 그때 가진 의문이 있어요. ’우리 정부가 아무리 나하고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적어도 외국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안에서는 투닥투닥 서로 싸워도 밖에 나가면 우리 식구가 좀 번듯하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인 거죠.(웃음)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대외적 독립성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독립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국민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한미관계부터 우려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그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나가고 싶었어요. 특히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잖아요. 그 에너지가 성과를 남기기를 바랐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 게 진보, 결국 남는 건 사랑"
Q. 책의 마지막은 ‘사랑’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사랑하기에 진보다." 어찌 보면 좀 뻔하고 뜬구름 같은 사랑이란 말을 마지막에 한 이유는 뭔가요?
유행가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죠.(웃음)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얼굴들이 잘 안 잊히기 때문이었어요. 진보라는 것이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의 현실도 계속해서 바뀌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해법도 계속 바뀌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면, 결국 고갱이로 남는 건 사랑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니까 그걸 표현한 겁니다.
Q. 최근 민중정치연합(인터뷰 이후 민중연합당으로 정식 창당)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이 목격됩니다. 옛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이유로 “재건 통진당”이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 마음들이 어떤 순간에는 민주노동당으로, 또는 통합진보당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모일 수 있는 거죠. 보수언론들에서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사람의 말할 권리와 모일 권리가 보장돼야 민주주의 사회인 건데요,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덕분이라는 것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웃음)
Q. 과거 한 강연에서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추천하시는 걸 봤습니다. 당 해산 이후, 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당 해산 이후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봤어요. 네루다가 1945년에 칠레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광부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니죠. 그 장면을 쓴 대목이 있어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 한 대목을 읽음)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노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에서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제조업 공장 생산라인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순간이었어요. 여기저기 불꽃도 튀고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정신없어요. 비닐장갑도 끼고 목장갑도 두 겹씩 끼고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면 그 장갑을 하나하나씩 벗고 손을 잡아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짜릿해요.(웃음) 네루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나서 많이 와닿았어요. 누군가에게 ‘맞아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군가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마음을 주는 대상이 되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죠.
Q. 읽어주신 대목 중에서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라는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이 전 대표님 스스로가 ‘아픔을 생각해주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문득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요,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안 남아도 괜찮아요.(웃음) … 그게 욕심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Q. 마지막 질문은 대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질문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언제쯤이면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준비가 언제 끝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인터파크도서 북DB와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제공합니다. 북DB 기사 보기)

사진 : 신동석 · by 글/사진 최규화
※ 3단계의 점층적 형식으로 선보이는 ‘프리즘 인터뷰’입니다. 삼각형의 틀을 통해 빛을 다채롭게 보여주는 프리즘처럼 작가와 책에 대한 이야기를 쉽고 다양하게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 기자 말
[프리즘①] 이정희의 말, 말, 말
-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것".
- "(민중연합당을)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프리즘②]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
- 이정희는 누구? :
혹시 그 이정희? 맞다. 그 이정희다. 2012년 대통령선거 토론회에서 집권여당 후보에게 “당신 떨어뜨리려 나왔다”라고 말하던 사람. 2014년 12월 19일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한 통합진보당의 대표. 정당 해산 이후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아까운 진보 정치인’과 ‘시대착오적 운동권 정치인’ 사이 어디쯤에 있다. 인터뷰를 시작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더니, 그녀는 "그냥 좀 천천히 삽니다"라고 말하며 웃어 보였다.
- 어떤 책을 냈나 :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책, <진보를 복기하다>다. 통합진보당의 핵심 과제로 추진됐지만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무시당한 것, 또는 주목받게 되어 비난을 불러온 것”들 가운데, "진보의 대안을 담고 심어진 새싹"들을 골라 담았다. 참신하거나 근본적이거나 절박한 것들부터. 그렇다고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이정희와 통합진보당이 직시해야 할 잘못과 한계가 깊은 반성과 함께 담겨 있다. 어떤 독자는 이렇게 한 줄 서평을 남겼다. “딱 이정희 같다."
- 지금 왜 이정희를 만났나:
통합진보당이 해산되던 2014년 겨울부터 계절이 한 바퀴 돌아 다시 겨울이 되고 봄을 바라보기까지, 1년 2개월 동안 정치판과 언론에서 이정희는 사라졌다. 그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가 2월 20일 보도된 ‘주간경향’ 인터뷰다. 그리고 이번이 그녀가 다시 마이크 앞에 선 두 번째 인터뷰. 정치인 이정희를 ‘저자 이정희’로 만나, 그녀가 책에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뼈아픈 패배를 곱씹으며 한 글자 한 글자 남긴, 이정희식의 사죄를 따라 읽기 위해서였다.
- 인터뷰 현장 스케치 :
진보정책에 대한 책을 썼지만 그녀는 정치평론가나 정책 입안자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독자들 앞에서 서서 반성문을 읽는 느낌과 비슷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할 때도 대답을 하기 전에 한참씩 말을 멈추며,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진보와 보수 양쪽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예민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분명 그 점을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긴 고민 끝에 나온 그녀의 말에는 분명한 사죄의 대상만큼이나 분명한 질타의 대상도 있었다.
[프리즘③] 일문일답 들여다보기
Q. 2월 20일, 진보당 해산 이후 처음으로 한 인터뷰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 머리에서 "살아보려고 애를 썼습니다"라는 대답을 읽었는데, 살아보려고 애쓰는 와중에 이 책을 쓰려고 한 이유는 뭔가요?
제 것이 아니라서요. 진보정당이 해온 일들 가운데 의미 있다고 평가될 만한 일들이, 통합진보당이 해산당하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이 무척 아까웠어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저 혼자 이것들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소멸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원래 이 정책들을 만들어낸 주인공들이 있는데, 적어도 그분들의 노력에 의해서 내가 가지게 된 것들만큼은 그분들께 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많았어요.
Q. 그 주인공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를 말하는 건가요?
통상절차법에 대해 이 책에 썼는데요, 그 법은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경험하고 나서 만든 거였어요. 사회적인 분위기를 만들고 영감을 준 촛불소녀와 촛불시민 같은 주인공들이 있죠.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은 온전히 농민들이 만들어내신 거라 그분들이 주인공이고요. 기업살인처벌법은 산재로 고통 받은, 지금도 위험에 놓여 있는 노동자들이 만든 법인 거죠. 그분들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분들께 "당신들의 목소리가 이런 법안을 만드는 데까지 갔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Q. 집필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국회의원들이 임기를 마칠 때쯤 되면 지역구 주민들께 의정보고서를 돌리기도 하고 정책보고서를 만들기도 하거든요. 저희는 그런 일을 할 겨를조차 없이 그저 해산 결정에 따라서 강제된 스스로의 사망신고를 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거든요. 작년 10월 중순에, 갑자기 잊혀가는 정책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 오후부터 쓰기 시작했어요.(웃음) 책에는 맺음말로 들어가 있지만 일단 그 글을 먼저 썼고, 그 뒤로 두 달 반 정도 쓴 것 같아요.
Q. 책에 단순히 정책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에 대한 반성도 많이 있습니다. 뼈아픈 기억을 되짚어야 했기 때문에 집필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언제였나요?
쓰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 몇 분을 뵐 일이 있었어요. 당이 해산당하고 나서, (세월호 가족처럼) 고통을 겪고 계신 당사자 분들을 잘 못 뵙겠더라고요. 너무 죄송해서. 그러다가 작년 11월쯤에 기회가 있어서 뵀어요. 뵙고 나서 한참 몸살을 앓았어요. 그분들에게 힘이 되지 못하는 제가 너무 싫더라고요. ‘잘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이런 건 잊지 말아주세요’라고 이 책을 내놓을 자격이 있는 것인지 자괴감이 많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때 많이 힘들었어요.
Q. 11장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각 장마다 있는 농민화가 박홍규 화백의 그림이 인상적입니다. 이 구성은 직접 아이디어를 내신 건가요?
박홍규 화백님의 ’무제’라는 그림, 국민기초식량보장법을 다룬 장에 실린 그림을 책에 꼭 넣고 싶었어요. 농민들이 앉거나 서 있는 뒷모습을 그렸는데, 한 곳을 바라보고 있지만 시선이 꽂힌 대상은 화폭에 등장하지 않아요.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화백님의 설명은 "농민이라면 그것이 무엇인지 다 안다"라는 말이었어요. 박 화백님도 농민이기 때문에 차마 그릴 수 없었을지도 몰라요. 태풍이 오고, 정부는 무관심하고, 그해 농사지은 것들을 다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농민의 한 해가 다 날아가는 상황을 그린 거예요.
그 그림을 책에 싣고 싶다고 화백님께 요청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주시면서, 당신이 그리신 그림 가운데 책과 맞는 것이 있으면 더 써도 좋다고 해주셨어요. 그리고 굉장히 짧은 기간에 네 작품 정도를 새로 그려주셨어요. 굉장히 마음이 찡하고 참 감사하더라고요. 책 편집도 한 달 정도로 굉장히 빨리 한 것인데, 책을 받아보고 나서 출판사에서 애정을 가지고 만들어주셨다는 게 느껴져서 참 고마웠어요.
Q. 각 장마다 다른 책에서 찾은 시구나 감성적인 글귀들이 인용돼 있습니다. 전부 직접 읽고 찾은 것인가요? 그중 가장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면 하나만 꼽아주시죠.
지금도 독서노트를 쓰는데요, 거기서 골라낸 글들이에요. (기자 : 얼마나 된 습관인가요?) 몇 년 안 됐어요. 삼사 년?(웃음) 평소에도 좋아하는 글귀는 1장 기업살인처벌법 부분에 실린 김해화 시인의 ’이렇게 나뉜 사랑-상사화’라는 시예요. 김해화 시인께서 철근 일을 지금도 하시는데, 당신이 일하시면서 느끼는 생생한 감성들이 날 것 그대로가 아닌, 한번 아픔을 겪으면서 걸러지고 다듬어진 것으로 담겨 있어서 무척 감사하게 읽었어요. 시를 책을 싣도록 허락해주셔서 애독자로서 매우 영광이었어요.
"혁명을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 헌법 안의 진보만 생존 가능"
Q. 버리기 아까운 진보정책 열한 가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가운데 기업살인처벌법에 대한 이야기가 맨 앞에 나온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가장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일하다가 목숨을 잃어야 하는 상황은 너무 비극적이고, 한 순간도 연장돼서는 안 되는 거잖아요.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노동자가 일하다가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또 세월호 참사처럼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없는 것. 사람의 목숨을 지키는 일이 가장 먼저인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고 진보의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해요.
Q. 기업살인법 부분을 보면 ’정명(正名)’이라는 단어와 함께 "진보정당이 만들어내는 대안은,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말을 만들어주는 데서 시작된다"라는 문장이 나옵니다. 지금 진보세력이 시급하게 만들어내야 할 말, "말하지 못했던" 말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진보도 혁명이라는 말을 감히 입에 담지 못하는 시대가 됐잖아요.(웃음) 인류의 역사는 혁명으로 진보해온 거죠. 그런데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을 ’더 이상 말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놓고 ’헌법 안의 진보’만을 생존 가능한 것으로 만들잖아요. 세상을 정말 근본에서 바꾸고 싶다면 그 말을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바로 저항권이고, 저항권이야말로 헌법의 핵심이고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죠.
제가 이 책을 통해서 되살리고 싶었던 것은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자세, 태도예요. ’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아니면 ’요 정도만 말해야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자기검열을 벗어나서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하고,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민주주의 자체를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되는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요.
Q. 책에서 "평화를 이상으로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는데, 지금 가장 필요한 평화정책을 법안의 형식으로 제안하자면요?
아마 ’한반도 평화협정 비준동의안’쯤 되겠죠. 제가 제안한 정책 가운데 ‘한반도 4자 평화선언’에 대해 책에 한 꼭지를 넣으려다가 넣지 못했어요. 한반도에서 분쟁상태를 완전히 종식시키는 것, 정전(停戰) 상태가 아니라 평화 상태로 질적으로 전환시키는 종전(終戰)선언이 가장 시급하다고 제안드린 바 있는데,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해요. 최근에 평화협정 이야기가 중국에서도 제기된 바 있고 북-미 간에도 의논이 있었다고 하고, 우리 정부와 시민사회도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Q. 그 이야기를 책에 쓰려다가 쓰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국회의원 일을 하면서도 늘 고민스러웠는데요, 평화통일 문제를 다룰 때 국회의 논의만으로는 참 쉽지 않더라고요.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대외관계와 얽힌 문제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거예요. 정당 입장에서도 정책을 제안할 수는 있는데 당장 국회에서 뭔가를 통과시키기가 어려워서, 이 책에 하나의 장으로 담지는 못했어요. 다만 국회가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다양성이 분단의 올가미에 사로잡혀서 정체되거나 후퇴하는 일만은 없게 하는 것은 책임지고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차별금지법과 대체복무법에 담겨 있는 거죠. 이 정도라도 국회가 해준다면 분단에 발목 잡히지 않는 진전의 길을 열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Q. 비슷한 맥락에서 군데군데 국가보안법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국가보안법을 하나의 주제로 다루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개정이 아니라 철폐가 답이라 생각하시기 때문인가요?
만약에 제가 ‘꼭 없애야 할 법 열한 가지’ 이런 책을 썼다면 국가보안법이 첫 번째로 들어가겠죠.(웃음)
Q. 통상절차법을 다룬 부분에서 "이 법만큼은 내 손으로 꼭 만들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읽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국회 들어오기 전에 제가 기지촌 여성 문제부터 주한미군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다뤘어요. 주민들의 생존권 문제, 인권 문제들을 보게 됐는데 그때 가진 의문이 있어요. ’우리 정부가 아무리 나하고 의견이 다르다고 해도 적어도 외국과의 문제에 있어서는 자존심을 좀 지켜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안에서는 투닥투닥 서로 싸워도 밖에 나가면 우리 식구가 좀 번듯하게 뭔가 해주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인 거죠.(웃음)
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대외적 독립성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정부가 독립성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우리 국민들의 인권을 먼저 생각하기보다 한미관계부터 우려하는 일들을 너무 많이 본 거예요.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는 그런 문제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해나가고 싶었어요. 특히나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우리가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잖아요. 그 에너지가 성과를 남기기를 바랐죠.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원하는 게 진보, 결국 남는 건 사랑"
Q. 책의 마지막은 ‘사랑’ 이야기로 끝났습니다. "사랑하기에 진보다." 어찌 보면 좀 뻔하고 뜬구름 같은 사랑이란 말을 마지막에 한 이유는 뭔가요?
유행가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죠.(웃음)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이 길을 계속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일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 얼굴들이 잘 안 잊히기 때문이었어요. 진보라는 것이 특정한 이념이나 이론에 한정되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사회의 현실도 계속해서 바뀌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해법도 계속 바뀌어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사회를 좋게 바꾸고 싶고 그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진보라면, 결국 고갱이로 남는 건 사랑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살아가는 원동력이었으니까 그걸 표현한 겁니다.
Q. 최근 민중정치연합(인터뷰 이후 민중연합당으로 정식 창당)에 대한 보수언론의 비판이 목격됩니다. 옛 통합진보당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는 점을 이유로 “재건 통진당”이라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스스로 세상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의 마음을 없앨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런 마음들이 어떤 순간에는 민주노동당으로, 또는 통합진보당으로 표현됐을 수도 있고, 또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모일 수 있는 거죠. 보수언론들에서 ‘통합진보당의 재판(再版) 아니냐’ 얘기하는 건,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던 사람은 영영 정치적 결사를 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말고 정치적 발언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강요하는 거예요.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죠. 사람의 말할 권리와 모일 권리가 보장돼야 민주주의 사회인 건데요, 언론이 존재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 덕분이라는 것을 좀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웃음)
Q. 과거 한 강연에서 헬렌 니어링의 책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추천하시는 걸 봤습니다. 당 해산 이후, 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인상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당 해산 이후에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을 봤어요. 네루다가 1945년에 칠레 북부의 광산지역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해요. 선거운동을 하면서 광부들을 일일이 만나러 다니죠. 그 장면을 쓴 대목이 있어요.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 한 대목을 읽음)
햇볕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힘겨운 노동으로 얼굴이 상하고 먼지 때문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광부가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사람처럼 노타 탄광의 갱도에서 나오더니 나를 보자마자 대번에 투박한 손을 내밀고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오래전부터 당신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런 묵직한 순간이 바로 내가 받은 상이다. 이것이 바로 내 시의 월계관이자, 척박한 광산 지역에 형성된 삶의 여유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칠레의 바람과 밤과 별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8장 ‘암담한 조국’ 중에서
제가 진보정당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았던 순간이 제조업 공장 생산라인에 들어가서 노동자들을 만나는 순간이었어요. 여기저기 불꽃도 튀고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고 정신없어요. 비닐장갑도 끼고 목장갑도 두 겹씩 끼고 일하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제가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하면 그 장갑을 하나하나씩 벗고 손을 잡아주시는 거예요. 그 순간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짜릿해요.(웃음) 네루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그 순간이 다시 생각나서 많이 와닿았어요. 누군가에게 ‘맞아 나는 외롭지 않아. 누군가 같이해주는 사람이 있어.’ 이런 마음을 주는 대상이 되는 건 참 행복한 일이겠죠.
Q. 읽어주신 대목 중에서 "네 아픔을 생각해 주는 시인이 있어"라는 문장이 와닿았던 것은, 이 전 대표님 스스로가 ‘아픔을 생각해주는 정치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문득 드리고 싶은 질문인데요, 결국에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안 남아도 괜찮아요.(웃음) … 그게 욕심인 것 같아서요.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Q. 마지막 질문은 대개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것인데 아무래도 이번에는 질문을 좀 바꿔야겠습니다. 언제쯤이면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조금이라도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갈 준비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준비가 언제 끝날지는 잘 모르겠어요.
(인터파크도서 북DB와의 콘텐츠 제휴를 통해 제공합니다. 북DB 기사 보기)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2270호 채택

"70년 유엔 역사상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한 제재"
이광길 기자  |  gklee68@tongil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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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3.03  00:3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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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3일 0시 17분(한국시간) '대북 제재 결의 2270호'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지난 1월 6일 북한이 핵실험을 단행한지 57일만이다. 
결의 2270호는 전문 12개항, 본문 52개항, 그리고 4개 부속서로 구성 돼 있다. △무기 거래, △제재대상 지정, △확산 네트워크, △해운.항공 운송, △대량살상무기(WMD) 수출통제, △대외교역, △금융거래, △제재 이행 분야에서 기존 결의 2094호 등에 들어있는 조치들이 대폭 강화됐다.
나아가 기존 결의에는 들어있지 않은 새로운 조치들도 다수 포함됐다. 
우선, 주권국가의 자위권 유지 차원에서 허용됐던 소형무기(small arms) 수입까지 금지했다. 전면적인 무기 금수 조치가 취해진 것이다. 재래식 무기 생산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물품 거래를 불허(catch-all 수출통제)하고, 군사훈련 교관 파견 등 군경협력도 불법화했으며, 무기 수리.거래를 위한 운송도 금지했다. 
국가우주개발국, 원자력공업성, 노동당 군수공업부 등 단체 12곳과 현광일 국가우주개발국 과학개발부장, 리만건 노동당 군수공업부장, 최춘식 제2자연과학원장 등 16명을 제재대상으로 추가 지정했다. 미.중의 초안에 들어있던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 러시아 대표는 러시아 측의 문제제기로 최종 명단에서 빠졌다. 이에 따라, 유엔 차원에서 제재대상으로 지정된 북한 단체는 32개, 개인은 28명으로 늘었다. 
제재 회피나 위반에 연루된 북한 외교관과 정부 대표 추방을 의무화했다. 북한의 불법행위에 연루된 외국인 추방도 의무화했다. 
북한을 들고나는 모든 화물에 대한 전수조사가 의무화됐다. '금지 품목이 포함됐다고 믿을 만한 이유'라는 요건을 없애 각 나라가 원하면 언제든 모든 북한 화물을 검색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금지품목을 적재한 것으로 의심되는 북한 항공기의 이착륙 및 영공통과가 금지됐다. 북한이 제3국 항공기.선박을 대여해 제재 회피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제재 대상이 된 선박이나 불법활동 연루 의심 선박 입항을 금지했다. 특히, 이미 제재대상이 된 원양해운관리회사(OMM) 소속 선박 31척을 자산동결대상으로 명시했다.
대량살상무기(WMD) 관련 모든 물품에 대한 수출통제(catch-all)를 의무화하고, 핵.탄도미사일 관련 교육.훈련 프로그램 제공이 금지되며, 탄도미사일 발사 관련 모든 기술 협력이 금지됐다. "북한의 '우주의 평화적 이용'을 가장한 탄도미사일 능력 증강을 방지하고, 유.무형의 모든 기술 이전을 차단(정부 당국자)"하자는 취지다.  
북한산 석탄, 철, 철광 수입을 금지했다. 북한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는 석탄 거래를 차단해 돈줄을 죄겠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 목적으로 WMD와 무관한 경우는 수출 예외를 적용했다. 금, 바나듐광, 티타늄광, 희토류 수출은 예외없이 전면 금지됐다.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북한 나진항을 통해 다른 나라로 운송되는 러시아산 석탄에 대해서는 예외가 인정됐다. 
로켓 연료를 포함한 항공유 수출이 금지됐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의 전투기는 물론 민항기 운항이 위축되어 북한의 대외 인적.물적 교류가 축소되고, 북한 공군 운용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고 기대했다. 러시아의 요구에 따라, 북한 민항기에 대한 해외급유가 허용됐다.
 
북한에 대한 금융제재가 대폭 강화됐다. 북한 은행의 해외 지점.사무소 신규 개설이 금지됐을 뿐 아니라, 기존 지점에 대해서도 90일 이내 폐쇄를 요구했다. 유엔 회원국 금융기관의 북한 내 사무소나 은행계좌 개설도 금지됐으며, 기존 사무소나 계좌도 인도지원 등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90일 이내에 폐쇄하도록 했다. 국제금융시스템에서 사실상 축출된 북한이 금괴 등을 이용해 제재를 우회할 가능성도 차단했다. 
금수 대상 사치품도 기존 7개(진주, 보석, 보석용 원석, 귀금속, 요트, 고급자동차, 경주용차)에서 12개로 늘었다. 고급 손목시계, 수상 레크레이션 장비, 스노우모빌, 납 크리스탈, 레크레이션 스포츠 장비가 추가된 것이다. 
안보리 결의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북한 인권문제가 거론됐다. 전문에 "북한 주민이 처한 심각한 고난(grave hardship)에 대해 깊이 우려"하는 표현이 들어갔다. 
정부 당국자는 "금번 안보리 결의는 70년 유엔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군사적 조치로는 가장 강력하고 실효적인 제재 결의"라고 자평했다. "북한의 WMD 개발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WMD 차원을 넘어서 북한 관련 제반 측면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제재 조치들이 포괄적으로 망라돼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관계부처 회의를 통해 국내 이행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이행해나갈 예정이다. "아울러 우방국들과 공조해 모든 유엔회원국들이 이번 결의를 철저히 이행해나갈 수 있도록 적극적인 외교 노력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행과정에서 열쇠를 쥔 나라는 여전히 중국이다. 훙레이(洪磊)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1일 "만일 결의가 통과된다면, 중국은 착실하게 결의를 준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달 28일부터 방한 중인 우다웨이(武大偉) 중국정부 한반도사무특별대표도 한국 측 당국자에게 '전면적인 이행'을 다짐한 것으로 알려졌다.
2일자 단둥발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은 1일부터 자국 내 금융기관에 북한 기업 및 개인에 대한 달러화 및 위안화 송금 중단 지시를 내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1일 중국이 일부 항구에서 북한산 광물 수입 금지 조치를 취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2일(현지시간) 안보리 결의 2270호 채택에 맞춰 북한 국방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 등 단체 5곳과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과 오극렬, 리용무 국방위 부위원장, 박영식 인민무력부장 등 개인 12명을 제재목록에 추가했다.  
(추가, 02:40)
<유엔 안보리 추가 제재 대상>
0 단체 (12곳)

국방과학원, 청천강해운, 대동신용은행, 혜성무역회사, 조선광선은행, 조선광성무역회사, 원자력공업성, 군수공업부(또는 기계공업부), 국가우주개발국, 39호실, 정찰총국, 제2경제위원회.
0 개인 (16명)
최춘식 (전) 제2자연과학원장, 최성일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 현광일 국가우주개발국 과학개발부장, 장범수 단천상업은행 시리아 대표, 장용선 조선광업개발무역회사(KOMID) 이란 대표, 전명국 단천상업은행 시리아 대표, 강문길 남천강무역회사 대표, 강룡 KOMID 시리아 대표, 김중종 단천상업은행 베트남 대표, 김규 KOMID 대외업무담당, 김동명 단천상업은행장, 김영철 KOMID 이란 대표, 고태훈 단천상업은행 대표, 리만건 군수공업부장, 류진 KOMID 시리아 대표, 유철우 국가우주개발국장.  
(자료제공-외교부)   

전임 대통령이 깔아놓은 남북 도로 역주행

클린턴이 DJ에게 맡긴 운전대, '폭주족'이 잡았다

16.03.03 20:09l최종 업데이트 16.03.03 20:09l




북한은 왜 핵개발에 착수하게 된 것일까? 1차적 배경은 1991년까지 존재한 주한미군 전술핵무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냉전 종식 이후 북한의 안보우산이었던 북-중-러 북방삼각동맹이 사실상 붕괴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남한이 러시아(1990년)-중국(1992년)과 수교함에 따라 냉전시기의 북방삼각동맹이 깨진 반면, 북한은 자국이 추진했던 북-일, 북-미 수교협상이 실패함에 따라 독자 생존을 위해 핵무기 보유의 필요성을 느꼈다는 것이다. 북한의 핵개발 배경은 동구권의 몰락과 외교적 고립으로 인한 경제난, 중-러 안보우산의 상실 같은 복합적 요인들이 중첩돼 있지만, 결국 핵심은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북한은 이 시기에 핵개발을 추진하면서 적대적인 안보환경을 변화시키고자 외교적 노력을 병행했다. 북한은 북미 대화에서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 폐기를 통한 한반도 평화보장체제와 북미 수교를 요구했으며, 그 결과로 '북미 공동성명'(1993)과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1994), '국제테러에 관한 북미 공동성명'(2000), '북미 공동코뮤니케'(2000) 등에 잇달아 합의했다.

북한은 특히 '국제테러 공동성명'에서 모든 국가와 개인에 대한 테러행위에 대해 반대할 것임을 공식 표명하고 테러 관련한 유엔협약 등의 가입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부시 공화당 행정부의 등장으로 북미관계는 수교 문턱에서 멈춰 섰다. 역사에서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클린턴을 계승한 엘 고어 민주당 행정부가 들어섰으면 북미 수교까지 갔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MAD(상호확증파괴)에서 NPR(핵태세검토)로

2001년 9.11테러 이후 부시 정부는 북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 선제공격 독트린'을 담은 '핵태세보고서 2001'(NPR 2001)을 발표했다. 이에 북한은 반발하면서 핵무기 개발을 서둘렀다. 4년의 허송 세월 끝에 부시 2기 행정부는 2005년 9월 4차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북미 수교, 동북아 다자안보체제의 구축을 교환하는 내용의 '9.19공동성명'을 체결했다. 그러나 미국은 공동성명과는 별도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의 북한 관련계좌 동결조치를 병행했고, 북한은 강력히 반발했다.

북한은 미국과 BDA 문제를 줄다리기한 끝에 2007년 2.13합의를 위한 대화의 장으로 나왔으나, 2008년 8월 김정일의 건강악화 이후 핵개발을 협상-보유 양면카드에서 보유 쪽으로 전환하는 전략적 노선 변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북한은 2009년 1월 김정은 3대 세습체제를 내부적으로 결정한 뒤, 핵무기 개발과 이를 운반할 장거리로켓의 개발에 한층 박차를 가해왔다는 것이 조성렬 박사(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 등 많은 전문가의 시각이다.

인류가 첫 핵실험을 한 해는 1945년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현재 전세계 추정 핵무기는 15,800여 기로 미국-러시아가 전체의 93%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작전 배치된 핵무기는 4,500여 기로 추정된다. 그보다 더 많은 핵무기들이 그동안 감축되거나 해체되었다. 결과적으로 인류가 만든 수만 개의 핵무기 중에서 실전에 사용된 것은 '리틀 보이'와 '팻 맨', 두 개뿐이었다. 전자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우라늄탄이고, 후자는 사흘 뒤에 나가사키에 떨어뜨린 플루토늄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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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 시기 핵억지력으로 작동해온 상호확증파괴 (MAD)는 너 죽고 나 죽자?
ⓒ 나무위키

핵무기의 가공(可恐)할 위협을 감안하면 '뿐'이라는 조사는 부적절하다. 하지만 지난 70년 동안 생산-배치된 수만 기의 핵무기 중에서 실전에 사용된 것이 2기뿐인 까닭은 'MAD' 덕분이었다. 미-소 양극체제 하에서 상대방에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너 죽고 나 죽자"는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냉전 시기에 '공포의 균형(balance of terror)'을 유지하는 억지력으로 작동되어온 MAD(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호확증파괴)는 UAD(Unilateral Assured Destruction, 일방적확증파괴)로 바뀌었다. 계기는 2001년 9.11테러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NPR(Nuclear Posture Review, 핵태세검토)이다.

냉전 시기 미국과 구소련은 전략폭격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핵잠수함으로 구성된 '핵 3원체제(Nuclear Triad)'로 핵억지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9.11테러는 상호확증파괴에 의한 보복 억지전략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죽으려고 달려드는 놈한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9.11테러 이후 미국은 자살을 무릅쓴 핵테러리즘으로부터 본토를 방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핵전략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기존의 Triad를 대체하는 New Triad(핵무기와 비핵무기 및 방어무기체계의 '새로운 조합')로 공격적 타격시스템을 구축하고 선제적 핵공격 의지를 명문화한 미 국방부의 NPR 보고서가 나온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선제 핵공격 대상국

2002년 1월 미 국방부가 의회에 보고했다가 언론에 공개된 NPR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미국방부는 유사시 핵무기 사용대상국으로 핵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 외에도 당시 부시 대통령이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이라며 '악의 축'으로 규정한 북한, 이라크, 이란, 리비아, 시리아 등 5개국을 지목한 바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은 잠재적 핵공격 대상국을 늘렸을 뿐 아니라, ▲ 지하군사시설에 대한 공격 ▲ 상대방의 핵-생화학무기 공격에 대한 보복 ▲ 돌발적인 군사사태 등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상황을 종전보다 훨씬 더 폭넓게 상정했다. 보고서는 이런 상황에 쓰기 위해 적합한 소형 특수핵무기를 새로 개발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미국은 이 5인의 악당 국가 가운데 이라크에 이어 리비아, 시리아를 무력으로 침공했고, 이란과는 강온 양면으로 핵협상을 타결지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2010년 4월에 발표한 '핵태세보고서 2010'(NPR 2010)에 따르면, 북한은 여전히 핵무기 선제공격 대상국이다.

오바마는 NPT 탈퇴국가 및 위반국가에 대해 소극적 안전보장(Negative Security Assurance)을 제외한다는 '제한적 핵선제공격 독트린'을 유지했다.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와 중국을 제외하면, 현재 미국의 핵선제공격 대상국은 북한뿐이라는 얘기다. 이에 북한은 "미국의 핵 위협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각종 핵무기를 필요한 만큼 늘리고 현대화하게 될 것"이라고 핵보유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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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 세계 핵무기 보유 현황(2016년 기준)

그러나 <CIA팩트북> 등을 참조해 작성한 CNN의 '세계 핵보유 현황'([표] 참조)에서 보듯, 북한의 추정 보유핵무기는 10기 미만이고, 작전 배치된 핵무기는 없다. 아직은 탄두의 경량화-소형화에 이르지 못했고 핵폭탄의 폭발력 조절 능력도 없는 원시적 핵무기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핵선제 타격에 나설 가능성도 없지만, 그것은 곧 미국의 일방적확증파괴에 의한 북한의 '절멸'을 의미한다. 김정은이 아무리 무모하고 천지 분간을 못해도 미국과 핵무기로 싸우면 절멸뿐이라는 것쯤은 안다. 그래서 북한은 "미제를 위시한 제국주의자들은 이 나라들(이라크, 리비아)에 대량파괴무기가 없음을 확인하자 마음 놓고 침략하였다"면서 자위권 차원의 핵무기 보유노선을 고수하는 것이다.

이처럼 북한 핵문제는 94년 6월 1차 북핵 위기 이후 이미 20년이 넘게 반복된 일이다. 클린턴 행정부는 1차 북핵 위기 당시 북한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정밀폭격(surgical strike)을 계획했다. 당시 미 국무부 수석통역 김동현(미국명 Tong Kim)의 <신동아> 기고문에 따르면, 김영삼 대통령의 오랜 친구인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대사는 가족까지 피신시킬 만큼 군사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의 승인을 받기 전에 한국에 와 있던 군인 가족들과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방문 중이던 딸과 손자들을 서둘러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전쟁 시나리오에서 미군은 5만 명 이상, 한국군은 수십만 명, 일반 시민은 100여만 명이 희생될 것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일단 전쟁이 나면 김정일 정권을 제거한다는 것이 최종목표로 설정됐다. 이 목표는 현재의 작전계획에도 반영돼 있다. 필자는 이러한 작전계획 목표가 전투력 못지않게 억제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한다."(한미정상회담 통역 27년, 김동현씨가 본 '굴곡의 한미동맹', 신동아, 2005년 9월호)

클린턴 "한반도 문제는 김대중 대통령이 운전대 잡아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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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8년 6월10일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 남쪽 잔디광장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에 참석,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김대중도서관

이후 북핵 위기는 카터의 중재와 뜻하지 않은 김일성의 남북정상회담 제의로 봄눈 녹듯 해소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되었다. 대북정책에서 냉탕과 온탕을 오락가락하며 클린턴의 갈피를 못잡게 했던 김영삼이 물러나고 오랫동안 분단문제를 고심해온 전략가 김대중이 등장했다.

김대중은 98년 6월 미국을 처음으로 국빈 방문했다. 클린턴은 김대중을 남아공의 만델라, 체코의 하벨 등과 함께 이 시대의 '자유의 영웅'이라고 칭송하고 예우하면서 대북정책에 대한 설명을 요청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김대중은 신명난 어조로 30분간 자신이 평생 갈고 닦은 '햇볕정책'에 대해 설명했다. 당시 정상회담을 막후에서 조율한 임동원 외교안보수석에 따르면, 클린턴은 진지하게 경청하며 적극적인 찬동을 표시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김 대통령의 비중과 경륜을 볼 때 이제 한반도 문제는 김 대통령이 주도해주기 바란다. 김 대통령이 핸들을 잡아 운전하고 나는 옆자리로 옮겨 보조적 역할을 하겠다."(임동원, <피스메이커 : 남북관계와 북핵문제 20년>, 2008)

한국 대통령이 분단 이후 처음으로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쥐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더불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시각도 붕괴론에서 변화론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98년 11월 18일 밤 축포가 쏟아지는 가운데 정주영 명예회장을 포함해 826명의 관광객을 태운 금강산관광선이 동해항을 출발했다.

한국을 답방한 클린턴은 숙소인 신라호텔에서 두번째 관광선이 출항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는 이튿날 한미 정상회담 공동회견에서 "어젯밤 축제 분위기 속에서 관광객을 가득 태우고 출항하는 평화스런 장면을 보고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며 "매우 신기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고 말했다.

남북 화해협력의 현장을 목격한 미국 대통령의 이 발언은 한반도 위기를 외치는 강경파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코리아 리스크'로 투자를 꺼리는 외국인 투자자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클린턴이 김대중에게 '핸들'을 맡긴 결과였다. 2년 뒤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도 김대중이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을 잡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박근혜의 애국가, 4절까지 부른다고 애국자는 아니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의 자산과 부채를 모두 승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취임 초기부터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함으로써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 탓에 불가피한 측면은 있었지만, 이라크전 파병과 한미 FTA 같은 중대 사안에서 '좌측 깜박이를 켜고 우회전'하는 모습을 보여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허송 세월 끝에 성사시킨 2차 남북정상회담은 멈춰선 남북관계를 추진할 동력을 확보하기에는 너무 늦게 개최되었다.

실용주의를 표방한 이명박은 되지도 않을 '비핵개방3000'을 내세워 5년을 허송 세월로 보냈다. 이명박도 첫 미국 방문 때 부시와 함께 차를 타면서 운전대를 잡기는 했다. 그런데 부시가 내어준 것은 한반도 문제를 주도하는 차가 아니라 쇠고기 수입을 약속한 대가로 태워준 '골프카' 운전대였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라던 그가 한 것은 금강산관광 중단에 이어, 개성공단을 제외한 모든 남북경협을 중단시킨 5.24 제재조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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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4월 18일 오후(현지시각) 워싱턴D.C 북쪽 메릴랜드주 미 대통령 공식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도착, 조지 부시 대통령을 옆자리에 태운 채 골프 카트를 운전해 이동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재만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표방하며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집권 2년만에 '통일대박론'으로 국민을 들뜨게 하더니 집권 3년만에 남북관계의 마지막 보루인 개성공단마저 중단시켜, 정부를 믿고 투자한 기업인들을 하루아침에 '쪽박신세'로 만들었다. 운전에 비유하면 깜박이도 켜지 않고 차를 모는 난폭하기 짝이 없는 '후진' 운전이다. 전임 대통령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쓴 '전략적 인내'로 깔아놓은 남북관계의 고속도로를 '역주행'하는 범법운전이다.

청와대는 최근 박 대통령의 취임 3년을 기념해 3년 동안의 연설문과 회의속기록 등 공개발언 1,342건을 바탕으로 빅데이터 분석한 결과를 내놓았다. 이에 따르면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국민'(5029회), '경제'(4203회), '대한민국'(4012회) 순인 것으로 나타났다. 청와대는 특히 "국민과 대한민국이 주로 관용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제 관련어 사용이 많았던 것으로 분석된다"고 친절한 해설을 덧붙였다.

그러나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고 해서 애국자인 것 아니다. 그렇게 경제를 외쳤지만, 집권 1년차는 세월호 사건에 대한 위기관리의 무능으로 경제도 실패했다. 집권 2년차는 메르스 사태에 대한 국가방역관리의 무능함으로 역시 경제도 실패했다. 그리고 집권 3년 차는 개성공단 전면중단이라는 분단관리의 무능함으로 경제 실패를 예고했다. 세월호나 메르스와 달리 분단관리의 실패는 전쟁으로 발발하기 십상이다.

'막장 드라마' 박근혜, 불복종과 탄핵밖에 답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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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 충무실에서 열린 제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2016.2.24
ⓒ 연합뉴스

최근 국회에서 테러방지법 통과 노래를 불러온 황교안 총리가 정작 자신이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인줄도 모르고 있는 사실이 김광진 의원의 송곳질의에서 밝혀진 것도 애국가와 애국자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 필시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를 줄 알아야 애국자'라고 믿는 매우 단순한 사람인 것 같다. 요즘 박근혜의 얼굴을 보면, 30여년 전에 '전라도 출신 대학 재학생=데모 학생'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신병들을 구타한 고참의 얼굴과 중첩된다.

박근혜는 최근 국무회의에서 '코리아 리스크' 언급하며 국회를 윽박질렀다. '코리아 리스크'는 자신이 개성공단을 중단시킨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도 "사회가 불안하고 어디서 테러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경제가 또 발전할 수 있겠나"라고 국회를 겁박하고, 야당이 국회법에 보장된 필리버스터를 활용한 것에 대해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대중과 샌더스도 했고, 새누리당도 공약한 필리버스터를 '기가 막힌 현상'이라니 이쯤 되면 국정이 거의 '막장 드라마' 수준이다.

'배신'은 막장 드라마 핵심 코드 중의 하나이다. 연인의 배신, 가족의 배신, 친구의 배신 등등. 박근혜는 지금 한반도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북한과 중국, 그리고 국회(야당)의 '배신'에 분노를 감추지 못하면서 '김정은 참수작전'과 사드(THAAD), 그리고 국민의 응징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그래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치르고 나서 테러방지법을 통과시키겠다는 것이냐"고 국회에 호통을 친다. 박 대통령이야말로 도대체 전쟁이 터져 얼마나 않은 국민이 죽어야 퇴로 없는 강경몰이를 그만둘 것인지 되묻고 싶다.

남은 2년간 더는 나라가 거덜나지 않고, 이 땅의 청년들이 전쟁터로 끌려가지 않게 하려면 지금이라도 국민이 '운전면허'를 취소하는 수밖에 없다. 임기도 반환점을 지난 지 오래다. 그동안 박정희 성역화와 새마을운동 국제화,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까지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 운전대를 놓아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 국민의 불복종과 탄핵밖에는 답이 없다는 얘기다. 탄핵할 사유는 차고 넘친다.

우선 비상사태나 긴급한 사유가 없음에도 명백하게 사유재산을 침해함으로써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표방한 헌법을 위반했다. 대통령의 중요한 책무인 분단 관리에 실패해 '코리아 리스크'를 조장하고 국민을 전쟁의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3~4월에는 한미 키 리졸브-독수리훈련이 예정되어 있어 안보위기와 군사적 긴장 속에서 총선거를 치러야 할 판이다. 이 또한 민주적 헌정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제약하는 탄핵 사유다.

2016년 3월 2일 수요일

간판 폐기물 목에 걸고 러시아로 떠난 팔당 큰고니

간판 폐기물 목에 걸고 러시아로 떠난 팔당 큰고니

윤순영 2016. 03. 03
조회수 180 추천수 0
지난달 말 입체간판용 고무 폐기물 목에 건 모습 팔당서 관찰
입 벌리고 비행, 목 부어 호흡 지장 받는 듯…낚시대 걸린 흰비오리도

크기변환_DSC_5695.JPG» 플라스틱 쓰레기를 목에 건 채 날고있는 큰고니. 목이 조여 숨이 가쁜지 입을 벌린 채 팔당호 부근을 날고 있다. 사진=김응성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남양주시 지회장

목에 이상한 물체를 걸고 있는 큰고니가 발견됐다는 제보를 받았다. 김응성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남양주시 지회장이 팔당에서 2월25일 촬영한 큰고니였다.

크기변환_DSC_5693.JPG» 쓰레기는 사람의 손으로 제거해 주기 전에는 뺄 수 없게 목에 꼭 끼어 있다. 목 아래가 부어 있는 모습이 보인다.사진=김응성 

큰고니의 목에 걸린 8자 모양의 물질을 자세히 살펴보니 간판을 만들 때 쓰이는 이른바 '고무 스카시' 같았다. 입체 간판을 만들 때 쓰는 글자 모양의 고무를 가리킨다.

크기변환_YSY_1472.jpg» 이 큰고니가 나는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대부분 입을 열고 있어 목에 졸린 폐기물로 인한 호흡에 지장을 주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김응성

이 간판 폐기물은 물에 가라앉지 않기 때문에 큰고니가 먹이를 먹다가 목에 끼인 채로 점점 깊숙이 끼워진 것으로 보인다. 천연기념물인 희귀 철새가 무분별하게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먹이를 찾다가 이런 일을 당했을 것이다.

크기변환_YSY_7398.jpg» 팔당에서 월동하는 큰고니 무리. 사진=윤순영
    
크기변환__DSC5791.jpg» 얼어붙은 경안천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큰고니. 사진=윤순영

팔당에는 해마다 150여 마리의 큰고니가 찾아와 겨울을 나며 지류인 경안천을 오가며 먹이를 찾고 휴식을 취한다. 이번에 플라스틱 폐기물을 뒤집어 쓴 큰고니는 이미 번식지를 향해 북상해 팔당을 떠났다.

크기변환_DSC_5691.JPG» 힘겹게 고향길을 향하는 큰고니. 사진=김응성

크기변환_DSC_5690.JPG» 사진=김응성

큰고니는 2월말이면 월동지를 떠나 3000㎞나 떨어진 머나먼 번식지로 돌아간다. 플라스틱 목걸이를 한 팔당의 큰고니는 아마 러시아 어딘가로 향해 이동중일 것이다.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멍에를 목에 걸고….

팔당호 하류에서 팔당대교 사이의 수변공간에는 쓰레기가 여기저기 걸려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해 12월21일 이곳에서 흰비오리 한마리가 버려진 낚시대에 걸려 옴쭉달쭉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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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YSY_5942.jpg» 흰비오리는 물속으로 잠수해 물고기를 잡아먹는 겨울 철새다. 그런데 이 새는 잠수하다 버려져 땅에 박혀 있는 낚시대의 낚시줄에 다리가 걸린 것 같았다. 물속으로 들어가지도 물위에 떠오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 흰비오리는 체온 상실과 굶주림으로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사진=윤순영  

윤순영/ 한국야생조류보호협회 이사장, 한겨레 <물바람숲> 필자

2016년 3월 1일 화요일

끝내 막힌 ‘9일간의 호소’…국정원 ‘국민사찰’ 빗장 풀린다


등록 :2016-03-01 21:07수정 :2016-03-01 23:39

‘필리버스터 중단’ 결정…여·야·청에 비판 줄이어
과반 새누리, 테러방지법·선거구획정안 2일 처리
야당이 1일 밤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 종료를 최종 선언했다. 지난달 23일 시작된 필리버스터는 자정을 넘겨 2일까지 이어졌다. 여야는 2일 선거구 획정안을 담은 공직선거법을 처리해 62일 동안의 ‘선거구 부재’ 사태를 끝낼 예정이다.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의 경우, 야당은 반대표를 던지거나 아예 표결에 불참할 가능성이 높지만 과반 의석을 확보한 새누리당의 찬성으로 통과될 전망이다.
더불어민주당은 1일 심야 의원총회를 열어 필리버스터를 끝내기로 최종 결론을 냈다. 이종걸 원내대표는 본래 이날 오전 9시 필리버스터 종료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으나, 일부 의원들의 반발로 토론 시간을 더 늘렸고 저녁엔 의총을 열어 ‘마무리 전략’을 논의했다.
야당이 필리버스터에 마침표를 찍기로 한 데는, 총선을 고작 43일밖에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선거법 처리를 계속 미루다간 역풍을 맞을 수 있다고 판단한 김종인 대표 등 비상대책위의 우려가 크게 작용했다. 이번 임시회가 종료되는 10일 이후엔 곧바로 본회의를 열어 테러방지법을 표결에 부쳐야 하는 현실적 상황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전날 의원총회에서도 필리버스터를 이어가자는 의견이 우세했으나 김종인 대표와 박영선 비대위원 등이 필리버스터 중단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야당은 필리버스터를 통해 테러방지법의 문제점을 세세히 알리는 데 성공했지만, 야당 의원들이 입이 닳도록 지적한 문제점, 즉 국정원이 ‘테러위험인물’을 자의적으로 선정해 감청·금융거래 정보를 수집할 가능성은 현실화됐다. 홍익표 더민주 의원은 “국정원이 당장 테러방지법을 동원해 권한을 남용하진 않을지 몰라도 1~2년쯤 지나면 그 폐해가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은 “20대 국회에서 테러방지법을 개정할 테니 이번 선거에서 밀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읍소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정치전문가들은 9일 동안 진행된 필리버스터가 야권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야권 분열과 리더십 부재로 무기력하게 흩어져 있던 야당 지지자들을 모처럼 한가지 이슈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런 흐름이 곧바로 투표 참여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여당의 실점에 의탁하지 않고 야당의 자체 역량에 의한 ‘포지티브 득점’을 모처럼 이뤄냈다는 평가다. 그러나 출구전략을 모색하며 토론을 마무리짓는 결정 과정이 일방적이어서 당 안팎에 혼란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평론가 유창선씨는 “많은 국민들이 텔레비전·인터넷으로 필리버스터를 시청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토론을 진행하면서 무작정 선거법을 외면할 수 없는 야당의 고민을 토로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소통하며 이해를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루아침에 손바닥 뒤집는 것 같은 모양새를 보였다”고 짚었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의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당내 소통도 부족했다.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원내 지도부에 토론 종료를 ‘지시’, ‘통보’할 것이 아니라, 의총장에 가서 의원들을 위로하며 ‘책임은 내가 질 테니 필리버스터를 거둬달라’는 식으로 설득하는 게 맞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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