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했다.”
“기회 달라.”
투표일이 임박해지자 여러 정당이 유권자들 앞에 큰절을 올린다. 그러나 여당인 국민의힘의 큰절은 사뭇 달라 보인다.
국민의힘이 끝내 ‘읍소’ 전략으로 총선 태세를 전환했다.
야당 후보들의 ‘정권 심판론’에 대항해 ‘야당 심판론’에 기세를 올리더니, ‘정권 심판’이라는 더 높은 기세에 눌린 듯, 이젠 “윤석열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겠다”며 “기회를 달라”는 전략으로 선회했다.
이른바 ‘샤이 보수’라 칭해지는, 정부·여당에 실망한 범여권 지지층을 향한 호소라는 해석이 나온다.
지지율 하락 위기에 놓이자, 동정표라도 얻으려는 것일까?
이 읍소 전략은 통할 수 있을까?
당직자들까지 나서 ‘읍소’
총선을 열흘 앞둔 지난달 31일. ‘정권 심판론’이 총선 정국을 강타하자 국민의힘 한동훈 총괄선대위원장은 유권자들 앞에 읍소하며 지지를 호소했다.
한 위원장은 이날 경기 성남 분당을 시작으로 수도권 유세에 나서 “국민의힘과 정부에 부족한 게 있다고 할 것 같다. 우리가 잘못한 부분이 있다”며 저자세를 취했다.
같은 날 오후, 하다 하다 국민의힘 사무처 당직자들까지 읍소에 나섰다.
‘국민의힘이 개헌 저지선 확보도 어렵다’는 일부 분석이 나오자, 박두용 국민의힘 사무처노조 위원장은 출입기자들에게 “최근 일련의 상황에 대한 국민의힘 사무처 노조 성명을 올려드린다”며 성명 전문을 전달했다.
성명의 기조는 한 위원장의 기조와 같다. “국민의힘에게 아쉬운 점이 많이 있으시리라 생각한다”, “지난 2년간 민심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당에 제대로 된 목소리 또한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곤, “반성하겠다. 바꾸겠다. 변하겠다”고 강조했다.
끝부분엔 “개헌 저지선을 지켜주십시오. 최소한의 국정 동력을 확보해 주십시오. 3년간 다시 일할 기회를 주십시오”라고 한껏 읍소했다.
한동훈과 홍준표의 ‘읍소’
그러나 며칠 뒤, 한 위원장이 태도를 바꾸기라도 한 것일까?
지난 3일, 그는 충북 제천과 강원 원주 유세에서 ‘읍소 전략’을 쓰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누가 저한테 ‘옛날에 국민의힘 계열(정당)이 계속했던 것처럼 선거 막판에 큰절을 하자’고 했다”고 말한 뒤 “범죄자와 싸우는데 왜 큰절을 하느냐. 서서 죽어야 한다”고 소리 높였다.
한 위원장 본인도 갈팡질팡하는 사이, 같은 당 홍준표 대구시장이 한 위원장을 정면 겨냥하며 그를 흔들었다.
홍 시장은 4일 SNS를 통해 한 위원장에게 “사즉생의 각오로 마지막까지 읍소하는 것만이 (한 위원장이) 사는 길”이라며 ‘한 표를 달라’고 국민에게 엎드리라고 했다.
“총선은 당 비대위원장이 주도해서 한 것으로 공천 제멋대로 하고 비례대표까지 독식하지 않았냐”며 사즉생의 각오로 읍소하라고 한 것. 홍 시장 역시 대선 후보 때마다 지지자들에게 큰절을 올린 장본인이다.
그는 “총선 이기면 탄탄대로를 걷게 되겠지만 총선에서 제1당이 못 되면 황교안 시즌2로 전락할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는데, ‘황교안 시즌2’의 의미는 홍 시장의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 총선(2020년)이 끝난 뒤 황교안의 공천받고 당선된 사람 중에 황교안 따라가는 사람이 있더냐”라는 말이다.
‘읍소’한 결과는
그런데, 홍 시장의 발언엔 뭔가 부조화가 있다.
2020년 총선에서 황교안 미래통합당 대표는 큰절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은 ‘문재인 정부 심판’을 앞세우며, ‘경제 회복’,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여당 180석’을 막아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미래통합당의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의 원유철 대표 등 비례대표 후보들까지 읍소 전략에 동참했다.
그러나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 황교안 후보조차 이낙연 전 총리에 압도적 표 차이로 패했고, 미래통합당 역시 민주당에 180석 대승을 안겨주며 패했다. 읍소했지만 패했고, 황교안을 따라가는 사람도 없었다.
납작 엎드렸다고 해서 이기는 선거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큰절 읍소는 정치인들이 선거 때 종종 꺼내 드는 퍼포먼스다. 불리한 정황에 처한 쪽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읍소 이후에도 상황이 역전된 경우는 거의 없다.
읍소 전략의 대표 사례, 2004년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국민의힘 전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추진했다가 역풍을 맞고,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차떼기 정당’이란 꼬리표가 붙자, 박근혜의 천막당사로 읍소 전략을 폈다. 당시 한나라당은 참패를 면했지만, 범진보진영이 171석을 가져가며 대승을 거뒀다.
‘골든타임’ 놓친 읍소 전략
4.10총선 마지막 여론조사 결과 PK(부산ˑ울산ˑ경남)에서도 야당의 강세가 이어졌다. 사전투표 전날, 부산 국민의힘 후보들은 부산시당사 강당에 모였고, 유권자들에게 큰절을 올리며 “일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4년 전과 똑같은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정권 심판’ 선거 분위기가 공고해지고, 야권이 개헌·탄핵 추진이 가능한 의석수 200을 넘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자, 발 등에 불이 떨어진 국민의힘.
범여권 표심을 공략하기 위해 자세를 한껏 낮춰 읍소 전략을 택했지만, 정작 윤석열 정권이 변하지 않으면 달라질 것은 없어 보인다.
읍소 전략으로 보수층 결집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정권 심판론’이 워낙 거세 별다른 효과가 없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누가 어떤 내용을 호소하는지가 중요한 데, 읍소하는 주체가 윤 대통령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정치권에서는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말까지 들린다.
김경율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조차 한 라디오 방송에서 “(대처가) 좀 늦지 않았나”라며 “의대 정원 문제라든가 이종섭 호주대사 관련 문제도 늦지 않게 대처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미 다 골든타임을 놓친 다음에 우리가 움직이고 있지 않냐”고 말했다. 이미 정권 심판으로 굳어진 흐름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조혜정 기자jhllk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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