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이슈
되짚어본 4·10 총선 메시지
이재명, “정권 심판” 선택과 집중
한동훈, “이·조 심판” 반격 역효과
조국, ‘파토스’ 자극하는 선명성
전문가 “직관적으로 와닿게 해야”
- 수정 2024-04-20 21:48
- 등록 2024-04-20 10:00
메시지의 사전적 뜻은 ‘어떤 사실을 알리거나 주장하기 위해 전하는 말’이다. 정치 분야에선 캐치프레이즈(주의를 끌기 위한 표어)나 슬로건(주의·주장을 간결하게 나타낸 짧은 어구) 의미로도 쓰인다.
한국 정치사에서 대중에게 강하게 각인된 정치 메시지는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내건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자유당은 이에 “갈아봤자 별수 없다”고 응수했다. 2004년 17대 총선 때 민주노동당이 내건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도 주목받았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1992년 빌 클린턴)는 지금도 회자되는 정치 메시지의 고전이다. 2024년 4·10 총선에서 여야를 이끈 각 당 대표는 어떤 메시지를 내놓았고, 성과는 어땠을까?
명품백·대파 ‘정권 심판’ 소재
지난달 28일, 총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선거대책위원회 출정식을 열고 윤석열 정부를 정조준한 ‘정권 심판’을 전면에 내걸었다. 대통령실에서 1㎞ 남짓 떨어진 곳에서 출정식을 연 것부터 그런 의미였다.
이 대표의 총선 메시지는 ‘선택과 집중’이 특징이었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는 공식 선거운동을 시작하면서 모든 후보자 캠프에 ‘총선 유세 메시지 참고 자료’를 배포했다. 이 자료를 보면,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와 양평고속도로 특혜 의혹 등 윤석열 정권의 10대 실정을 실었다. 이 대표는 이런 실정을 아우르는 메시지를 ‘정권 심판’의 소재로 삼으며 일관되게 이어갔다.
이와 함께 이 대표는 물가 문제를 ‘대파’라는 상징을 통해 집중적으로 활용했다. 직접 대파를 손에 들고 유세를 펴기도 했다. 경제 파탄을 강조해 ‘정권 심판’이라는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렇게 ‘정권 심판’ 메시지에 치중하다 보니, 저출생과 청년 일자리 등 민생 정책은 잘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지난 9일 마지막 유세에서도 이 대표는 용산역 광장에서 ‘정권 심판’을 강조했다. 선거운동 시작과 마지막 모두 ‘정권 심판’을 부각한 것이다.
“코끼리 생각하지 말라” 했는데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야당의 ‘정권 심판’에 맞서기 위해 ‘범죄자 심판’으로 프레임을 전환하려 했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프레임 개념을 설명했다. 한쪽이 프레임을 잘 만들어버리면, 다른 쪽은 반박하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정작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었다.
한 위원장은 ‘이·조(이재명·조국) 심판’을 내걸며 ‘선량한 검사’와 ‘범죄자 세력’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을 만들려고 했다. 야권 주자인 이 대표와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가 모두 재판 중이라는 점을 고리로 사법 리스크를 전면에 부각해 야당의 ‘정권 심판’에 맞서겠다는 의도였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지난달 28일 서울 마포 지원 유세에서도 한 위원장은 “우리는 정치개혁과 민생개혁, 범죄자들을 심판한다는 각오로 이번 선거에 나섰다”며 “‘이·조 심판’을 해야 한다. 이는 네거티브가 아니고 민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프레임 전환 전략은 ‘정권 심판’에 견줘 파괴력이 떨어졌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내세운 ‘공정’과 ‘상식’이라는 메시지는 민심을 파고들었지만 ‘이·조 심판’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선 오히려 ‘정권 심판’을 떠올리게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유승민 전 의원은 지난 4일 시비에스(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서 ‘이·조 심판’을 두고 “야당 프레임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심판’이라는 메시지가 ‘정권 심판’을 연상시켜 유권자의 분노 투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비판이었다.
한 위원장은 그러나 ‘이·조 심판’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 편법 대출과 막말 논란에 휩싸인 양문석·김준혁 민주당 후보를 범죄자 프레임으로 넣어 전선을 넓혔다. 한 위원장은 서울 청계천에서 연 마지막 유세에서도 “대한민국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위대한 나라이고, 우리는 그걸 해낸 위대한 국민”이라며 “범죄 혐의자들이 무슨 짓이든 다 하게 넘겨주기엔 너무 아깝지 않냐. 너무 허탈하지 않냐”고 했다.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은 “정치 메시지는 대중이 정서적으로 동의하고 직관적으로 와닿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조 심판’은 공감을 얻기 힘들었다”며 “현 정부는 검찰 정권 이미지가 강한데 심판이라는 단어가 검찰 이미지로 오버랩되면서 역효과를 낳았다”고 짚었다. 강 전 비서관은 또 “한 위원장이 실정을 반성하고 남은 3년 동안 새롭게 변신하겠다는 메시지를 냈다면 좀 더 공감받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당, 거짓말이어도 미래 보여줬어야”
조국 대표의 메시지는 선명성이 특징이었다. 대표적인 게 “3년은 너무 길다”로, 집권 2년도 되기 전에 치러진 총선에서 ‘정권 조기 종식’ 의지를 담은 메시지였다. ‘지역구 후보는 민주당, 비례대표 후보는 조국혁신당’을 의미하는 ‘지민비조’ 역시 조국혁신당을 상징하는 메시지가 됐다.
조 대표는 자신의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대중 연설을 적절하게 활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로고스(이성적인 논리), 파토스(청자의 감정과 욕망), 에토스(화자의 인격과 윤리성)를 강조했다. 조 대표는 이 가운데 대중의 감정을 일으키는 파토스를 자극했다. “고마 치아라 마”, “쫄았제” 등 국민의힘을 겨냥한 부산 사투리가 대표적이다. 이런 전략을 통해 조 대표는 불공정·위선의 상징에서 현 정권에 분노하는 시민의 열망을 받아안은 정치인이 됐다. 조 대표는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연 마지막 유세에서 “광화문은 박근혜 정권을 조기 종식한 ‘촛불 명예혁명’의 상징적 장소”라며 “우리가 모두 아는 건 지난 2년이 지긋지긋했단 것, 남은 3년은 너무 길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진해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는 “정치 메시지는 대중의 시선을 어디로 향하게 할지를 놓고 고민해야 한다. 야당은 집권당의 실정에, 여당은 미래에 시선을 돌리는 메시지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조국 대표는 말의 현장성과 사투리의 민중성을 잘 살려 대중을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하고 마음을 격동시켰다”고 짚었다. 이어 김 교수는 “(여당은) ‘위대한 보통사람들의 시대’(1987년 노태우)처럼 거짓말일지언정 집권세력이 설계하는 미래를 보여줘야 했다”고 덧붙였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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