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홍의 원전 없는 나라] 피폭량이 81.6배 줄어든 방사선 환경영향평가서
-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 발행 2024-05-01 07:10:07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의 핵발전소 사고는 처음 가동할 때보다 40년 된 노후핵발전소에서 방사성물질이 훨씬 적게 발생하는 요술을 부린다. 고리 3호기의 경우 40년 전보다 방사성 요오드(I-131)의 발생량이 62.3배 줄었고, 인근 주민 피해는 갑상선 피폭량 50.4배 줄고, 전신(全身) 피폭량 81.6배 줄었다.
이는 고리 3호기의 ‘최종안전성분석보고서(FSAR)’와 ‘계속운전을 위한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RER)’를 비교한 것이다. FSAR은 핵발전소 운영 허가를 받던 40년 전 평가이고, RER은 설계수명이 끝나는 40년 후를 기준으로 한 평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FSAR와 RER이 다른 이유는 서로 다른 ‘방사선원항’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방사선원항은 사고 때 핵연료에서 발생하는 방사성 물질의 종류, 화학적 특성, 유출량 등을 미리 규정해 놓은 것이다. 즉, 예측 편의를 위한 사전 설정값이다. 우리나라는 미국 원자력법의 핵발전소 입지 기준(10CFR 100.11)에 따른 정보기술문서 ‘TID-14844’의 방사선원항을 사용해서 평가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고리3호기 RER은 ‘TID-14844’의 방사선원항을 사용하지 않고, 미국의 규제지침서 ‘RG 1.183’에 따른 ‘대체’ 방사선원항을 사용하는 잘못을 범했다. 대체 방사선원항을 사용하면, 기존에 비해 방사성 물질의 발생량은 절반 이하로 감소하고 외부 누출량은 10분의 1로 감소한다.
1979년 쓰리마일 핵사고의 영향으로 미국 핵산업계는 깊은 침체기에 빠진다. 이후 미국은 핵산업계를 위해 일부 규제를 완화하면서 ‘RG 1.183’의 대체 방사선원항을 신규 핵발전소의 ‘설계기준사고’ 평가에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대체 방사선원항을 40년 된 노후핵발전소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한 ‘RG 1.183’ 적용은 우리나라 원자력안전법의 ‘원자로시설의 위치에 관한 기술기준(원안위고시 제2017-15호)’에 위배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대사고’ 평가에도 ‘RG 1.183’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RG 1.183’은 표지에서 ‘설계기준사고 평가를 위한 대체 방사선원항’이라고 용도를 밝히고 있다. 중대사고에 ‘RG 1.183’를 사용하면서 다음의 두 가지 문제가 크게 발생한다.
중대사고의 특징은 원자로의 핵연료가 녹아내리는 노심용융(Meltdown)이다. ‘RG 1.183’은 노심용융이 없는 설계기준사고용이다. ‘RG 1.183’에 따르면 연료봉에서 방출되는 방사성 물질은 95%가 ‘입자형’이다. 입자형은 여과장치 등을 통해 비교적 쉽게 걸러낼 수 있다. 그러나 중대사고로 노심용융이 발생하면 입자형이 아닌 ‘원소형’이 많이 발생한다. 기체 상태의 원소형은 여과장치로 쉽게 걸러내기 어렵고 격납건물 외부로 더 많이 누출된다.
다음으로 요오드 방출을 중심으로 중대사고를 평가하는 문제가 있다. 설계기준사고는 요오드를 중심으로 평가해도 되지만, 노심용융이 발생하는 중대사고는 세슘(Cs)이 요오드보다 10배나 많이 방출된다. 그러므로 요오드 중심 평가는 사고 피해를 축소한다.
이렇듯 중대사고 평가에 ‘RG 1.183’를 사용하면 방사성물질 발생량과 주민 피폭량을 대폭 축소하는 안이한 결과를 가져온다. 고리 3호기를 예시로 살펴보았으나 고리2호기를 비롯해 수명연장을 준비 중인 모든 핵발전소가 동일한 문제를 안고 있다.
피폭량이 81.6배 줄어든 방사선환경영향평가서를 순순히 믿고 노후핵발전소의 수명연장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기예보로 치면 날씨가 흐리다고만 했는데 홍수로 집이 떠내려가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예보가 정확해야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 노후핵발전소의 안전성 평가에 유비무환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