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의 히,스토리] "건설적 양국관계로 한 단계 도약"... 윤석열 정부는 무슨 속셈인가
▲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의 제105주년 3·1절 기념사는 꽤 위험한 암시를 내포하고 있다. 이번 기념사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으로부터 세 번째 을사년인 내년 2025년에 한일관계를 매듭짓고자 하는 일본 왕실과 정부의 계획에 부합하는 측면을 갖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라며 "자유·인권·법치의 가치를 공유하며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가 됐다"라고 말했다.그런 뒤, "양국이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역사가 남긴 어려운 과제들을 함께 풀어나간다면 한일관계의 더 밝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그 다음 이런 말이 나왔다.
두 번째 을사년인 1965년 한일협정 체결로부터 60주년이 되는 2025년에 양국관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를 기대한다는 발언이다. 양국이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한 부분과 맥이 닿는 대목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미치는 박철희 국립외교원장이 지난 27일 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이 있다. 2025년에 새로운 한일공동선언을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2025년이 양국에 분기점이 된다"고 말하면서 윤 대통령의 역사적 결단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언급했다.
2025년 을사년, 일왕 한국 방문 추진하는 일본의 속셈은?
▲ 나루히토(德仁) 일왕이 2019년 10월 22일 거처인 도쿄 아카사카 고쇼(赤坂御所)를 나서 즉위식이 열리는 왕궁으로 향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런데 2025년을 한일관계의 분기점으로 삼고자 하는 열망은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강하다. 일본은 그동안 한국 국민들의 반감 때문에 추진하지 못했던 일왕의 한국 방문을 2025년에 성사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이 목표가 상당한 구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은 수상관저 관계자와 궁내청 관계자의 발언에 기초한 지난해 7월 13일 자 <조세지신(女性自身)> 기사로도 드러난다. (관련 기사: 첫 '일왕 방한' 추진하는 기시다 총리, 무엇을 노리나, https://omn.kr/24sl7
1945년에 창립된 출판사인 고분샤(光文社)가 운영하고 1958년부터 발행된 이 여성지는 '마사코님 2년 뒤 한국 방문 계획이 정부 내에서 급부상(雅子さま 2年後に韓国ご訪問計画が政府内で急浮上)'이라는 기사에서 "기시다 총리는 요즘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일한관계의 최종 마무리로 천황·황후 양 폐하의 한국 방문을 실현시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는 수상관저 관계자의 인터뷰를 전했다.
"생각하는 것 같다"는 "생각하고 있다"로 바꿔 읽어야 한다. 기시다 총리의 의중이 불투명했다면, 수상관계자가 언론에 이런 말을 전달했을 리 만무하다. 민감한 사안이므로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총리실뿐 아니라 왕실 관계자도 동일한 발언을 했다. 궁내청 관계자도 이 기사에 등장해 "2025년은 일한 국교정상화 60주년에 해당한다"라며 일왕 부부의 한국 방문 추진에 관해 언급했다. 내각책임제 국가에서 왕실 관계자와 내각 관계자가 같은 언론 매체와 동일한 내용의 인터뷰를 했다. 이 정도면 왕실과 내각 사이에 상당한 교감이 이뤄졌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1905년에 대한제국을 피보호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65년에는 식민지배 청산 없이 한국과 국교를 재개하는 데 성공했다.
1905년과 1965년에 일본이 거둔 승리의 공통점은 그것이 외교적인 성과라는 점이다. 그런 일본이 또다시 2025년을 생각하는 것은 을사년마다 거둔 외교적 승리에 '재미'를 붙였음을 보여주는 동시, 일한 방한이라는 상징적 이벤트를 계기로 한·일 간의 외교관계를 내년에 크게 바꿔놓을 의지가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은 지난해 2월 16일에 이어 올해 2월 14일에도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일왕 생일연을 서울에서 벌였다. 2025년 일왕 방한이 성사되면 일왕을 앞세운 이런 도발은 더욱 노골적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일본이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도 윤 대통령은 '내년(2025년) 한 단계 도약'을 운운하고 있다. 국립외교원장도 새로운 한일공동선언을 이야기한다 윤석열 정부가 2023년의 강제징용 제3자 변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엄청난 외교적·역사적 과오에 다가서지 않을까 우려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한일협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이 거셌던 1965년에도 '하필이면 을사년'이라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필이면 을사늑약 60년 뒤에 한일협정을 성사시키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에 분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해 1월 10일 자 <조선일보> 2면 좌상단은 "하필이면 금년이 을사년이라서"라며 난처해하는 외무부 관리의 말을 전했다.
일본 왕실 및 내각과 윤석열 정부가 생각하는 '한 단계 도약'은 바람직한 방향일까? 윤 대통령은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식민지배의 한을 치유하고 피해자와 유족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일이 없었는데도 이런 말을 했다. 오히려 아픔을 짓밟는 일만 있었을 뿐이다. 이는 윤 대통령이 말한 '한 단계 도약'이 한국 국민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으리라는 전망을 갖게 하고도 남는다.
하세가와 총독 담화를 연상케 하는 윤 대통령 기념사
▲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만세삼창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금 이 상태로 2025년에 한일관계가 업그레이드될 경우, 그것이 역사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될 가능성이 더 크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윤 대통령의 이번 기념사가 제2대 조선총독인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유고(諭告)를 연상케 한다는 점이다.
전국적인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어느 정도 잦아든 뒤인 1919년 7월 1일, 하세가와 총독이 한국인들을 타이르겠다며 유고 형식의 담화를 발표했다. 한편으로는 한국 민중을 겁주고 한편으로는 한국 민중을 달랠 목적으로 발표한 이 유고의 핵심 메시지가 서글프게도 윤 대통령의 이번 기념사에도 나타난다.
총독부 기관지인 위 날짜 <매일신보>에 발표된 '조선총독 유고'는 3·1운동 같은 것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조선인과 내지인은 서로 의지하고 협력하는 관계다', '이런 협력은 동양 평화, 만국 평화를 함께 누리는 기초다'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세가와는 "대저 병합의 목적인즉 내지인 급(及) 조선인이 상의상부(相倚相扶)하야 일체로 단결되야 동양평화의 기초를 확립케 함에 재(在)한지라"라고 말했다. 유고의 뒷부분에는 "만국(萬國)은 평화를 동락(同樂)하고"라는 표현도 나온다. 두 민족은 서로 의지하고 돕는 일체 관계이며 이 관계는 만국 평화의 기초가 되므로 한국인들은 독립만세를 외치지 말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던 것이다.
윤 대통령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교류와 협력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고" 등의 표현을 통해 한일 협력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양국이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3·1운동을 진압한 쪽에서 내보낸 메시지와 대동소이한 내용을 윤 대통령이 발표한 것이다.
만약 일본이 한국을 억압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세가와 총독이 한일 협력을 강조했다면 그의 말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일본이 한국을 억압하는 상황에서의 협력을 강조했다. 그의 본심은 3·1운동의 열기를 확실히 제압하는 데 있었을 뿐이다.
만약 윤 대통령이 공정하고 대등한 한일관계를 지향하고 있다면, 한일협력을 강조하는 그의 기념사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윤석열 정부가 한국 국민들의 식민지배 청산 열기를 억압하면서 한일 협력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체제 하에서는 한국 국민들이 기를 제대로 펼 수 없다. 하세가와 총독이 한일 협력을 강조한 것과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번 3·1절 기념사는 한국 국민들의 아픈 과거를 짓밟고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려는 한일 두 정부의 퇴행적 태도에 대해 한국 국민들이 적극 반대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세 번째 을사년인 2025년이 1905년과 1965년의 업그레이드판이 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성을 부각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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