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 유학시절,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의 동영상과 사진들을 처음 접한 것이 89년도였다. 1980년 대한민국 광주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9년이 지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광주의 비극을 담은 영상은 외국에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었지만, 오직 대한민국에서만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너무도 참담한 모습을 담은 영상과 사진들을 본 이후 오랫동안 나는 밤잠을 못 이룰 정도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방학이 되어 한국에 와서 광주의 영상에 대한 얘기를 하자 사람들은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아빠는 광주에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며 그냥 몇몇 깡패들끼리 싸운 것 뿐이라 하셨다. 개머리판에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얼굴을 가진 저 수많은 시신들이 단지 몇몇 깡패들의 싸움이라니… 그러면서 아빠는 “그런 얘기 어디 가서 절대 하지 마라..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지도 모른다”며 입단속을 시키셨다.
수년이 흘러 다시 방학이 되어 집에 오자 드디어 ‘광주의 비극’이 언론을 통해 거론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고 자연히 다시 아빠와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아빠는 ‘그 당시 죽은 사람은 모두 빨갱이였다’ 라고 일축 하셨다. 정말 기가 막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 임산부 모두 빨갱이라고? 그래서..빨갱이는 죽어 마땅하다고?
‘빨갱이가 뭐기에 죽어도 되는 거냐’고 물었더니 ‘북한 간첩’이라고 하셨다. ‘그 많은 광주 시민이 북한 간첩이냐..중고생 임산부 할머니 할아버지도 모두 북한 간첩이냐’고 따졌더니 ‘빨갱이란 공산주의자를 말한다’고 말을 바꾸셨다.. 그래서 ‘여긴 민주주의 국가이니 사상과 가치관의 자유가 인정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했더니 아빠는.. ‘왜 바락 바락 대드느냐.. 요새 전라도랑 어울려 다니느냐.. 우리 집안에 너 같은 빨갱이는 없었다’라며 호통을 치셨다. 아빠와의 대화는 항상 그렇게 평행선을 달리는 논쟁으로 끝이 나곤 했다.
2.
세월이 흐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이젠 대부분의 국민들이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한 줌도 안 되는 군인들이 정권을 강탈하기 위하여 벌인 대학살극. 대명천지에 대도시 길바닥에서 국가권력에 의해 셀 수 없는 민간인이 무참히 살해된 사건이 알려지기까지 수 십 년이 걸렸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그 살인마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진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고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지금 아빠는 5년 전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후 반신마비로 요양원에 계신다. 그런데 병원에서 CT를 찍어 보니 수 많은 총알 파편들이 두개골에 박혀 있었다고.. 6.25때 17살 나이로 참전해 머리에 총알이 스치는 부상으로 5급 유공자가 되셨는데 당시엔 CT가 없었기에 이토록 머리 속에 파편이 무수히 박힌 채로 평생을 사셨다는걸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평생 영문도 모른 채 고통 받으셨을 아빠를 생각하니 아빠가 살아오셨던 시절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격만 했던 내 자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쓰러지시기 한 달 전 쯤, 아빠는 나를 불러 앉히고 그동안 한 번도 들어 본지 못한 얘기를 해주셨다.
“하나 뿐인 형을 집안에서 소련으로 유학 보냈는데 돌아와서는 ‘앞으로 무상분배 무상토지의 세상이 온다’면서 할아버지와 함께 가문의 땅을 하나 하나 팔아 치우시더니 그 돈을 흥청망청 모조리 써서 없애 버리시더라.. 그 후 전쟁이 터지자 형과 할아버지는 어디론가 행방불명이 되었고, 아빠는 빨갱이 집안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17세의 나이로 자원 참전을 했다. 부상 후 상이군인이 되어 지금까지 오로지 가족의 안전을 위해 자유당과 박정희와 보수를 지지하며 살아 왔다”
이 말을 들으며 쇠망치로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빨갱이’에 대한 아빠의 혐오는 증오가 아니라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나는 비로써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 <제주 4.3학살>등 수 많은 대량 학살과 ‘빨갱이’나 ‘간첩’으로 지목된 순간부터 온 집안이 참살 당하는 일을 숱하게 보고 겪으면서 살아온 아빠가, 아니 우리 아버지 세대, 할아버지 세대가 느꼈을 두려움의 정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경험한 그 두려움이, 말문이 막히고, 귀가 닫히고, 보고도 보지 못하게 만들어, 민간인 학살에 침묵하고 수구 기득권에 거수기를 드는 보수 국민과 태극기 부대를 만든 것은 아닐까.. 험한 세상을 살아온 우리 부모 세대는 그 두려움을 씻어내고자 아무렇지 않게 동족을 주적이라 규정하고, ‘빨갱이’는 죽어 마땅한 존재이고, 자신은 ‘빨갱이’가 아니라며 자가검열로 위안삼는 동안, <전 연령대 자살률 1위> <언론 자유도가 최하위>인 극도로 폐쇄적인 나라에 살면서도 살기 좋은 나라에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살아 왔던 것이다.
3.
분단 7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오래 걸릴지라도 조작된 매트릭스의 실체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민주정부 10년을 겪으며 민중은 더 자유로운 소통과 정보 교환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이제 더 이상 진정한 두려움은 빨갱이네 아니네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안보를 핑계로 툭하면 국민의 인권을 빼앗고, 때마다 <국면전환용 민간인 학살사태>를 일으키는 썩은 매국노 세력은 권력욕과 탐욕을 위해 사실상 사람의 생명을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기는 살인마들이었고 오히려 진정한 두려움은 대중이 이들의 어젠다에 굴복하기 시작하면서 생긴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더 나아가 이보다 훨씬 거대하고 실재(實在)하는 두려움 또한 알게 되었는데 이는 사대매국노들이 끌어들인 외세로 인하여 우리 민족이 상시 전쟁 위기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사람들이 알게 된 전쟁 공포는 이제까지 국내 전쟁광들이 팔았던 전쟁 공포와는 궤를 달리한다. 기껏해야 외세에 의한 한반도 대리전 정도의 전쟁 공포였었다. 그러나 북의 군사력 수준을 더 이상 감추지 못하고 언론에서 자꾸 터져 나오면서 지금의 전쟁은 대중의 상상대로 재래식 무기에 의한 남북전쟁이 아니라 북미간 전쟁이며 핵전임을 알게 된 것이다. 게다가 한반도의 안위 따위는 전혀 상관 없다는 미 대통령의 파렴치한 발언은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넘어 치를 떨게 만들고 있다.
ICBM이 날아다니는 지금 전쟁이란 곧 <공멸>을 뜻한다. 방사능 피폭까지 생각한다면 대륙 단위의 <공멸>이다. 한반도 전체는 물론 미 대륙 자체가 사람이 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한반도 땅에 핵 선제 공격 운운 하고 있는 이 마당에, 심지어 죽는 건 한국인 뿐이고 미국은 안 죽으니 상관 없다는 망발을 해대고 있는 이 마당에, 이념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빨갱이냐 아니냐가 무엇이 중요하다는 말인가. 다 죽은 무덤 위에 이념의 비석이라도 세워줄 사람이 남아 있을까?
더 이상 대중은 <광주의 학살>을 쉬쉬하지 않는다. 이승만의 <보도연맹학살>도 <제주 4.3학살>도 두려워 감춰야 하는 대상이 아니며 <세월호 학살>로도 두려움에 떨기는 커녕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촛불을 들었다. 민중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기만 하던 우중이 아니다. 이념을 매개로한 매트릭스는 깨어졌고 전쟁이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닫고 거부하며 스스로 힘을 합쳐 자주 평화 통일을 추구하는 민주정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민중의 눈높이는 이제 이념을 넘어서 민족의 자주 평화공존 나아가 평화통일에 맞춰져 있다. 아무리 감추고 묻으려 해도 침략 본성은 평화협정을 요구하는 북측에 있는 것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어떻게든 미뤄 보려고 ‘비핵화’를 내세우며 공포감을 조성하는 패권주의 세력에게 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4.
미국인은 죽지 않으므로 한민족의 희생 따위는 아무 상관 없다는 트럼프의 막말로 인해 한미동맹의 근거가 얼마나 황당한 거였는지 국민들은 알게 되었다. 그 덕분에 외세 의존 매트릭스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우리 국민은, 북의 핵무기나 어떤 정치적 이념보다 미국의 패권주의 도발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전면전과 <공멸>이 더욱 큰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보수 국민들에겐 실망스럽게도 북의 핵무기는 동족이 아닌 미 패권주의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있다. 북의 핵무기는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시키는 억지력, 그것이 ICBM의 존재 이유이다. 문제는 외세를 겨냥한 동족의 핵무기가 아니고 한반도를 겨냥한 미국의 핵무기인 것이다.
미국 욕할 거 없다. 트럼프 욕할 것도 없다. 트럼프는 그냥 미국의 대통령이기에 미국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무조건 미국에 맹종하며 추종하는 인간들이 더 큰 문제이다. 이들의 존재로 인해 미국의 패권주의는 아직도 한반도에서 활개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1호는 바로 이들 친일친미 사대주의자들이며 한반도에 핵무기를 들여온 미군산복합체의 군대이다.
자 이제 촛불로 세워진 민주정부가 대답해야 할 차례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했다. 여차하면 등을 맞대고 공조를 해야 할 상대는 바로 동족이며 통일의 대상은 조선이지 미국이 아니다. 더 이상 애매한 립플레이는 대다수 상식적인 국민들의 열망과 부합하지 않으며 이미 명분을 잃었다. 트럼프가 주둔비를 올려 달라고 하면 이제 편안히 돌아들 가시라고 하자. 적당히 선을 그을 때가 된 것이다.
오늘은 전 민족의 기념일인 8.15 광복절이다. 수구세력의 기득권 유지를 위한 재물이었을 뿐인 양심수는 과감하게 석방하고, 남측에 억류중인 김련희씨와 아직은 부모 곁에 머물러야 할 12명의 처녀들을 북녘 가족들에게 돌려 보내 주자. 동족에 칼날을 세우는 한미 연합훈련은 이제 그만 하자고 하자.
보수국민이 등을 돌릴 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더 열정적이고 더 큰 통일세력의 지지율이 상시 대기 중이다. 게다가 트럼프의 막말로 이미 보수국민의 마음도 미국에게서 멀어져 가는 중이다. 미국이 본성을 드러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념론을 들먹이며 미국과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보수는 이미 보수가 아니고 그저 수구일 뿐이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 죄 없는 죽음은 더 이상 없다. 이것을 국민들에게 공표하고 친일.친미 세력과 미 패권주의와 선을 그은 후, 동족과 차분히 대화를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떠한가. 전쟁과 평화. 그 선택의 기로가 바로 우리들의 코 앞에 다가와 있지 아니한가.
정현주 (새날희망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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