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외전]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의 항일투쟁
24.01.13 19:26최종 업데이트 24.01.13 19:26
▲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 ⓒ 인천시민애집
'인천' 하면 '성냥 공장'이 떠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성냥공장 노동자 중에는 항일투쟁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둔 이들이 있었다.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이 그 주인공이다.
이들의 일터는 인천에 있는 조선인촌제조주식회사였다. 인촌(燐寸)을 '성냥'으로 바꿔 조선성냥제조주식회사로도 불리는 기업이다. '인천' 하면 '성냥공장'이 떠오르게 된 것은 이 기업 때문이다. 이 회사는 일제 강점 7년 뒤인 1917년 10월 4일 인천부 금곡리 32번지에서 설립됐다. 지금은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동 33-80번지로 바뀐 이곳은 동인천역과 도원역의 중간쯤에 있다.
오쿠다 데이지로(奧田貞次郞)를 비롯한 일본인 9명이 공동 출자한 조선성냥은 총독부의 비호를 받으며 성장했다. 2014년에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7권 제2호에 실린 김양섭 전북대 전임연구원의 논문 '일제강점기 인천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의 동맹파업'은 "일본인에 의한 성냥 생산과 판매라는 독점체제를 유지"할 목적으로 총독부가 비호를 했다고 설명한다. 그에 힘입어 이 기업은 "1930년대 후반에 전국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됐다.
여성 임금만 10% 인하? 일제 시대에 '점거 파업'한 노동자들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은 총독부의 비호를 받는 그 기업을 상대로 역사적인 투쟁에 앞장섰다. 일본이 만주사변(9.18)을 일으키기 직전인 1931년 8월의 일이다. 그달 26일자 <동아일보> 7면 상중단 기사는 "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의 녀직공 1백 70명 전부"가 이들과 함께 동맹파업에 가담했다고 보도했다. 파업에 참여한 여성 노동자의 숫자는 다음날 발행된 <경성일보>에는 180명으로 보도됐다.
일본은 군부가 정권에 참여한 1927년 이래로 고도의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시국이 그처럼 심상찮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조선성냥 노동자들이 용감하게 파업을 벌였던 것이다.
'일제 식민지배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됐다'는 말에 동조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극우세력을 비롯한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만 식민지근대화론을 추종한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하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 독립운동·친일문제·한일관계 등에 대해 이전보다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조선성냥 노동자들과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은 식민지근대화론이 틀렸으며 일제가 준 것은 차별과 수탈이었음을 분명히 증명한다. 이들이 군국주의하의 위험한 투쟁에 나선 것은 그 같은 차별과 수탈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맹파업이 일어난 시점은 일본군국주의가 강화될 때인 동시에 1929년에 세계 대공황이 발생한 뒤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일제가 모색한 것은 식민지 한국을 희생시켜 일본 경제를 살리는 것이었다.
2012년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0권에 실린 김제정 서울시립대 연구교수의 논문 '경제대공황기 미곡통제정책에 대한 조선인 언론의 인식'은 "일본 정부는 공황에 따른 본국 경제의 충격과 모순을 완화시키기 위해 식민지를 활용하고자 하였다"고 한 뒤 그런 사례 중 하나로 일제의 미곡통제 정책을 설명한다.
일본은 그전까지만 해도 원료 공급지 및 상품 소비지 역할을 식민지 한국에 요구했었다. 그랬던 일본이 대공황 시기에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의 미곡을 통제했다. 한국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시스템 속에 한국 농업을 가둬두더니, 대공황 시기에는 한국 쌀의 일본 유입을 통제했던 것이다.
조선성냥 노동자들에게도 희생이 강요됐다. 1930년 4월에는 임금을 직급별로 7~30% 인하했다. 뒤이어 1931년 8월 15일에는 여성 노동자의 임금만 10% 인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이 궐기하고 김순이 등이 대표로 옹립됐다.
위의 김양섭 논문에 인용된 그달 27일 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임금 인하 조치가 통보된 당일인 15일에 노동자들은 사업장을 점거하고 파업에 돌입했다. 그러자 인천경찰서는 형사부장 등을 파견해 진압을 준비했고, 사측은 점거와 파업을 풀라고 노동자들을 회유했다.
그런 속에서 대표로 선임된 네 사람은 사측과의 교섭 과정에서 단호한 태도를 유지했다. 동맹파업의 기세에 눌린 회사가 '임금 인하 조치의 무조건 철회'를 구두로 표명하자, 대표단은 '그것은 일시적인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취지로 단호하게 배척했다. 그러면서 문서화를 요구했다. 각서로 써주면 점거를 풀겠다고 밝혔던 것이다.
그러자 사측은 임원회의를 여는 한편, 인천경찰서 서장실에서 경찰들과 비밀 회합을 가졌다. 문서화 요구에 대해 이처럼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사측의 구두 표명이 대표단의 말대로 속임수였을 가능성에 무게를 실어준다.
사측은 대표단의 요구를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김순이 등에게 각서를 내밀었고, 26일 오후 6시에 공장 점거가 해제됐다. 김순이 등이 회사와 경찰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대담하게 협상을 이어간 결과다. 1931년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노동자들이 이룬 값진 승리였다.
'인천의 성냥공장 투사들'... 일본 자본의 착취에 맞서 승리하다
▲ 조선인촌주식회사 공장 노동자 여직공 170명이 동맹파업에 가담했다고 보도한 1931년 8월 26일 자 <동아일보> 7면 상중단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일본제국주의를 움직인 배후 세력은 일왕이나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치인들이 아니라 그 이면의 자본가들이었다. 일제가 이웃 나라들을 자국의 경제적 필요에 맞게 개조한 것은 자국 정계보다는 재계를 위한 일이었다.
'항일투쟁'하면 일본 정부나 군대에 맞선 것을 쉽게 떠올리지만, 일본 자본의 한국 착취에 맞서는 것은 더욱 본질적인 항일이었다. 조선성냥 노동자들과 김순이·이용림·윤기영·성하분의 투쟁은 김구·김원봉 등의 항일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김구와 김원봉 등이 국제적 지원 속에서 투쟁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민중들이 반일 분위기를 이어 나갔기 때문이다. 항일투쟁이 국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했다면, 국제사회가 그들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조선성냥 노동자들과 네 대표자의 투쟁은 국내의 반일 역량을 고조시키고 해외 독립운동에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일이었다. 이들의 이름이 독립유공자 명단에 있느냐 없느냐는 부차적인 일이다.
그런데 네 대표자가 그 뒤 어떻게 됐을까를 궁금하게 만드는 일이 닷새 뒤 일어났다. <경성일보>에 따르면, 9월 1일에 조선성냥은 '불량 여성노동자 일소'라는 명분 하에 파업 참여자 180명을 해고했다.
그런 뒤 임금 인하에 동의하는 168명을 신규 채용했다. 조선성냥에 근무한 적이 없는 19명과 예전에 근무한 35명이 168명 속에 포함됐다. 파업 참여자 중에서 66명은 재취업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뒤 기술직이나 작업반장 등의 40명이 추가로 투입돼 생산라인의 전체 인원은 208명이 됐다. 8월 26일의 패배에 대한 사측의 보복이었다.
닷새 뒤의 조치로 인해 결국 무위로 끝나긴 했지만, 조선성냥 노동자들과 네 대표자가 값진 승리를 거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다. 이들은 '인천의 성냥공장 투사들'로 기억될 만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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