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7]
글로벌 성 평등 지수 0.687. 156개국 중 102위. 2021년 한국은 완전한 평등에서 이만큼 멀어져 있다. 기울고 막힌 이곳에서도 여성은 쓴다. 자신만의 서사를.
# 애니메이션 ‘심슨가족’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남편 호머 심슨과 아내 마지 심슨의 대화.
-남: 마지! 전깃줄 어딨어
-여: 공구 서랍에 있잖아요
-남: 미안해. 나도 애가 됐나 봐.
# 영화 ‘007 카지노로얄’
재무부 직원 베스퍼 린드와 제임스 본드의 첫 만남.
-여: 재무부에서 돈을 대기로 했어요.
-남: (명함을 보더니) 베스퍼? 부모 원망 좀 했겠군
-여: 상사 수완이 좋은가봐요. 일사천리로 결정되더군요.
-남: 꽤 세련됐어. 돈은 어딨소?
-여: 천만은 계좌로 입금됐고 오백만은 상황 봐서 내가 결정해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이다. 두 사람이 대화한다. 한 명은 존댓말을, 다른 한 명은 반말을 한다. 존댓말을 쓰는 쪽은 주로 여자다. 예시는 모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자막을 그대로 옮겼다.
007 카지노 로얄을 보자. 베스퍼는 영국 재무부 소속 회계사다. 영국 비밀정보국(MI6)은 본드를 포커 게임에 투입한다. 재무부는 자금을 댄다. 베스퍼는 판돈 전달과 관리를 위해 파견됐다. 즉 부서는 다를지언정 한 프로젝트를 맡은 동료다. 본드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어쨌거나 두 사람은 처음 본 사이다. 베스퍼가 한국인이고 자막 대로 대화를 나눴다면? 베스퍼는 생각했을 것이다. ‘쟨 뭔데 초면에 반말이야’
한국 국경만 넘으면 해외 컨텐츠는 에러가 난다. 에러의 이름은 ‘남자에게 고분고분 존댓말하는 여자’다. DC코믹스 악당 ‘할리 퀸’. 언제든 야구 방망이로 남자의 급소를 칠 준비가 된 미치광이다. 이런 할리 퀸도 한국에서는 ‘오빠’ 운운하며 꼬박꼬박 존댓말을 쓴다. 부부간 대화도 예외는 아니다. 앞서 언급한 심슨가족 호머와 마지의 대화를 부부의 그것이라 볼 수 있을까. 이것은 작품을 만든 이들과 개봉을 기다린 관객에게도 모욕이다. 원작 훼손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다 된 영화에 한글 자막 뿌리기다.
기형적 대화는 자막을 타고 이질감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전달된다. 이런 자막은 시청자에게 ‘여성 캐릭터가 예의 바르네’라는 인상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은연중 남자는 위, 여자는 아래라는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 한국어는 솔직한 언어다. 대화 참여자의 위계질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외국에도 정중한 표현인 경어체가 있지만, 이것이 곧 서열이나 상하 관계를 뜻하지는 않는다.
언어는 인식을 지배한다. 성차별 함의가 있는 많은 용어들은 아직도 흔하다. 친할머니에는 ‘친할 친(親)’자를 사용하고 외할머니에는 ‘바깥 외(外)’자를 쓴다.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의 ‘미망인’(未亡人)이 지자체 보도자료에 박혀 뿌려진다. ‘집사람’, ‘안사람’이란 말이 여전히 드라마에 등장한다. 여자 대통령이 당선된 건 10년 전이다.
자막보다 끔찍한 사실은 문제를 깨닫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 성차별 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남존여비 잔재에 순응하지 않으려 노력해왔다. 그런데도 “출근할게”, “다녀오세요” 따위의 글을 읽으며 문제라 생각하지 못했다. ‘남녀는 평등하다’는 진실에 균열을 내려 하는 낡은 습관은 여전히 곳곳에 몸을 숨기고 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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