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또 하나의 비극’ 하이닉스
등록 : 2014.07.27 20:13수정 : 2014.07.27 23:33툴바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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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병 등 ‘반도체 직업병’ 지난 20년간 최소 17명 사망
삼성보다 사망률 높아…산재 인정 받은건 단 1건 불과
에스케이(SK)하이닉스가 메모리 반도체 D램을 생산하는 경기도 이천공장의 내부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삼성 백혈병 얘기를 듣고 솔직히 걱정은 돼요. 케미컬(화학물질) 다루는 데 뭐 몸에 좋겠어요? 병에 안 걸리면 그게 이상한 거죠. 그런데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설마 하며 다니는 겁니다.”
오후 2시 퇴근길에 만난 30대 중반의 여성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하이닉스 공장에서 14년째 반도체 오퍼레이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공장을 중심으로 아파트단지와 상업지구가 형성된 이곳은 3교대로 일하는 공장 직원들이 아침 6시, 오후 2시, 밤 10시께 무리 지어 출퇴근하는 풍경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소도시의 일상 그대로였다. 하지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건 그저 평범한 일은 아닌 듯했다. 지난달 초 <한겨레>가 만난 하이닉스 노동자들은 마음속에 담아뒀던 불안감을 조심스레 털어놨다. 10년 넘게 오퍼레이터로 일하는 30대 초반 여성의 얘기다.
“1년 전쯤인가 누가 암에 걸려 회사를 그만뒀다고 하더라고요. 예전엔 또 개인 질병인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텐데, 삼성 백혈병 논란을 보니까 산재일 수 있겠구나 많이들 그럽니다. 하지만 쉬쉬하는 거예요. 괜히 그런 얘기 했다가 찍히면 안 되잖아요.”
최근까지 생산라인에서 일했던 한 남성 노동자는 “1990년대 중반 입사한 뒤 10여년 동안은 일하면서 마스크 같은 것도 한번 써본 적 없다”며 “자동화 설비도 자주 오작동하기 때문에 이걸 몇시간씩 사람이 살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게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하이닉스 노동자는 “지금 새 설비 투자를 하고 있지만, 기존 설비는 대부분 일본에서 쓰던 중고품을 수입한 것들이다. 그만큼 공정이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이닉스는 삼성전자와 함께 국내 양대 반도체 사업체이지만, 2007년 황유미(당시 23살)씨가 백혈병으로 숨진 뒤 여론의 관심을 끌었던 삼성과 달리 하이닉스는 백혈병 등 반도체 산업재해 문제가 제대로 공론화한 적이 없다. 대표적인 반도체 산업병으로 연구되는 백혈병 등 림프조혈기계 질환(용어설명 참조) 실태조차 제대로 드러난 적이 없다. 하이닉스 노동자들의 불안감은 그저 기우일까? 취재 결과,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발병 줄기는커녕 늘어나…여성 악성 림프종 비율 높아
2010년까지만 13명 사망…28명 발병
삼성 공론화 이후에도 눈길 안줘
하이닉스 “림프조혈기계 사망
일반인과 비슷한 수준”
악화 막으려면 정밀조사·대처 시급
<한겨레>가 정부 조사 자료와 자체 취재 등을 통해 파악한 하이닉스 출신의 백혈병 등 림프조혈기계 질환 사망자는 27일 현재 최소한 17명에 이른다. 국내 반도체업계에서 발생한 가장 최근의 백혈병 사망자로 파악되는 송아무개(40·장비 정비업무·2013년 1월 사망)씨도 삼성전자가 아닌 하이닉스의 22년차 재직자였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는 지난해 5월 37살 여성 오퍼레이터가 악성 림프종으로 숨졌다는 제보가 들어왔는데, 그 또한 하이닉스 출신이었다. 현재 퇴사 뒤 홀로 투병중인 노동자들도 확인된다.
또 정부의 공식 조사 자료를 통해 삼성전자(반도체부문)와 비교한 결과, 하이닉스는 림프조혈기계 질환 사망자 규모 및 비율에서 삼성에 뒤지지 않았다. 1995년부터 2010년까지 하이닉스에서 일하거나 일했던 노동자 가운데 최소 13명(백혈병 5명, 비호지킨 림프종 5명 등)이 림프조혈기계 질환으로 숨졌고, 같은 기간 삼성전자 반도체부문에선 최소 11명이 같은 질환(백혈병 7명, 비호지킨 림프종 3명 등)으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이 기간 림프조혈기계 암으로 확정 진단을 받고 암센터에 등록된 이들은 하이닉스와 삼성 모두 28명씩이었다. 이들과 사망자는 대부분 겹치지 않아, 지난 15년 동안 두 회사에서 80명 안팎이 림프조혈기계 질환으로 쓰러진 셈이다.
이는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1995~2007년, 2008~2010년 두 기간을 대상으로 해당 사업장 전·현직 노동자들의 사망·질환 내역을 조사한 연구물을 종합분석한 결과다. 사망 비율을 따지면, 1995~2007년 삼성의 10만명당 사망률은 15.3명, 하이닉스는 18.2명에 이른다. 2008~2010년에는 10만명당 사망률이 하이닉스 6.5명, 삼성 5.2명이다.(상자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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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닉스에서 일하다 2008년 11월 비호지킨 림프종으로 숨진 정철모(당시 42살·13년차)씨도 삼성과의 사망 격차를 벌린 이 가운데 한명이다. 유족들은 엔지니어였던 정씨가 생산라인과 연구소에서 각종 실험·연구 중 많은 유해물질에 노출된 것을 사인으로 꼽지만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족들은 수년 전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처럼 길고 외로운 소송을 진행 중이다.
하이닉스와 매그나칩(하이닉스 비메모리 사업부가 분리된 업체)에서 일하다 2011년 5월 만성 골수 단핵구성 백혈병으로 숨진 김진기(당시 38살·14년차)씨는 지난해 3월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인정한 첫번째 반도체 백혈병 환자였다. 하지만 유족들은 회사의 책임을 더 분명히 하기 위해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준비 중이다.
<한겨레>와 만난 이들 유족은 한결같이 산재 신청과 소송 과정에서 회사 쪽의 철저한 무관심에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삼성을 통해 반도체 산재 논란이 불거진 지 7년이 지났는데도 하이닉스 노사는 여전히 ‘감추기’에 더 주력하는 모습이다. 발병·사망자 현황 파악조차 안 하거나 못 하고 있다. 하이닉스는 지난 13일 <한겨레>에 “건강보험 진료 내역이 개인정보여서 퇴직자는 물론 재직자의 질환 발생 현황도 파악하기 어렵다”며 “2007년까지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 조사 자료만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사 박아무개 노조 위원장은 지난달 9일 <한겨레>에 “현재까지 노조가 파악한 백혈병 사망자는 한명도 없다. 이 사안에선 회사와 노조의 입장이 같다”고 말했다. 쉬쉬하는 사이 사망자·환자가 이어지고, 가족 몇이 온전히 병과 죽음을 감당하다, 피해자들과 시민사회단체가 수년간 문제를 제기한 끝에 겨우 대화에 나선 삼성의 초기 대응을 닮은 셈이다.
더 주목할 문제는 하이닉스와 삼성 모두 림프조혈기계 질환 사망·발병이 줄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995~2007년 조사에서 두 회사의 림프조혈기계 질환 사망자는 모두 18명으로 연평균 1.38명인 데 비해, 2008~2010년 조사에선 양사 6명으로 연평균 2명꼴이다. 림프조혈기계 암 발병 건수도 1995~2007년 한해 평균 3.38명(총 44명)에서 2008~2010년 4명꼴(총 12명)로 늘었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비호지킨 림프종 발병이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5~2007년 두 회사에서 발생한 비호지킨 림프종 여성 환자는 최소 8명이었다. 당시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발병률이 일반인 집단보다 2.7배 높다고 분석한 바 있다. 그런데 2008~2010년 3년간 발병자는 이전 13년간 발병자의 절반(4명)에 이른다. 이는 국내 전체 여성 가운데 비호지킨 림프종 사망자가 2008년 346명에서 2010년 199명으로 크게 감소해온 추세와 대조된다.(발병자 자료는 따로 없음) 연세대 보건대학원 김인아 교수(산업보건전문의)는 “2008~2010년 사이 일반인의 비호지킨 림프종 사망자는 줄고 있는데 반도체 업종에선 발병자가 늘고 있다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산재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삼성이 현재 진행 중인 사과·배상·재발방지 협상에서 성과를 내야 할 뿐만 아니라 하이닉스에 대해서도 엄밀한 조사와 대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임상혁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산업의학전문의)은 “삼성은 삼성이라서 주목을 받았다. 이제 에스케이하이닉스도 대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 인권경영 측면에서라도 반도체 공정의 건강성 평가를 위한 시스템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명희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상임연구원(예방의학전문의)은 “<한겨레> 취재 결과는 대기업간 비교를 떠나, 유해 화학물질을 많이 사용하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해 어느 기업도 숨어선 안 된다는 필요성을 보여준다. 한국이 세계 반도체산업을 선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이닉스 쪽은 “림프조혈기계 질환 사망자 비율은 일반 인구와 비슷한 수준이다. 삼성 또한 (작업 환경과) 백혈병과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상황은 아니다”라며 “대학에 연구용역을 맡기는 등 안전·보건 관리를 강화해가고 있다”고 말했다.
임인택 오승훈 기자 imit@hani.co.kr
에스케이(SK)하이닉스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1983년 창립된 현대전자가 모태다. 1999년 엘지반도체에 흡수·합병된 뒤 2001년 3월 하이닉스로 사명을 바꿨다. 2012년 3월 에스케이텔레콤이 인수해 지금의 ‘에스케이하이닉스’가 됐다. 2012년 세계 반도체업계 시장점유율에서 7위(1위 인텔, 2위 삼성전자)를 차지했던 에스케이하이닉스는 2013년에는 매출액 14조1650억원을 달성해 세계 5위(1위 인텔, 2위 삼성전자)로 두 단계 뛰어올랐다. 올 상반기에는 사상 최대 실적을 올렸다. 매출 7조6660억원에 영업이익 2조141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매출은 14%, 영업이익은 50%가 늘었다. 반기 기준으로 영업이익 2조원을 돌파한 것은 처음이다. 경기 이천과 충북 청주에 공장이 있다.
림프조혈기계 질환
대표적인 ‘반도체 직업병’으로 불리는 림프조혈기계 질환은 피를 만드는 뼛속 조직인 조혈 모세포가 정상적인 분화를 하지 못해 생기는 질병군으로, 세계보건기구(WHO)의 국제질병분류(ICD)에 따르면 림프조혈기계 암과 기타 림프조혈기계 질환으로 나뉜다. 림프조혈기계 암에는 백혈병, 호지킨·비호지킨 림프종, 다발성 골수종 등이 포함되며, 그밖에 재생불량성(무형성) 빈혈, 골수형성이상 증후군 등은 기타 림프조혈기계 질환으로 불린다.
백혈병과 더불어 반도체 노동자들에게 발병 빈도가 높은 비호지킨 림프종은 종양이 온몸에 나타날 수 있고 어디로 진행될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대표적인 악성 림프종으로 불린다. 몸의 한정된 림프절(임파선)을 침범하고 종양이 퍼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호지킨 림프종에 비해 치료가 더 힘든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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