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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8일 금요일

조윤선 장관 석방, 국민적 분노 날로 확산

조윤선 장관 석방, 국민적 분노 날로 확산
이창기 기자 
기사입력: 2017/07/29 [03:51]  최종편집: ⓒ 자주시보

▲ 박근혜의 최측근이었던 조윤선 장관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재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어 관련 재판부가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받고 있다.  

28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서울연극협회 송형종 회장은 조윤선 장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하고 석방한 재판부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27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황병헌 부장판사가 재판장)는 이 사건 관련 김기춘 전 비서실장에게는 직권남용 등을 이유로 실형 3년을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에게는 위증죄만 인정하고 직권남용과 관련하여서는 무죄를 선고, 집행유예로 석방하였다.

이에 대해 송 회장은 "조윤선 전 장관은 왜 위증을 했을까요? 떳떳했는데 왜 위증을 했을까요, 떳떳했는데. 블랙리스트 실행의 핵심에 있지도 않았는데 누구 때문에 위증을 했을까요? 그 분은 거기 정점에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고 본인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위증을 한 거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위증을 법리적으로 때리면서 더 큰 문제는 풀어줬다는 것은 사법부에 대해서 신뢰감이 상당히, 사법부의 의지가 안 보이는 대목이라고 저는 보여져요"라며 라며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이라고 강하게 반발하고 특검은 즉각 항소하여 반드시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SNS 상에 조윤선 장관 무죄 판결을 내린 황병헌 부장판사의 법복을 벗겨야한다는 국민들의 주장이 쇄도하고 있다.     ©

관련하여 SNS 등에서는 조윤선 전 장관을 무죄석방한 황병헌 부장판사의 사진을 퍼나르며 이런 판사는 법복을 벗겨야한다고 다들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정치권과 법조계에서도 납득할 수 없는 재판결과라고 입을 모으고 있는데 노회찬 전 의원은 재판부 판결대로라면 조윤선 장관은 투명인간이라고 지적했다. 윗선 김기춘이 구속되고 아랫선 김종 전 문체부 차관도 구속되었는데 그 중간의 조윤선 장관만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핀셋 석방이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고 있다.

▲ 법조계에서도 조윤선 장관 석방에 비판적이다.  

나승철 벼호사 등 법조인들도 그래서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고 특히 민변에서는 공식 논평을 통해 잘못된 재판이라고 지적하였다.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도 심각한 표정으로 납득할 수 없는 재판이란 공식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번 재판은 향후 국정농단 재판의 향방을 가늠케 하는 재판이어서 많은 국민들이 관심있게 지켜보았는데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우려가 현실이 된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형량도 너무 적은 데다가 조윤선 장관이 무죄석방까지 되었기 때문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국민적 지적이 많고 관련 문화체육관광부 공무원들에게까지 심각한 자괴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문체부 공무원들이 상부의 부당한 헌법유린 지시에 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암 등으로 3명이나 사망했다고 한다. 문체부 직원들이 오죽했으면 블랙리스트 관련 증거들을 다 모아놓고 특검이 실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조사 나오자 고스란히 넘겨주었겠는가. 이런 많은 증거에도 유독 조윤선 장관만 증거불충분으로 무죄석방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번에 적폐청산을 확실하게 하지 못하면 나라의 미래가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기에 조 전 장관의 무죄 판결에 대한 국민적 분노와 저항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이며 이후 이어질 재판에 최순실, 박근혜 재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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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학은 미신? 상생의 문명 여는 문

나를찾아서
나를 찾아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며, 나를 극복하기도 하고, 더 큰 나로 나아가는 마당입니다. 명상과 고전, 영화에 대한 조현의 독특한 시각을 통해 관념의 성벽을 뛰어넘어 비상하려고 합니다.

역학은 미신? 상생의 문명 여는 문

조현 2017. 07. 28
조회수 460 추천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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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김항의 <정역>(正易)이 동아시아의 역학문명에서 문명진화적 상징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최일범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교수는 <정역> 연구의 대가인 학산 이정호(1913~2004)전집 13권 출간을 기념한 학술세미나에서 “학산 선생은 19세기 후반 일부(一夫)에 의해 등장한 정역을, 오늘날 유발 하라리가 말하고 인류가 주목하고 있는, 문명진화론의 관점에서 이미 해석했다”고 밝혔다.
 “복희역은 팔괘역이고 문왕역은 육십사괘역이다. 발전 진화한 문명의 콘텐츠를 팔괘, 육십사괘가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학산 선생이 말한 우주변화와 인간의 개혁은 정역이 21세기 인류가 직면할 기술혁신과 생태문제로서 이것이 제3의 역인 정역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과제이다. 학산 선생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오, 형제들이여, 어서 바삐 잠을 깨라.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최 교수는 학산이 <정역>을 상극의 죽고 죽이는 문명을 뒤로하고 상생의 문명을 연 키로 보았다는 것이다.
 “인문이 서로 교류하여 동서가 근린이요 사해가 일가 될 날이 멀지 않다. 분욕(忿欲)과 독선에 사로잡힌 족속은 아직도 어리석고 죄악적인 증오와 투쟁을 일삼고 있지만, 사랑이 미움보다 훨씬 생명적이며, 저가 평안해야 나도 편안할 수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날,  한 줄기 회오의 눈물과 더불어 인류애의 즐거움을 깨달아 조양율음(調陽律陰)의 찬가를 높이 부르고, 인종 피부 언어 풍속 습관 종교 등을 초월하여 부디 내 집에 와 밥 먹기를 충심으로 바랄 것이다. 이것은 공연한 백일몽도 아니요 부질없는 이상론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만 우리 인류는 나머지 세기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생생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학산 선생이 정역에서 발견한 새로운 문명 세계를 구현하기 위해 인류가 선택할 것는 서로 사랑하는 인간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진화하지 못하면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정역의 경고라고 한다. ”
 최 교수는 융 분석심리학파의 신화학자 노이만의 신화학(神話學)과 근대문명론을 학산선생의 정역의 샘을 이끌어 내기 위한 마중물로 소개했다. 융 학파의 신화학자 에리히 노이만(E. Neumann)은 인류 문명 초기의 다양한 신화들을 무의식으로부터의 의식의 발생과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유형화하여 시계열(時系列)적으로 분류하였다. 이 시계열은 유아기로부터 청소년기를 거쳐 성년에 이르는 인류의 마음의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방법이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신화 유형은 우로보로스(Urobros) 또는 ‘커다란 고리(Great Round)‘ 이다. 우로보로스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 靈知主義)에서 사용된 것으로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의 고리(環)를 말하는데, 이 상징은 세계의 모든 민족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우로보로스의 상징을 통해서 우리는 정역에서 계열화한 복희팔괘도, 문왕팔괘도, 정역팔괘도의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 로보로스의 닫혀진 원은 그곳에서 만물이 생겨나는 미분화된 시원의 혼돈을 나타낸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우로보로스는 의식이 아직 무의식으로부터 분화하지 않은 발생 상태를 상징한다. 다음 단계는 세계의 부모가 분리됨으로써 뒤이어 ‘위대한 어머니(太母)’가 출현하는 것이다. 세계의 부모란 세계 각지의 우주 창조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세계 시작의 신들로서 오랫동안 굳게 껴안아 결합된 상태로 존재하는 남녀 조상신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인간이 거주하는 세계 공간은 이 양친이 분리됨으로써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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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역에서 우로보로스의 닫힌 원, 즉 만물이 생겨나는 미분화된 시원의 혼돈은 하도(河圖)의 중앙에 위치한 십(十), 무극(无極)으로 표현된다. 정역의 무극(无極)은 융 심리학파에서 의식의 원형, 최초의 무의식으로서, 이것은 혼돈과 같은 것, 알 수 없는 것이면서 모든 생성의 씨앗을 담고 있는 어떤 것이다. 여기서 ‘나’(자아)라는 의식이 태어나고, 나를 중심으로 의식이 강화되고 분화된다. 의식은 본래 발전의 궤도를 따라 일방적인 발전을 한다. 대상을 구분하고 분석하는 가운데 의식은 본래 인격의 통합체, 전체인격에서 멀어진다. 그것이 의식의 속성이다. 그래서 전체정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무의식의 자기원형은 의식의 일방성을 지양하고자 그 대극에 해당하는 상징을 활발히 보내서 의식이 소홀히 하고 있는 대극을 인식하도록 자극을 준다. 이것을 의식의 일방성에 대한 무의식의 보상기능이라고 한다. 보상기능의 목적은 전체가 되는 것. 도가의 말대로라면 도와 일치된 삶을 실현하는데 있다.
  ‘자기’로부터 멀리 가 있는 자아의식(자기소외 Self-alienation)을 ‘자기’로 되돌아오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무의식의 이런 보상작용은 극단적인 정신적 에난치오드로미아(psychic enantiodromia) 현상에서 볼 수 있다. 그것은 정신적 대극의 반전으로 의식의 외골수로 나가는 경향이 극에 달하면 무의식의 보상기능도 극도에 다다라 이와 반대되는 경향이 강해져서 극적으로 의식의 태도를 반전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이 현상은 결국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자기실현’에 그 목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융 심리학에서 무의식과 의식 그리고 최후의 자기실현의 과정은 노이만에게서 우로보로스의 신화 상징으로 해석된다. 무극, 무의식에서 위대한 어머니가 출현한 다음 단계에 나타나는 신화는 영웅전설이다. 영웅은 괴물 퇴치(용, 우로보로스, 무의식과의 전투)에 성공하여 비보(秘寶)를 손에 넣은 남성신이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하면, 괴물은 자아의 독립을 위협하는 무의식의 힘을 상징한다. 영웅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손에 넣은 비보는 자아의식이 무의식의 힘으로부터 독립했음을 보여준다. 발달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신화는 어머니로부터의 정신적 독립을 달성한 청년기를 상징한다. 노이만이 제시하는 신화 발전의 최종단계는 정신적 죽음과 재생의 과정을 거쳐, 혼이 변용하여 새로이 태어나는 ‘재생’ 또는 ‘신생’의 단계이다. 성장한 의식은 이렇게 해서 영원한 생명의 차원과 연결된다.
 정역에 등장하는 하도, 낙서 그리고 복희팔괘도, 문왕팔괘도, 정역팔괘도는 놀랍게도 노이만이 제시한 신화의 진화 발전 과정과,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의 원형인 무의식과 무의식에서 자아의식의 배태, 그리고 최후에 의식과 무의식이 하나가 되어 전체정신을 실현하는 과정과 일치하고 있다. 
 정역에 나타난 복희괘도(伏羲卦圖)는 하늘의 원리를, 문왕괘도(文王卦圖)는 인간의 생장 과정을, 정역괘도(正易卦圖)는 하늘 원리의 궁극적 실현을 나타낸다. 노이만식으로 말한다면 이는 인류 초기 원시 신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상징이며, 또한 융 심리학에 있어서 인간의 의식진화의 과정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융의 일화를 통해서 역학의 지식적 특성에 대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융(C. G. Jung, 1875-1961)은 그의 생애 말기에 동아시아 문명에 특히 관심을 가졌는데 역경을 가장 중시했다. 처음에 융이 주역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점서(占筮) 때문이었다. 융은 점의 본질이 무의식에 내재하는 직관지(直觀知)와 관계한다고 생각한다. 1930년 주역을 비롯해서 논어, 노자 등 유교와 도교의 고전들을 번역하고 융에게 가르쳐준 독일의 중국학자 리하르트 빌헬름(Richard Willhelm, 1873-1930)이 사망했을 때 뮌헨에서 열린 추도집회에서 융은 빌헬름이 주역을 번역한 일을 칭송하고, 주역의 기본적 사유방식이 ‘공시성(共時性)’이라고 정의하였다. 당시 영국 인류학회의 회장이 융에게 “중국인은 왜 과학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라고 물었을 때 융은 이렇게 답했다.
 “그렇게 보는 것은 당신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에는 과학이 있고 그것은 바로 주역이다. 단 그 과학의 원리는 서양의 과학과는 다른 것이다.”
 융이 주역에 집중한 이유 중에 하나는 64괘로 분류된 상징적 이미지 때문이다. 이미지 즉 상(象)은, 언어가 일의적(一義的)인 것과 달리, 마치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관찰하는 주체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중요한 것은 현상을 관찰하는 주체가 동시에 그 현상의 공시적 체험자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인과율의 경우에 주체는 현상 밖에 있으면서 관찰할 뿐이지만, 공시성의 입장에서 주체는 거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이미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우주 사이에 존재하는 공시적 감응으로서 무의식에 잠재하는 일종의 직관지의 능력을 통해서 인지된다. 
 최 교수는 “과연 역학(易學)의 체계에서 근대문명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느냐”고 물음을 던졌다. 그는 “만약 지금 대다수가 신념처럼 묵수하는 ‘유교 = 전근대성’이라는 도식을 전격 해체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역을 전근대적 미신의 일종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오늘날 과학문명과 물질세계는 일견 화려한 진전을 보이고 있는 듯하나 인류애와 정신세계는 매우 궁핍한 상태에 놓여있어 <정역>과 학산의 사상을 다시 되돌아봐야할 때”라고 지적했다.
 “학산 선생이 ‘창조의 대원리적 총체요 대의지적 존재’라고 해석한 천(天)은 인류가 자각한 종교성이며, ‘만물을 생육하는 터전이요 관경’이라고 한 지(地)는 세속성이다. 그리고 천의 정신성과 지의 육신성이 결합한 인간은 종교성과 세속성을 문명의 진화과정에서 구현할 주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종교성과 세속성의 균형을 진화과정에서 구현할 사명을 타고난 존재인 것이다.
 정역에서는 그 균형성을 “조양율음(調陽律陰)”이라고 한다. 양(陽)은 역학에서 정신성을 나타내고 음은 물질성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조양율음은 정신성과 물질성, 즉 종교성과 세속성의 균형을 의미한다. 정역에서 문왕팔괘도(文王八卦圖)와 낙서(洛書)는 종교성과 세속성의 불균형을 상징하며, 소위 서구 근대문명의 경화된 세속성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학산 선생의 정역 해석에서 중핵을 이루는 것은 황극론(皇極論)으로서 곧 인간의 진화, 자기완성”이라고 주장했다.
 “진화생물학에 의하면 인간의 진화는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이다. 생물학자들의 용어로는 이 특별한 ‘개체군’의 유전적 ‘선택상수’가 높아서 그 돌연변이가 결국 지배적인 종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유전적 선택상수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그 종의 몸의 반응이 같아야 하며, 그것은 몸의 진화가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이다. 몸의 어떤 부분의 구조와 기능에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고, 변화된 몸을 가진 개체가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산 선생이 인간완성의 길로서 제시한 과제인 중위정역(中位正易)과 그 구체적 실천을 상징하는 산택통기, 수화상체 뇌품출입(山澤通氣 水火相逮 雷風出入)은 의미하는 바가 깊다고 할 것이다. 인간의 자기 노력과 실천에 의해서 진화의 가능성을 높여 간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학산 선생이 해석하는 정역의 핵심은 사실상 인간의 완성에 집중되어 있다”며 “이 점이 오늘날 인류의 미래 문명을 예측하는 일반적 관점과는 다른 정역의 특성”이라고 밝혔다.

2017년 7월 26일 수요일

맥아더도, 미군 지휘관들도 "원폭 사용 반대"


[전쟁국가 미국] 그로브스 "원폭의 주요 목표는 러시아"
2017.07.27 00:18:59




2400명 희생에 34만 명 살해로 보복한 미국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서 시작돼 1945년 8월 9일 미국의 나가사키 원폭 공격으로 사실상 끝이 났다. 진주만 기습으로 인한 미군 전사자는 2335명. 민간인 사망자는 68명이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34 : 1. 전투원만을 노린 정밀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4만 명이 즉사했는데 이중 군인은 250명이었다. 군인 대 민간인 사망자의 비율은 1 : 159.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은 무차별 폭격이었다.

나가사키에서는 1945년 말까지 7만 명, 1950년까지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히로시마에서는 8만 명 즉사에 1945년 말까지 14만 명, 1950년까지 2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은 공식 발표를 통해 히로시마에서의 일본군 사망자는 3242명이라고 밝혔다.

진주만 기습의 사망자는 2413명인 반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는 34만 명으로 진주만 사망자의 141배에 이른다. 한마디로 지나친 복수극이라 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가 히로시마를 '정당한 전쟁의 부당한 마무리'라고 부른 이유다. 

히로시마 당시 트루먼은 포츠담회담을 마치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다. 오거스타호 선상에서 저녁을 먹다가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실을 보고받은 그는 펄쩍 뛰며 "정말 역사적인 일이야"라고 환호했다. 얼마 후 그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소식을 공표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이 한 일 가운데 가장 "행복한" 발표라고 말했다. 

히로시마 이틀 후, 트루먼이 환호했다는 소식에 민주당의 한 정치인이 대통령에게 전보를 보내 주의를 당부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장치에 대해 환호할 수 있는 미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환호한 이유는 파괴가 아니라 이제 파괴가 종식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참전 이전 '민간인 학살 중단'을 호소했던 루스벨트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기 전인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공습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중단하자며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전투 행위의 와중에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는 민간인들에 대한 무자비한 공습은 (중략) 문명 세계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또한 인류의 양심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현재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비극적 대재앙의 시기에 이처럼 비인도적인 야만이 행해져야 한다면 수십만의 무고한 시민들이 소중한 목숨을 잃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현재 전쟁에 가담하고 있는 모든 나라의 정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긴급한 호소를 공개적으로 하려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떤 상황 하에서도, 방어 수단이 없는 도시의 민간인들에 대한 공습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랬던 미국이 정작 참전 후에는 세계 최악의 공습을 단행했다. 1945년 3월의 도쿄 대공습을 비롯해(1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대한 원폭 공격이 그것이다.  

역사가들은 그 원인으로 진주만 기습에 대한 복수심과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를 꼽는다. 유럽에서는 독일인이 아무리 적이라 해도 인간으로 느꼈으나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간이 아닌, 바퀴벌레나 쥐새끼쯤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실제로 트루먼은 8월 11일, 원폭 공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원자탄 사용에 대해 나보다 더 고민한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의 부당한 진주만 기습, 그리고 미군 포로 살해에 대해 대단히 분노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알아듣는 언어는, 그동안 우리가 계속해 왔던 공습뿐입니다. 짐승을 대할 때는 짐승으로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진실입니다"

하지만 복수심이나 인종주의만으로는 부족하다. 미군 고위 지휘관 대다수가 원폭 사용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맥아더 등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반대했다. 이는 원자탄이 전쟁 수행에 필수적 무기가 아니었음을 뜻한다.

나아가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결정됐음을 말해준다. 그것은 미국 최고위층이 원자탄을 전후 세계 질서 형성에서 매우 중요한 외교 수단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즉 소련을 염두에 둔 것이다.  

▲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에 각각 떨어뜨린 핵폭탄이 폭파하는 모습. ⓒwikipedia.org

참전 이후에는 미영 핵 독점 추구 

마틴 셔윈에 따르면 루스벨트는 이미 1943년부터 외교 수단으로서의 핵무기의 가치를 인식했다고 한다. 또한 영국의 처칠은 미영 공동의 핵 독점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전후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핵무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루스벨트는 핵 개발 사실을 소련은 물론 미국 국민들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오직 처칠과만 핵 문제를 상의했다. 그는 닐스 보어 등 저명한 과학자들이 제의한 핵무기의 국제적 통제를 일관되게 반대했으며 처칠이 제안한 미영 핵무기 독점을 추구했다. 전후 미국과 소련의 협력 가능성에 대해 내심 회의적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초 나치 독일의 핵 개발을 저지하기 위해서 시작된 맨해튼 프로젝트는 소련을 겨냥한 핵 개발로 그 성격이 바뀐다. 이러한 사정을 잘 말해주는 게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의 발언이다.  

그는 1944년 3월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 과학자인 조셉 로트블랫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 프로젝트의 주요 목표가 러시아를 굴복시키는 것이라는 건 당신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고 말해 로트블랫을 놀라게 했다. 그는 또 1954년 4월에 열린 미 의회 오펜하이머 청문회에서 "이 프로젝트 책임자가 되고 나서 두 주일 뒤에 러시아가 우리의 적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른 것이 절대 아닙니다. 이 프로젝트는 바로 그런 토대 위에서 진행됐습니다"라고 증언했다. 

1944년 9월 루스벨트는 뉴욕 하이드파크에서 처칠과 함께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을 승인하는 비밀각서를 체결했다. "충분한 숙고 후에 일본에 대해 사용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독일의 패배가 분명해진 지 3개월 후였다. 같은 달, 그로브스는 핵 공격을 위한 특수비행단을 창설했다. 1750명의 군인으로 구성된 509혼성그룹은 태평양 티니안섬에서 원폭 투하 훈련을 시작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가 사망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직을 물려받은 직후 원폭 개발 사실을 알게 된다. 4월 13일 루스벨트의 측근이자 트루먼의 정치적 멘토였던 제임스 번스는(7월 3일 국무장관 취임) 트루먼에게 원자탄이 있으면 "전쟁 종료 후 우리가 원하는 평화협정 조건을 강요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 25일, 전쟁부 장관 스팀슨은 비밀메모를 통해 트루먼에게 "이 무기를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세계 평화를 유지하고 우리 문명을 보전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보고했다.  

4월 27일, 첫 목표물선정위원회(Target Committee)가 개최됐다. 그로브스 등이 참여한 이 회의에서는 그동안 미군 공습을 받지 않은 도시를 대상으로 '인구 밀집 지역 내 지름 3마일 이상의 도심'을 폭격한다는 원칙이 세워졌고 히로시마 등이 주요 목표지역으로 거론됐다.

이후 몇 차례 관련 회의가 열린 끝에 5월 31일 스팀슨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가 열려 최종 방침을 결정했다. "많은 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으며, 노동자 주택들로 둘러싸인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일본에 대한 사전 경고는 없다"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지만, 최대한 많은 주민에게 최대한의 심리적 충격을 가한다"는 원칙이 추가됐다. ('핵심 군수공장을 공격'한다든가 '민간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희생자 거의 전부가 민간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원폭 투하 사실을 발표하면서 적의 군사기지를 폭격했다고 강변했다.) 

▲ 포츠담 회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스탈린, 트루먼, 처칠(왼쪽부터). ⓒ 미국국립문서보관소

원폭 투하, 일본 항복 여부와 관련 없었다  

트루먼은 원자탄을 투하하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았다. 포츠담회담(7월 17일~8월 2일)에 참석 중이던 7월 25일 스팀슨 전쟁부 장관과 조지 마셜 육군 참모총장이 서명한 작전명령을 승인했을 뿐이다. 명령서 요지는 '8월 3일 이후 날씨가 허락하는 대로 이른 시일 내에 원자탄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7월 25일은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이다. 즉 미국은 일본의 항복 수락 여부와 관계없이 원자탄 공격을 결정한 것이다. 국내 일부 문헌들은 일본이 항복을 거부했기 때문에 원자탄 공격을 받았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이는 틀린 내용이다.

게다가 트루먼은 포츠담선언 서명식에 스탈린을 초대하지 않았다. 따라서 7월 26일 발표된 포츠담선언에는 스탈린의 서명이 들어가지 않았다. 스탈린의 서명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한(소련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한) 일본은 소련의 도움을 얻어 좀 더 나은 항복 조건을 얻어내려는 허망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나가사키 원폭 공격까지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주임 검사로 활동한 미국인 텔포드 테일러는 나가사키 원폭을 명백한 전쟁범죄라고 규탄했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잘한 일이냐 못한 일이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정당화하는 설득력 있는 설명은 결코 들어본 적이 없다" 

당시 미국에서는 원폭 1,2개로 전쟁이 그렇게 빨리 끝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최소한 3개는 필요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게다가 7월 25일 트루먼의 원폭 사용 승인은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8월 3일 이후에는 군부의 판단에 따라 원폭을 몇 번이고 투하할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한 번 더 원폭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일본, 1945년 6월 사실상 항복 결정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3차례 일본 총리를 역임한 고노에 후미마로 공작은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서한을 보내 "일본의 패배가 불가피"하며 "이제 걱정해야 할 것은 패전에 따라 일어날지 모를 공산혁명"이라고 경고했다.  

1945년 4월초 소련은 일본과 1941년에 체결한 소일 중립조약(Neutrality Pact)을 갱신하지 않고 폐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소련의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1945년 6월 18일 천황은 최고전쟁지도회의에 신속한 평화 회복을 원한다고 통보했다. 회의도 같은 의견이었다. 소련이 중재자로서 천황의 안전과 천황제 유지를 보장할 수 있는 항복 조건을 주선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다. 

이러한 일본의 속사정을 미국도 잘 알고 있었다. 7월 6일 미 합동정보위원회는 포츠담에서 회동하기로 한 연합국 합동참모본부에 제출한 비밀 보고서 <적 상황 평가>에서 일본의 '항복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일본 지배층은 군사적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점차 타협을 통한 평화를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무조건 항복은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략) 우리는 일본인의 상당수가 이제 군사적 완패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해상 봉쇄와 전략 폭격에 따른 피해 누적-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고 주요 도시 대부분의 시가지 25~50%가 파괴됐다-으로 그런 생각은 더욱 보편화 될 것이다" 

"무조건 항복 요구가 평화의 유일한 장애물"이라는 7월 18일 자 일본 측 암호 전문도 해독돼 미 정부 최고위층에 전달됐다. 그러나 트루먼과 번스 국무, 스팀슨 전쟁부 장관 등은 "평화를 얻어내기 위한 일본의 술수"라며 애써 무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원자탄 제조에 참여했던 일부 과학자들은 원폭 사용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을 했다. 1945년 5월 말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 화학자 해럴드 유리와 천문학자 월터 바트키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스파턴버그에서 제임스 번스를 면담했다. 헝가리 출신의 실라르드는 가장 먼저 미국의 원폭 개발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다음은 실라르드의 전언.

"번스씨는 전쟁에 이기려면 일본 도시에 원자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다른 행정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이 사실상 이미 전쟁에서 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중략) 당시 번스 씨가 훨씬 더 우려한 것은 유럽에서 러시아가 영향력을 확대하는 문제였다. 그는 우리가 원자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면 유럽 문제에서 소련을 다루기가 한결 쉬워진다고 주장했다" 

과학자들의 원폭 철회 노력 좌절되다 
1945년 6월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의(원자탄 제조의 출발점인 핵연쇄 반응을 성공시켰다) 과학자들은 원자력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하는 여러 위원회를 꾸렸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를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정치위원회는 '원자탄 사용이 과연 현명한 선택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국이 원자탄을 비밀리에 개발해 일본에 아무런 사전 경고 없이 공격한다면 미국의 도덕적 입지가 훼손될 뿐 아니라 '완전 멸망'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소련과의 핵무기 개발 경쟁을 촉발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원자탄의 과학적 원리는 비밀이랄 게 없기 때문에 소련은 곧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학자들은 보고서와 함께 대통령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청원서를 작성했다. 시카고대학 금속학연구소와 오크리지 우라늄농축공장의 과학자 155명이 청원서에 서명했다. 원자탄을 실제로 제작한 로스알라모스연구소의 책임자 오펜하이머는 청원서 회람을 금지하고 이 사실을 그로브스 장군에게 알렸다. 이에 따라 과학자들의 청원서는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해군부 차관 랠프 바드와 전쟁부 차관보 존 매클로이 등 일부 정부 관리도 원폭 사용 반대를 건의했다. 원폭 사용을 최종 결정한 임시위원회(Interim Committee)의 해군부 대표이기도 한 바드 차관은 6월 27일 스팀슨 장관에게 메모를 보내 "위대한 인도주의 국가인" 미국은 소련이 곧 대일전에 참전하고 원자탄이 완성 직전이라는 사실을 일본에 알리고 항복 조건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며칠 후 바드는 해군 차관 직을 사퇴했다.

이에 앞서 6월 18일 존 매클로이는 트루먼이 합참 간부들을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에게 일본에 대해 "천황은 무사할 것이며, (종전 후) 정부 형태는 일본인의 선택을 따를 것이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신형 살상무기를 갖고 있으며,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이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경고했다. 

7월 2일에는 상원 공화당 원내대표인 윌리스 화이트 의원이 동료 의원들에 대한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이 '무조건 항복'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같은 당 소속의 호머 케이프하트 의원은 같은 날 늦게 기자회견을 통해 화이트의 요구를 지지했다. 특히 그는 천황을 폐위하지 않는다는 것만 보장해주면 항복하겠다는 일본 측 의사를 백악관이 이미 접수했다는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한편 <워싱턴 포스트>는 6월 11일 자 사설에서 '무조건 항복'이란 일본인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켜 전투 종식에 오히려 방해가 되는 '불길한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미 5성 장군 7명 중 6명이 원폭 사용 반대 

고위 군사지도자들도 대부분 원폭 사용에 반대했다. 이들은 원폭 투하는 군사적으로 불필요하며 도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미국에는 2차 대전 때의 전공으로 원수로 진급한 5성 장군이 7명 있었는데 이중 6명이 반대 의견이었다. 아이젠하워와 맥아더, 육군 항공단(미 공군의 전신) 사령관인 헨리 아놀드 장군, 해군의 윌리엄 리, 어니스트 킹, 체스터 니미츠 제독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 원자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거부했다. 

유럽지역 연합군 사령관인 아이젠하워는 포츠담회담 당시 스팀슨으로부터 원폭 사용 결정을 통보받았다. 이에 대해 아이젠하워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그가 내 의견을 묻더군요. 나는 두 가지 이유로 반대했지요. 첫째, 일본은 이미 항복할 태세가 돼 있다. 그런 가공할 무기로 그들을 칠 필요가 없다. 둘째, 나는 우리나라가 그런 무기를 최초로 사용한다는 게 정말 싫었습니다" (<뉴스위크> 63년 11월 11일 인터뷰)

이이젠하워 전기를 쓴 역사학자 스티븐 암브로스에 따르면 당시 그는 트루먼과 최고위급 보좌관들에게 반대 의사를 직접 밝혔다고 한다. 

극동지역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는 원자탄은 "군사적 관점에서 전혀 불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45년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이미 졌다" "다음 전쟁은 그 참혹함이 지금보다 1만 배는 클 것"이라고 밝혔다. 

1960년 맥아더는 후버 전 대통령에게 보낸 메모에서 "미국이 항복 조건을 완화해 주었다면(천황제 유지) 전쟁은 몇 달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이어 그는 "(후버의) 현명하고도 정치인다운 충고를(1945년 5월 30일 후버는 트루먼에게 메모를 보내 항복 조건 변경을 촉구했다) 따랐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학살극을 예방했을 것이고, 폭격으로 인한 그 많은 파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항복) 조건을 일본인들이 흔쾌히 수용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단 사령관은 1949년에 낸 회고록 <지구적 사명(Global Nission)>에서 "우리는 원자탄을 쓰든 안 쓰든 일본은 이미 붕괴 일보 직전이라고 보았다"고 밝혔다.

▲1945년 9월 2일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쓰 마모루가 USS 미주리함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유튜브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이자 합참 의장이었던 윌리엄 리 제독은 원자탄은 화학무기, 생물학무기와 함께 "지금까지 내가 들어본 모든 기독교 윤리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전시 법규에" 대한 위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또 이렇게 단언했다. 

"일본은 이미 패했고 항복할 태세가 돼있었다 (중략) 이 야만적인 무기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사용한 것은 일본과의 전쟁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무기를 처음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도덕적 수준은 암흑시대 야만인과 같은 차원으로 전락했다. 나는 전쟁을 그런 식으로 하라고 배우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을 죽임으로써 전쟁에 승리할 수는 없다" (1950년 회고록 ) 

1949년 언론인 조너선 대니얼스와의 인터뷰에서는 분노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은 나에게 '(핵무기) 사용에 합의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중략) 군사목표물만 친다는 것이었죠. 물론 그러고는 최대한 많은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죽였습니다. 그게 바로 그들이 원하는 바였으니까요" 

해군 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은 보좌관에게 "이 마당에 꼭 그래야 한다고(원폭 투하) 생각하지 않네. 그럴 필요가 없어"라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는 "난 원자탄 같은 건 정말 마음에 안 들어"라고 말했다. 

태평양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1945년 10월 워싱턴 기념탑 앞에서 열린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사실 평화를 간청하고 있었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파괴로 원자력시대가 공표되기 전에, 그리고 러시아가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태평양전략공군사령관 칼 스파츠 장군은 1945년 8월 7일의 일기에 "처음 워싱턴에서 내게 원자탄 얘기를 했을 때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주민 전체를 죽이는 도시 폭격에 대해서는 원래 찬성한 적이 없다"고 적었다. 

종전 이듬해인 1946년, 남태평양함대 사령관 윌리엄 홀시 제독은 "첫 번째 원자탄은 불필요한 실험이었다 (중략) 그걸 투하한 건 실수였다. 그 때문에 수많은 쪽발이가 죽었지만. 그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러시아를 통해 꾸준히 평화를 타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1949년 의회 증언에서 "나는 민간인에 대한 폭격, 특히 원자탄 폭격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고 밝혔다. 

도청한 적대국 외교 전문의 요약보고서 작성책임자인 카터 클라크 준장은 해상 봉쇄만으로도 일본은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일본의) 상선을 계속 침몰시키고 기아를 유발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굴복시켰다.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우리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는 것을 적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인들을 두 발의 원자탄을 위한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재래식 폭탄에 의한 일본 공습을 지휘했던 커티스 르메이 장군은 "원자탄과 러시아의 참전이 없었어도 일본은 2주 안에 항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1945년 9월 21일 <뉴욕타임스>)

1945년 8월말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주장했던) 번스 국무장관조차 원자탄이 전쟁 종식에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1945년 8월 30일 <뉴욕타임스>는 번스가 "일본이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탄이 떨어지기 이전에 이미 패배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러시아 쪽 증거를 인용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고위 군 지휘관들이 원폭 투하 전에 이러한 입장을 대통령에게 강하게 주장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로브스가 야전 지휘관의 폭격 관련 발언은 모두 전쟁부의 사전 승인을 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맥아더를 비롯한 장군들 입에서 원자탄 없이도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길 원치 않았다" 

요컨대 미 군사지도자들의 반대는 개인 의견에 불과할 뿐이었다. 원폭 사용은 군사적 필요가 아닌 정치적, 또는 전략적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2차 대전의 또 다른 승전국 소련을 의식한 무력 과시가 목적이었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맥아더, 아이젠하워 등 원폭 사용에 반대했던 이들이 후에는 핵무기 옹호로 입장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에서 중공군에게 패퇴하자 북한 및 만주 지역에 대한 원자탄 공격을 강력히 요청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대통령이 된 후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을 미국의 공식 군사전략으로 채택했다.

하긴 아이젠하워 정부 국무장관으로 대량보복 독트린을 수립한 존 포스터 덜레스도 히로시마 당시에는 원폭 사용을 강력히 규탄했다. 당시 미국교회연합회 지도자였던 덜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국가라고 자칭하는 우리가 원자력을 그런 식으로 사용한 것에 대해 도덕적으로 아무런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온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원자무기는 정상적인 무기의 하나로 여겨지고 그리하여 인류가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파멸하는 토대가 마련될 것이다" 

이러한 변모는 무엇을 말하는가? 히로시마 이후 미국 정부는 '원자무기를 정상적인 무기로 여겨지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속이고 대중에 대한 정보 은폐와 왜곡을 해왔음을 의미한다. 다음 회에는 지난 회에 이어 '히로시마를 둘러싼 기억투쟁'을 살펴보기로 한다.
inkyu@pressian.com다른 글 보기

▶ 필자 소개
서울대학교를 나와 경향신문에서 워싱턴 특파원, 국제부 차장을 지내다 2001년 프레시안을 창간했다. 편집국장을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했고, 2013년 프레시안이 협동조합으로 전환하면서 이사장을 맡았다. 남북관계 및 국제정세에 대한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연재를 계속하고 있다.

박근혜 재판, TV 생중계가 인민재판? ‘국민의 알 권리’이다

대한민국은 재판의 공개를 이미 헌법상 원칙으로 규정해놓고 있다
임병도 | 2017-07-27 09:08:17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 박근혜씨와 최순실씨가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박근혜씨의 1심 판결선고가 TV로 생중계될 수 있게 됐습니다. 대법원은 25일 대법관 회의를 열어 재판장의 허가로 1·2심 주요사건의 판결 선고에 대한 중계방송이 가능하도록 관련 규칙을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자유한국당은 대법원의 TV 생중계 허용에 대해 “21세기 인민재판의 부활을 우려한다”라고 밝혔습니다.
강효상 대변인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문재인 정부의 행보에 대한 우려가 팽배한 상황에서 사법부라도 삼권의 한 축으로서 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며 “정권의 눈치를 보며 무원칙 기관으로 전락하고 있는 사법부의 행태에 국민의 신뢰는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박근혜씨 재판에 대한 TV 생중계가 ‘인민재판’인지, 각국의 사례를 포함해 알아보겠습니다.

‘미국 허용,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은 제한적 허용’
▲ 각국의 재판중계 제도 현황, 한국은 판이나 변론 시작 전에만 제한적으로 촬영이 허용됐다. 그러나 2013년 ‘국외이송약취 사건’과 2015년 ‘유책배우자 이혼청구 사건’,2016년 ‘세월호 관련 사건’ 등을 생중계했다.

각국의 재판중계제도를 보면 미국은 워싱턴 D.C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 법원에서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독일, 프랑스, 일본은 금지 또는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영국·독일·프랑스·일본이 형사재판에서 TV중계를 금지하는 이유는 피고인의 인격권과 방어권을 침해할 위험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원칙도 점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영국대법원은 2005년부터 헌법개혁법에 따라 재판과정 중계방송을 전면 허용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헌법재판과정에서 간접 공개를, 프랑스도 헌법재판에 대한 재판 중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도 1948년까지는 재판과정 사진 촬영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조명기구가 깨져 재판관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법관의 착석 후 개정을 선언할 때까지의 2분 이내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캐나다는 대법원 대법원·항소심에 대해서는 재판중계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호주와 뉴질랜드, 스페인, 노르웨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고속철 폭파사건이나 기차 탈선 사건, 총기 난사 사건 등은 부분적으로 중계하기도 했습니다.
TV중계를 제한하고 있는 영국·독일·프랑스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재판중계를 점차 확대하는 이유는 주요 사건의 경우, 인격권과 사생활 보호보다 일반 국민이 얻는 정보이익의 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민재판인가? 국민의 알 권리인가?’
헌법재판에 대한 TV중계는 각국 사례처럼 허용하는 분위기입니다. 문제는 형사재판과정에 대한 중계방송입니다. 형사재판 중계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모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형사재판의 심리과정이 공개되면, 사법부가 청렴하고 합리적으로 바뀌어 재판의 공정성이 보장될 수 있습니다. 특히 재판과정이 생중계되면 ‘막말 판사’를 막을 수 있다는 연구 보고서도 있습니다.(관련기사:“생중계 재판이 막말판사 막는다” 국내 첫 연구보고서 나와/조선일보)
또한 재판공개로 피고인들의 범죄 사실과 얼굴, 신원이 공개되면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법의 준수 및 법규범을 실현하는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재판중계를 통해 사회구성원인 국민의 관심을 유도하고,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재판을 사전에 알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헌법상 형사피고인에 대한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할 수 있는 등의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기본권과 방어권, 사생활이 침해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 피고인이나 증인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홍보 내지는 정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도 있으며, 법관들이 인기에 영합하는 행동을 벌일 수도 있습니다.

‘정치인의 뇌물수수사건, 기업 부정부패, 대형인명 피해 사건은 재판중계 필요’
아이엠피터는 모든 형사재판의 하급심을 TV로 중계하는 것은 반대합니다. (대법원은 법률심으로 피고인의 방어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낮음) 그러나 아래와 같은 사건은 재판중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① 정치인의 뇌물수수와 비리
② 기업의 부정부패 
③ 연쇄살인사건
④ 미성년자 집단 강간등 인권유린 성범죄 사건
⑤ 세월호 참사 등 대형 인명 피해 사건
비록 하급심이라도 위의 사건들을 중계하면 공공의 이익을 얻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특히 국민적 관심이 높은 사건의 경우 국민과 여론의 감시 속에서 재판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재판중계가 허용된다면, 오히려 자유한국당이 우려하는 제3자가 영향력을 행사하여 재판관의 독립성을 해치는 행위를 막을 수도 있습니다.
박근혜씨에 대한 재판중계는 ‘정치인의 뇌물수수와 비리’에 해당하며,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사건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재판의 공개를 이미 헌법상 원칙으로 규정해놓고 있습니다. (헌법 제109조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한다’) 다만, 법원조직법에 따라 중계방송을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마저도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는 가능합니다.
박근혜씨에 대한 재판 TV생중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자, 공공의 이익을 위해 꼭 필요한 절차입니다.


본글주소: http://poweroftruth.net/column/mainView.php?kcat=2013&table=impeter&uid=1371 

“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50대 50, 국민 결정에 승복해야죠”


탈핵 운동가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인터뷰
양아라 기자 yar@vop.co.kr
발행 2017-07-26 19:15:32
수정 2017-07-26 20:5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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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50대 50, 장담 못 합니다. 저도 이런 일이 처음이라..."
탈핵 운동가로 8년 가까이 일해 온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에게 신고리 원전 5·6호기 중단 여부에 대해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예측하지 못하겠어요"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탈원전 이슈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아니라, 팽팽한 찬반의 공론장이었다. 앞으로 3개월 간 원전 찬반 측의 설득전이 펼쳐질 것이다.
정부는 지난 24일 공론화 위원회를 꾸렸고, 앞으로 3개월 간 시민 배심원단을 선정하고 토론의 과정을 거쳐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그는 시민 배심원단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결론이 나와도 승복해야 합니다. 국민 대표가 논의해서 결론을 내면 정부가 100% 그대로 승복한다고 했어요. 민주주의가 더 중요합니다"
그의 말에서 '페어플레이' 정신이 보였다. 그의 말처럼, 민주주의가 없이 탈원전은 없다. 그는 기본원칙인 민주주의가 정착한 나라에서 탈원전이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김 교수는 "신고리 5·6호기 건설된다 하더라도 로드맵이 살짝 바뀌는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탈원전 여부는 국민이 결정해야”
신고리 5·6호기 운명을 결정할 공은 왜 국민에게로 패스됐을까? 의대 교수인 그는 '원전 전문가와 국민'을 '의사와 환자'에 비유했다.
"병원에 가면 전문가인 의사가 결정을 합니까? 아니요. 환자가 결정합니다. 의사는 병에 대해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죠. 원자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원자력 전문가는 여태까지 국민에게 원전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고 설명하는 일은 하지 않고, 비밀리에 자기들이 결정을 해왔어요."
그는 원자력에 대한 결정은 국민이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원자력에 의해서 혜택을 받는 것도, 사고가 나서 피해를 보는 것도 국민입니다. 물론 병원에 가는 수많은 환자들이 자신의 병에 대한 의학적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도 자기 몸에 대한 결정이니까 본인이 해야 합니다. 원전에 관해서도 국민들이 공학적 이해가 높지 않더라도 판단과 결정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나라 공대 나온 사람이 수백만명, 잘 모르겠지만 2백만명이 넘을 거예요. 원자력 안전성 보고서는 공대 나온 사람들은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가 아니라고 국민을 바보 취급하는 태도는 아주 기분 나쁘죠, 시대착오적인 거죠"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원자력 지지자들은 돈과 권력과 풍부한 인맥을 갖고 있는데 반해서 원자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성과 상식, 윤리의식 이외에 가진게 없다는 사실 때문에 원자력에 관한 진실이 끊임없이 은폐되고, 거짓말이 횡행하는 사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시민들의 인식의 깊이와 실천적 자세가 결정적인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
김익중 동국대 의대 교수ⓒ김철수 기자
"괴담교수가 됐어요"
어느날 그는 일부 보수 언론에 '괴담 교수'로 찍혔다. 발단은 된 사건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6년동안 천 번도 넘게 해온 탈핵 강의였다. 이 강의는 '한국 탈핵'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일반인뿐만 아니라 원전 전문가들에게도 똑같이 원전의 위험성에 대해서 강연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언론들은 '원전 괴담 강의'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그런데 더 웃긴 건 괴담이라는 기사를 보고 다른 기자들은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괴담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난 괴담교수가 됐어요. 다른 매체에서는 궤변이라고 살짝 틀었어요. 창조적이죠. 이젠 궤변교수가 됐네요 (웃음)"
"6년 전부터 꾸준히 똑같은 내용을 강의했는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강의 내용을 잡아서 검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도리에 맞는 짓인지 물어보고 싶어요. 제 강의가 부정확하고, 틀렸다라고 생각이 들면 저를 불러다가 검증 토론회를 해도 돼요. 그래서 제가 제안을 했어요. 그들이 지적한 내용 전부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원전 비전문가'라고 비난도 받고 있는 그는 의대 교수이다. 의대 교수가 탈핵 운동에 뛰어든 이유가 무엇일까? 경주에 있는 동국대 의대 교수인 그는 경주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그곳은 원전 6호기가 밀집한 곳이고, 십만년이 넘도록 핵폐기물을 보관해야 할 중·저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장도 있다.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 얘기니까 관심을 갖게 됐고, 2009년 경주 방폐장 중지 운동에 뛰어들었다. 김 교수에겐 아쉽게도 경주 방폐장은 유치가 됐다.
"경주 방폐장은 방사능이 샐 겁니다. 암반이 나쁜 곳에 건설이 됐고, 지하수가 아주 많은 곳에 건설이 됐어요. 그래서 건설하는 동안에는 하루에 5천톤씩 지하수를 퍼내면서 공사를 했어요. 공사가 끝났는데 지금도 2천톤씩 퍼내요. 운영이 끝나고 난 다음에 폐쇄하면 못 퍼냅니다. 그때부터는 지하수를 통해서 방사능이 새기 시작할 겁니다. 한번 나가기 시작하면 보수공사도 안합니다. 시간 문제일 뿐이지 다 나갑니다. 그런데 안전하다고 결론을 내는 것은 의사로서 인정 못합니다"
원전은 일본에서는 '화장실 없는 맨션'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원전은 '무책임'하다고 말한다. 부모세대들은 원전으로부터 혜택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미래세대에 핵폐기물은 재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결정적으로 2011년 일본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가 나는 것을 보고 원자력이 안전 문제는 의학적인 문제라고 생각돼 본격적으로 탈핵 운동에 나섰다.
그는 핵사고가 나면 그 이후엔 인간이 통제하거나 다룰 수 없다고 경고한다. 원전의 안전성을 묻는 질문에 김 교수는 "고장 안 나는 기계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그는 핵사고는 교통사고처럼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예측하지 않았던 일이 오는 겁니다. 그렇게 큰 지진이, 큰 쓰나미가 올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또 후쿠시마의 노후원전인 1~4호기만 딱 골라 터질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다 안전한 줄 알았죠.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 인간이 오만한 겁니다"
"만일 방사능이 눈에 보였다면 원자력은 가장 더러운 발전 방식이었을 거예요. 이게 눈에 안 보이고, 냄새도 안 나고, 맛도 없고, 우리 오감으로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클린에너지, 깨끗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굉장히 위험하죠."
"원자력계가 그동안 원자력을 싸다고 해왔어요. 그런데 핵폐기물을 십만년간 보관할 기술도 없다는 걸 국민들이 알고 있어요. 그래서 비용을 얼마로 산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싸대요... 결국 대부분 국민들이 원전이 위험하고 경제성도 의심되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는 대안이 있다는 것만 보여주면 됩니다"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
동국대학교 의과대학 김익중 교수ⓒ이승빈 기자
"대안이 있다"
김 교수는 세계 통계 수치를 예로 들었다. "전 세계의 전기 생산량 중에서 원자력은 10%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재생에너지는 25% 차지합니다. 지금 현재 이미 원전 전기 생산량의 2.5배를 전 세계에서 재생에너지로 만들고 있어요. 5년 후에는 5%가 더 증가해 30%가 될 거예요. 재생에너지는 1년에 1%씩 증가하는 반면 원자력은 30년 전부터 10% 근처에 머무릅니다"
그의 말대로 세계 통계만 봐도 원전 사업은 '사양산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어가는 사업이지만, 그곳에도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이에 그는 "원전은 폐쇄하는데 30년 걸립니다. 그래서 고리1호기에 근무하는 사람들 다 짤렸습니까? 이 분들은 30년 정도 더 일을 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또 그는 원전기술을 가진 우리가 사양산업인 원전 건설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인 폐로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60년 후에 탈원전을 해요. 그동안 원자력 하는 사람들이 다 필요합니다. 또 10만년간 핵폐기물을 보관해야합니다."
탈원전은 하루 아침에 원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정책이다. "실제로 원전은 30년 정도 후에 많이 줄어들어요. 그러니까 30~40년 후에 대한민국 에너지에 관해서 지금 논의하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당장 전기료가 오를 것처럼 얘기하고 전기가 부족할 것처럼 얘기하는 건,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정부가 탈원전을 선언을 했지만 오히려 5년 사이에 원전은 줄지 않고 늘어난다. 원전 5개를 짓고 있는 중인데 신고리 5·6호기 2개의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한다. 건설이 중단된다고 해도 3개는 완공되는 것이다. 탈원전 운동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만족스럽지 않은 게 사실이다. 5년 사이에 전 정부에서 건설을 시작한 원전들이 완공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게 무슨 탈원전이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탈원전과 에너지 전환은 세계적인 대세다. 이미 다른 나라들은 30년 전부터 재생에너지 사업을 시작을 했고 현재 꽃을 피우고 있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늦게 탈원전 문제의 논의가 시작됐다.
"'후래자(後來者) 삼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술자리에 늦게 온 사람은 세잔을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늦게 시작하기는 했지만 빨리 따라 잡을 수 있습니다. 재생에너지 생산률 꼴찌로 출발했지만 10~20년 내로 세계 평균만 따라가면 탈원전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는 원전 개발의 장미빛 환상에서 벗어나 재생에너지로 전환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재생에너지는 안전합니다. 아마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떨어지는 게 최대 사고일 거예요. 이산화탄소·방사능·미세먼지 제로죠. 오염물질이 안 나옵니다. 햇빛과 바람은 아무리 가져다 써도 고갈되지 않는 무한대 에너지입니다. 햇빛과 바람은 연료비가 공짜라 세금도 못 붙여요. 우리나라 에너지 해외의존도 97%인데, 전부 수출에서 번 달러로 사와야 하는 것들 이잖아요. 햇빛과 바람은 국산 에너지입니다"
탈원전 정책은 5년 안에 단기에 가능하지 않다. 그도 탈원전은 국가의 '장기적인 에너지 계획'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탈원전 정책은 정권에 따라 왔다갔다 할 겁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의견이 한 곳으로 모아지면 그 다음에는 뒤바뀌지 않습니다. 결국 국민을 얼마나 설득해내냐가 승부가 될 것입니다"

팽덕회는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17.07.27 10:29l최종 업데이트 17.07.27 10:29l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한국전쟁 휴전협정 조인식.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간 전개됐다. 그런데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전선이 사실상 고착된 것은 1951년 3월경이다. 전국적 범위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은 처음 9개월뿐이다. 

1951년 7월부터는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부전선에서 소모적인 고지 쟁탈전이 반복됐다. 일례로, 1952년 10월 6~15일 강원도 철원군의 백마고지에서는 12차례나 전투가 벌어져 7차례나 고지 점령자가 뒤바뀌었다. 이 하나의 전투에서, 중국군(중공군)은 1만여 명의 인명피해(전사·부상·행방불명·포로)를 입고, 한국군은 3500명 정도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한국전쟁 전체 기간에 인명피해를 입은 한국 군인은 약 62만 명이다. 이 중에서, 전선이 고착된 1951년 3월까지 피해를 당한 한국 군인은 약 17만 명이다. 이보다 근 3배인 45만 명 정도는 그 이후에 피해를 입었다. 주로 휴전협상 기간에 피해를 당한 것이다. 협상 중에 벌어진 고지 쟁탈전이 그런 비극을 양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했다. 이참에 미군의 힘으로 북진통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 또 통일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이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면 안보를 기약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휴전협상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유엔군 명의로 참전한 미군이 협상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김일성도 처음엔 휴전을 반대했다. 애초의 경계선인 북위 38도선 이북에서 전선이 고착됐으니, 영토를 손해 보는 상태로 전쟁을 끝내는 게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1951년 6월부터는 김일성도 휴전을 적극 찬성했다. 중국과 소련의 휴전 압력을 뿌리칠 수 없었던 데다가, 소모적 전쟁에 더 이상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휴전을 반대하는 한국은 협상에 참여하지 못하고 휴전을 찬성하는 북한·중국·미국에 의해 회담이 진행됐지만, 이 협상은 2년간이나 지루하게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는 동일한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적 양상이 되풀이됐다. 그로 인해 애꿎은 병사들만 죽어갔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미워했을지도 모른다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백마고지역.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소재.
ⓒ 김종성

김일성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끝까지 주도하지 못했다. 미군의 반격으로 나라를 잃을 뻔한 그로서는 중국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1950년 12월 3일 '조선·중국 연합지휘부 성립에 대한 조·중 쌍방 협의문'을 체결하고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팽덕회(펑더화이)한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이승만은 물론이고 김일성도 최종 지휘권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당초, 김일성은 북한군과 중국군이 각각 별개의 지휘체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 이 때문에 팽덕회와 갈등을 빚었다. 팽덕회는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이 11월 16일자 서신에서 "중국 동지가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데 동의한다"고 밝힘으로써 김일성은 자존심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39세)은 이승만이나 맥아더보다 팽덕회(53세)가 더 미웠을지도 모른다. 작전지휘권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1950년 10월 19일 참모 1명 및 경호원 2명과 함께 지프차로 압록강 철교를 넘은 팽덕회는 군사행동을 최대한 천천히 전개했다. 1950년 8월 15일 이전에 끝낸다는 계획으로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으로서는 그런 '만만디' 태도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팽덕회한테는 중국의 이익이 최우선이었다. 1945년 이전 항일전쟁에서부터 공로를 세운 그는 임표(린뱌오)로 대표되는 반대론자들을 제압하고 한국전쟁 참전을 관철시켰다. 팽덕회가 그렇게 한 것은 북한이 아니라 중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참전 문제가 논의된 10월 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 회의에서 그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미군과 대치하면, 미군이 무슨 빌미든지 만들어 압록강을 넘을 수 있다'는 논리로 중국 지도부를 설득했다. 

미군 몰아내기보다 중국군 현대화에 중점
 팽덕회.
▲  팽덕회.
ⓒ 위키백과

그렇게 열렬히 참전을 주장했던 팽덕회는 자기 부하들이 청천강(평북과 평남의 경계) 이남으로 미군을 밀어내자 심리적 여유를 갖게 됐다. 북한·중국 경계선에서 미군이 점차 멀어지자, 그는 호흡을 길게 하면서 전쟁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팽덕회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세계적인 냉전 구도에 따라 한반도에서도 두 개의 힘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국을 북·중 국경에서 최대한 멀리 밀어내되 중국군을 불필요하게 희생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이런 가운데 팽덕회가 최고의 역점을 둔 것은 소련의 군사 지원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소련은 중국군을 참전시킬 목적으로 대규모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이를 이용해 이참에 중국군을 현대화시키자는 게 팽덕회의 계획이었다. 미군을 몰아내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데 중점을 뒀던 것이다. 

그런 계획에 따라 팽덕회는 주요 전투가 끝날 때마다 일부러 긴 휴식을 가지면서 소련에 군사지원을 요청했다. 전투 장비도 보내주고 수송용 차량도 보내주고 미그기도 날려주고 금전 차관도 지원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한국근대사연구> 제33집 속에 양영조의 '6·25 전쟁 시 중국군의 지구전 전략과 군사개혁'이란 논문이 있다. 이 논문에 인용된 중국군 간부 섭영진의 <섭영진 회고록>에 따르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팽덕회의 기획 덕분에 한국전쟁 기간 동안에 전체 부대의 3분의 2가 현대식 장비를 갖추는 성과를 얻었다. 미군과 싸우는 대가로, 전쟁 중에 소련한테서 단단히 지원을 받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팽덕회는 김일성의 희망사항을 들어주기보다는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쪽으로 전쟁을 활용했다. 이를 위해 남진을 최대한 늦췄다. 덕분에 미군은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애타는 쪽은 김일성이지 팽덕회가 아니었다. 

팽덕회가 시간을 끌며 노골적으로 국익을 추구하니, 김일성은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1951년 1·4 후퇴 이후로는 더 그랬다. 1월 4일 국군이 서울에서 후퇴하고 1월 5일 중국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로, 팽덕회는 또다시 시간을 끌기 시작했다. 화가 난 김일성이 1월 10일 박헌영과 함께 팽덕회를 찾아가 따졌지만, 팽덕회는 "내가 총사령관으로서 부적격하다고 생각하시면, 내 목을 베시오"라며 으름장만 놓을 뿐이었다. 

팽덕회, 휴전회담마저도 만만디 작전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한국전쟁 당시의 중국군(중공군).
ⓒ 위키백과

팽덕회는 휴전협상 과정에서도 김일성의 속을 단단히 태웠다. 휴전을 거부하는 김일성을 제압하고자 스탈린까지 동원해 휴전 합의를 관철시킨 팽덕회였다. 그랬던 팽덕회가 막상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또다시 '만만디' 작전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김일성이 휴전을 서두르는 쪽으로 태도를 바꿨는데도, 오히려 팽덕회가 느긋해진 것이다.    

1951년 하반기에 벌어진 휴전협상 당시, 중국측은 '38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북한의 주장을 물리치고 '현재의 경계선을 기준으로 휴전하자'는 미국측 요구에 동의해줬다. 미군이 확보한 영역이 38선 이북에 있었으므로, 중국의 태도는 미국을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느 경우든 자국 영토 밖이기 때문에, 이 문제로 과도한 에너지를 소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의 휴전선은 이렇게 북한의 의사를 무시한 채 중국과 미국의 합의로 생겨난 것이다.  

휴전회담에서 지금의 휴전선이 군사분계선으로 합의된 때는 1951년 11월이다. 정상대로라면 휴전회담은 이때부터 몇 달 안에 끝났어야 한다. 1951년 12월이나 1952년 연초에 끝났어야 한다. 그런데 이 시점부터 협상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포로송환 문제를 놓고도 팽덕회가 또다시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포로송환 문제와 관련해 팽덕회는 전쟁을 빨리 끝내기보다는 중국군 체면을 살리는 것을 우선시했다. 미국은 희망하는 포로에 한해 본국으로 송환하자고 주장했다. 미군 포로보다 중국군 포로가 훨씬 더 많고, 중국군 포로 중에는 본국 송환을 꺼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팽덕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중국군 포로들이 타이완(대만)이나 미국행 혹은 한국행을 선택할 경우, 자기 조국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체면을 살릴 목적으로, 또 소련의 지원을 최대한 얻어낼 목적으로 그는 휴전협상을 질질 끌었다. 

그러는 동안, 백마고지를 비롯한 중부전선에서는 한 뼘의 땅이라도 더 뺏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무한정 벌어졌다. 이로 인해 무고한 병사들만 곳곳에서 죽어갔다. 

결국 팽덕회는 미국측 주장을 많이 반영하는 쪽으로 포로송환 문제를 매듭지었다. 포로의 자유의사에 맡기되 본국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는 중립국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나왔다. 팽덕회는 비록 휴전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중국군을 현대화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중국으로 돌아가는 그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