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감사한 존재이다.
인문 운동가의 인문 일지
(2025년 10월 28일)
1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리즈 마빈 글, 박은진 역)라는 책을 샀다. ‘꾸준히, 천천히, 묵묵히 삶을 키우는 나무의 지혜’를 얻고 싶어서 이다. 가급적 <인문 일지>에서 나무 이야기를 당분간 이어갈 생각이다. 복잡하고 때로는 혼란스러운 삶 속에서 차분한 이성과 따스한 마음을 지켜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나무는 무려 4 억 년 가까이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다. 그 나무들에 대해 10월 초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아침 산책 길이 더 흥미롭다. 나무들을 더 잘 살펴보게 된다. 우선 나무에 관한 시를 한 편 공유한다.
나무 / 김현승
하느님이 지으신 자연 가운데
우리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것은
나무이다.
그 모양이 우리를 꼭 닮았다.
참나무는 튼튼한 어른들과 같고
앵두나무의 키와 그 빨간 뺨은
소년들과 같다.
우리가 저물녘에 들에 나아가 종소리를
들으며 긴 그림자를 늘이면
나무들도 우리 옆에 서서 그 긴 그림자를
늘인다.
우리가 때때로 멀고 팍팍한 길을
걸어가면
나무들도 그 먼 길을 말없이 따라오지만,
우리와 같이 위으로 위으로
머리를 두르는 것은
나무들도 언제부터인가 푸른 하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
가을이 되어 내가 팔을 벌려
나의 지난날을 기도로 뉘우치면,
나무들도 저들의 빈 손과 팔을 벌려
치운 바람만 찬 서리를 받는다, 받는다.
나무는 우리 인간에게 감사한 존재이다. 이산화탄소를 들이마시고 산소를 내뿜어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무가 보여주는 지혜는 길게 나열해 볼 수 있다.
▪ 나무는 다른 나무들과 보이지 않는 관계 망을 이루고, 위협을 감지하면 적극적으로 대응도 한다.
▪ 나무는 바람에 쓰러져도 끝이라 여기지 않는다. 포기하기는 커녕 땅에 누운 채로 기발하고 정교한 방식으로 성장을 이어간다.
▪ 나무는 변화에 적응하고, 풍파를 견디며, 마침내 생명을 활짝 피워내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2
오늘 선택한 나무는 주목(朱木)이다. 주목은 상록 침엽수이다. 침엽수이긴 하지만 전나무나 소나무에 비하면 비교적 넓은 잎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나무 껍질이 붉은 빛을 띠고 속살도 붉어 주목(朱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주목은 주로 해발 700m 이상의 고산 지대 경사 지에서 서식하는 아한대성 수종이나, 저 지대에서도 잘 적응하며, 흔히 관상 수로 기른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자라며, 러시아 동부, 일본, 중국 동북부 등에 분포한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오래 살고, 죽어서도 썩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는 나무로 유명하다. 한국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은 나무는 주목이다. 그만큼 성장 속도도 느리다. 유럽에서도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주목은 오랜 삶의 지혜를 품은 할머니 같은 나무이다. 서두르지 말 것, 차분히 계획할 것,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것, 이런 삶의 자세는 우리가 어디를 행해 나아가야 할 지를 알려준다. 예로부터 주술적 상징을 지닌 신비로운 나무로 여겨졌고, 오랜 생명력을 자랑하며 2000년까지도 산다고 한다.
하지만 이 나무의 정확한 나이를 알기는 어렵다. 자기 나이를 감추는 듯 세월이 흐를수록 속이 텅 비는 경우가 많아 나이테를 알 샐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나무의 장수 비결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자라면서 뿌리를 넓게 뻗어 내리는 데 있다. 혹시라도 나무가 훼손될 경우를 대비해 뿌리에 영양분을 저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처럼 느긋하게 가되 조금은 신비스러워도 괜찮지 않을까?
3
우리가 사는 길에는 ‘비움의 길’과 ‘채움의 길’이 있다.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조금은 서운한 일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 해보면, 버린다는 것은 상추를 솎아 내듯이, 더 큰 것을 키우는 손길일 수도 있다. 노자의 <<도덕경>> 제15장의 마지막 구절이 기억난다. “도(자연의 길)를 아는 사람은 채워짐을 원하지 않는다. 오직 채워짐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멸망하지 않고 영원히 새로워진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保此道者(보차도자) 不欲盈(불욕영),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
‘도’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채우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채워 지길 바라지 않는다. 인간이란 생래적으로 ‘채움의 길’을 간다. 뭐든지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더 채우고 더 가지려 한다. ‘도’를 알고 따르는 사람은 ‘채움의 길’을 버리고 ‘비움의 길’을 걷기에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 로다”하고 노래할 수 있다. ‘있음 그대로(being)’에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된다.
마지막 문장은 어렵다. 夫唯不盈(부유불영) 故能蔽不新成(고능폐불신성)는 ’그래서 도를 아는 사람은 굳이 채우려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하지, 새로운 모습으로 완성치 않는다’로 풀이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도올은 “그러므로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부질없이 새롭게 작위(作爲)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로 풀이한다. 허(虛)를 극대화 시키면서 자꾸 채우려 하지 않는다는 테마를 강조한 것이라 본다. 나는 “불신성(不新成)”이란 단어는 혁신을 부정하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인위를 덧댈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읽는다. 그러면서도 “불신성(不新成)”을 “이신성(而新成)”의 오사(誤寫)로 보고, 이렇게 풀이 하기도 한다. “능히 자기를 낡게 하면서 또 새롭게 생성한다.” ‘끊임 없는 생성(becoming)’의 창조력을 강조한 것으로 본다.
어쨌든 노자의 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특정한 ‘본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 즉 자신 안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두고 있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그 반대편 것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존재하며, 그 반대 방향을 향해 열려 있다. 그래서 어떤 특정한 본질을 최대로 발휘 시키려 하거나 그 본질을 꽉 채우려 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 해진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의 철학은 해체적이다. 주목에서 노자의 생각을 읽었다. 아침 사진은, 산책 길에서 주목 빨간 열매를 만나 찍은 것이다.
4
우리는 인문학을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연습’이라 한다. 낯선 것은 곧 내 삶의 경계 밖의 다른 모습이며, 그것을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가 그러니까 인문적 삶이다. 사람은 낯선 경험 속에서 비로소 깊이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한겨울 수도관이 얼어 물이 나오지 않을 때 우리는 물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고난과 고립 속에서 친구가 내 일처럼 도와줄 때, 우리는 관계의 귀함을 새삼 느낀다.
화순 불암사 주지 법인 스님이 가르쳐 준 다음의 일화가 인문적 삶이 무엇인 지를 알려준다. “사리불”은 석가모니 붓다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혜가 뛰어난 수행자였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붓다의 제자는 아니었다. 사리불은 친구 목건련과 함께 [붓다가] 산자야라는 수행승의 제자로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스승의 가르침에 만족하지 못했고, 깨달음과 해탈로 이끌어 줄 참된 스승을 간절히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사리불은 탁발하러 마을로 갔다가 유난히 맑은 기운을 지닌 한 수행승을 보았다. 사리불은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이며, 그분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그 수행승은 자신이 붓다의 제자 앗사지 비구라 밝히며 말했다. “나의 스승께서는 ‘모든 법은 원인에 의해 생겨나고, 원인이 다하면 사라진다. 이것이 위대한 사문의 가르침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사리불은 전율했다. 그는 곧 목건련에게 이 말을 전했고, 둘은 산자야를 따르던 250명의 동료들과 함께 붓다의 승단에 귀의했다.
이 일화의 의미는 단지 붓다의 위대함이나 제자들의 개종에 있지 않다. 핵심은 사리불의 남다른 시선과 경청의 태도다. 그는 일상적 풍경 속에서 단정하고 고결한 수행자의 낯선 기운을 알아보았다. 평범한 나날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겸허하게 물었기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남다른 시선은 낯섬 속에서 새로운 기운을 찾아내는 거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주장했던 최진석 교수의 담론이 소환된다. 최 교수는 “훈련된 지성적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철학 수준”이라 주장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 높이에서 작동시킨다. 그 때 작동되는 것이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창의력과 상상력 (2) 윤리적 민감성 (3) 예술적인 영감. 인문(人文)은 ‘인간이 그리는 무늬’로 인간의 동선(動線)이다. 인문적 활동이란 인간의 동선을 파악한 후, 그 높이에서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상상이나 창의는 인문의 높이에서 튀어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단계에서는 실현되지 못한다. 인문적 시야를 가지려면, 시선의 높이를 상승시켜야 한다. 그건 전략적 높이에서 자기 시선으로 세계를 보고 자신이 직접 그 길을 결정하는 일이다. 시선의 높이는 생각의 높이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라고 최진석 교수는 자주 말한다.
시선이 바뀌면 보이는 게 달라진다. 땅 위의 아웅다웅하는 삶이 쪼잔해 보이고, 큰 틀에서 오히려 쪼잔한 싸움의 두 당사자 모두에게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생기고, 혹여 나 자신이 싸움의 당사가 된다면 통 크게 한발 물러설 용기를 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더 이상 땅 위의 삶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지배해 온 규칙의 구속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땅 위의 삶을 하늘에서 바라봤기 때문에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거다. 그러다 보면, 내가 옳다고 여겨 온 신념, 나를 가둬온 고정관념을 바로 시선의 높이로 깨어 버릴 수 있다.
익숙한 것이 새로워지고 낯선 것이 다정하게 다가올 때 우리는 틀을 벗어나 활력이 생긴다. <금강경>의 핵심은 이렇다. “그 무엇에도 갇히거나 얽매이지 말고, 마주하는 사람과 일에 기꺼이 마음을 내라.” 법인 스님이 말하는 사례들을 더 들어 본다. “‘낯선 사람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을 존귀하게 보게 되었다’는 어느 스님의 고백이 있다. 조계종의 스님들은 매년 의무 연수를 받는다. 경학 심화, 인문, 복지시설 연수다. 그 스님은 별 기대 없이 장애인 복지관에서 조리와 배식, 청소 봉사를 했다. 그러나 사흘의 봉사 후 세상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늘 받던 공양에서 벗어나 음식을 해주는 입장이 되자 밥과 반찬, 사람들의 얼굴이 새삼 다르게 보였다. 특히 경제적으로 어려우면서도 환한 얼굴로 봉사하는 이들에게 큰 감동을 받았다. 스님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이 누리고만 살아왔음을 부끄럽게 느꼈다. 봉사라는 낯선 규칙 속에서 그는 자신의 허물과 세상 사람들의 고마움을 동시에 깨달었다. 이후 그는 ‘내가 서 있어야 할 곳은 세상의 낮은 자리’임을 알고, 하심과 공경의 마음으로 봉사할 때 가장 평온하고 기쁨이 넘친다고 고백했다.”
미셸 푸코는 익숙한 질서의 해체 속에서 사유의 공간이 열린다고 했고, 질 들뢰즈는 사유는 만남과 충격 속에서 시작된다고 말했다. 라캉은 인간은 언어가 구축한 ‘상징 질서’ 속에서만 사고하고 욕망한다고 보았다. 그 속에서 계급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언어가 내면화된다. 결국 인간의 굴레란 편견과 고정된 사고의 반복이다. 우리는 익숙한 환경과 가치관에 갇혀 살아간다. 알고리즘의 굴레는 유튜브에만 있지 않다. 다양성의 시대 같지만, 실제로는 안이한 범주 안에서만 수많은 변주가 반복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익숙한 영역을 넘어 낯선 규칙 속으로 건너가 새롭게 사고하고 실천해야 한다. ‘사는 대로 생각할 것인가, 생각하며 살아갈 것인가’는 결국 각자의 몫이다.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네.” 명나라 문인 진계유의 시 ‘뒤에야’의 일부다. 지금 당장 낯선 규칙을 만들어 보자. 그곳에서 고요한 깨우침이 피어날 것이다.
뒤에야 / 중국 명나라 문인 陳繼儒(진계유)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평상시의 마음이 경박했음을 알았노라.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소란스러웠음을 알았노라.
일을 돌아본 뒤에야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음을 알았노라.
문을 닫아건 뒤에야
앞서의 사귐이 자나쳤음을 알았노라.
욕심을 줄인 뒤에야
이전의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노라.
마음을 쏟은 뒤에야
평소에 마음씀이 각박했음을 알았노라.
5
오늘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이고, 말씀은 <루카 복음> 6,12-19 “열두 사도를 뽑으시다” 이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홀로 너머 함께> / 상지종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루카 6,17)
홀로 오른 산
벗들과 함께
내려오시다
홀로 머문 밤
벗들과 함께
새벽이시다
홀로 걷던 길
벗들과 함께
나아가시다
성경에서 숫자 12는 완전함, 충만함, 그리고 조직의 완결을 의미하며, 이는 이스라엘 12지파와 예수의 12사도를 통해 나타납니다. 이 숫자는 단순히 개수를 넘어 하나님의 백성 전체와 그들을 이끄는 권위를 상징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중에서).
박한표 프랑스 파리 10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국내에 들어와 대전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문화원장을 하다가 와인을 공부하였습니다. 경희대 관광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또한 와인 및 글로벌 매너에 관심을 갖고 전국 여러 기관에서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인문운동가를 꿈꿉니다. 그리고 NGO단체 대전문화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그만두고, 지금은 인문운동에 매진한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마을 활동가로 변신중이다 |